교수 혼자 떠들고 학생 여럿이 듣는, 그런 강의의 끝이 다가온다읽음

이종필 교수

(40) 챗GPT가 바꿀 대학의 미래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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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제한 온라인 비대면 수업, 시간·공간적 제약 뛰어넘어
챗GPT의 등장, 또 한 번의 혁신 예고…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형 교육 가능한 ‘인공지능 개인교수’ 등장할 수도
‘누가 많이 아는가’보다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시대…지식의 생산 주체도 변화

지난해 12월 미국의 오픈AI가 챗GPT를 발표했다. 불과 석 달여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챗GPT로 난리다. 7년 전 알파고가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보다 더한 열풍이다. 문제는 이게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지난 14일 오픈AI는 전격적으로 GPT-4를 공개했다. 이전 버전과 달리 GPT4는 이미지도 인식한다. 오픈AI가 공개한 ‘GPT-4 기술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닉의 물리학 시험지를 이미지로 인식해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물리학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다. GPT-3.5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전 챗GPT가 한국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를 풀었을 때 모든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건 아니라고 했는데 GPT-4라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기술보고서에는 GPT-4의 다양한 시험 결과가 공개돼 있다. 거의 모든 시험에서 GPT-4는 GPT-3.5의 결과를 크게 앞섰다. 예컨대 SAT 수학과목은 상위 11%로, 상위 30%였던 GPT-3.5보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

GPT-4가 공개된 이틀 뒤인 16일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GPT-4 기반의 대형언어모형을 접목한 ‘마이크로소프트365코파일럿(MS 365 copilot)’이라는 새로운 앱을 선보였다. 코파일럿에서는 예컨대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하면 파워포인트의 슬라이드를 만들어주는 식이다. 코파일럿 앱이 공식적으로 출시되면 우리의 일상적인 업무환경도 크게 바뀔 것이다.

요즘은 이처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인공지능을 장착한 서비스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나하나 항목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이러다 정말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했던 ‘특이점’(기계가 인간을 넘어서는 시점)이 머잖아 도래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린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시대의 흐름 속에 그 레일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냥 넋만 놓고 있기엔 신기술이 바꾸는 일상 또한 만만찮게 버겁다. 당장 대학에서는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챗GPT를 어떻게 할 것인지로 뒤숭숭하다. ‘적극적으로 도입해 학생들의 창의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교육의 틀을 바꾸고 교수와 학생 모두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막기 위한 방책도 필요하다’ ‘단순히 챗GPT 결과를 베껴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한 기술적·제도적 준비가 있어야 한다’ 등의 말은 너무나 타당하지만 그만큼 공허하게 들린다. 어떻게 어디까지 도입하고 평가는 어떻게 바꾸고 교육의 틀은 어느 수준까지 파괴할 것인지 모두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챗GPT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와 함께 ‘협업’을 하는 시대에 인간의 창의성이란 과연 무엇인지도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지난 칼럼에서 말했듯이 나는 챗GPT가 ‘한국형 천재의 디지털적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형 천재는 많은 지식과 ‘정답’을 암기하고 있어서 궁금한 걸 물어보면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인재이다. 챗GPT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한국형 천재에 집착할 이유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런 인재를 길러내 현장에 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GPT-4는 한국어 실력도 아주 향상되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외국어로 된 물리학 시험 문제를 이미지로 인식해서 척척 풀어내는 시대에 우리의 수능은 과연 무엇을 위한 시험일까? 오직 상위권 변별력만을 위해 빙빙 꼬아서 만든 수학 문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조차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영어 문제, 과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교과과정에서 요구하는 결과만 얻으면 되는 생명과학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을 측정해서 챗GPT 시대에 대체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아마도 학력고사 시절부터 적잖은 사람들이 입시체계 및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해왔다. 그때부터 하나씩이라도 바꿔왔더라면 지금의 당혹감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얼마나 잘 준비돼 있을까?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제한 온라인 비대면 수업은 이 시대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비대면 수업은 수업시간·대학 강의실이라는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허물었다. 이는 단지 교수와 학생들의 출퇴근 및 등하교 부담을 줄였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 지금과 같은 대학이라는 기관이 등장한 것은 11세기 전후 유럽에서였다. 중세 대학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무척 흥미롭다. 내가 가장 놀라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수업이라는 것이 한 명이 앞에서 떠들고 나머지 다수가 자리에 앉아 그걸 듣고 있는 모습이다. 개중에는 딴짓을 하거나 조는 사람도 있다. 이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000년 동안 교수자가 학생들에게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더 좋은 칠판과 더 좋은 분필이 도입되었고 컴퓨터와 연결된 프로젝터와 스크린 또는 대형 디스플레이나 전자칠판도 갖춰져 있다. 요즘엔 학생들이 종이로 된 교과서나 노트보다 스마트 기기 한두 개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 모든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 명이 여럿에게’ 떠든다는 형식은 10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너뜨린 것이 팬데믹 시기의 비대면 수업이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걷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최고 수준의 강의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기술적으로는 지방의 대학생들도 국내 명문 대학 또는 세계 최고 대학의 강의를 듣는 게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비대면 강의의 이런 잠재력으로부터 대학의 위기를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메타버스까지 접목된다면 지금 대학 캠퍼스를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강의실들은 조만간 그 용도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원인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많은 학생들은 유튜브를 통해 정규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팬데믹은 이런 경향을 단지 극적으로 가속화했을 뿐이다.

챗GPT의 등장은 또 한 번의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챗GPT는 말하자면 모든 학생들이 개인교수를 두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아직 챗GPT의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진 않은 데다 잘못된 대답을 주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도 극복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줘서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개인교수는 하나의 분야만 잘 아는 게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과목별로 어느 교수의 수업을 찾아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필요한 지식의 ‘에브리씽’을 ‘에브리웨어’에서 ‘올앳원스’로 얻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팬데믹 기간 온라인 수업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라는 제약을 허물었다면 챗GPT는 거기에 더해 ‘한 명이 여럿에게’라는 장벽마저 허물었다. ‘한 명이 여럿에게’ 체제에서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질문이 쉽지 않았지만 ‘개인교수’ 챗GPT에는 그런 제약조차 없다. 개인교수의 최대 장점은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개인별 맞춤형 교육은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모든 교육기관이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MS의 코파일럿 같은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조만간 대학이 원하는 강의 동영상도 몇 번의 명령어 입력으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대한민국에서, 또는 전 세계에서 해당 주제를 가장 잘 강연하는 사람의 영상을 학습해 반영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건비를 줄이려는 대학이나 수업 부담을 줄이고 싶은 교수들에겐 모두 희소식일 것이다. 그 와중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도 물론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대학이 하는 일 중에서 단순한 지식의 전수는 전공과 교양을 불문하고 좋든 싫든 이제 인공지능에 자리를 물려줄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실험이나 실습, 토론, 프로젝트형 수업은 인공지능으로도 대체가 불가능(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하다. 결국 한 명이 혼자 떠들고 여럿이 이를 지켜보는 교육 방식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우리 고등교육의 목표도 누가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허용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몰라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코딩을 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함양해야 하지 않을까?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엔진의 구조와 작동원리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 물론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 고장 나면 정비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전하는 법만 알면 된다.

지식의 전수가 이뤄지는 대학이라는 울타리 자체가 이제 챗GPT의 시대에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대학의 또 다른 임무, 즉 지식의 생산이라는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작업에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주로 참여해왔지만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쉽게 ‘운전’을 배울 수 있는 학생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과정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즉, 지식의 생산과 유통(전수)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것이다. 학생들이 단지 기성의 지식을 습득하고 전수받는 데 그치지 않고(그 과정은 인공지능 개인교수가 주로 담당하게 될 테니까) 직접 지식 생산의 한 주체로 나설 수 있다. 앞으로의 대학 경쟁력은 바로 여기서 나오지 않을까?

GPT-4가 내일 당장 이 모든 변화를 몰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모레 아침엔 또 다른 놀라운 신기술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다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혼란 속에서도 이 모든 기술적 진보가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전통적 의미의 대학이 종말을 맞이할 날이 이제 머지않았다.

▶이종필 교수

[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교수 혼자 떠들고 학생 여럿이 듣는, 그런 강의의 끝이 다가온다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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