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감염병의 시대, 인류를 지키다읽음

김응빈 교수

(36) 자연발생설과 미생물 원인설(하) : 숙명의 라이벌 경쟁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나쁜 공기’가 감염병의 원인이라 믿던 때, 손 씻기를 강조한 의사 제멜바이스는 따돌림 끝 정신병원서 생을 마감했다
동시대 영국의 의사 스노는 더러운 식수가 콜레라의 원인임을 발견, 인류를 구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터무니없는 주장, ‘자연발생설’이 논파되고 나서도 이른바 ‘미아즈마(miasma)’라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또 다른 고정관념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상편·9월2일자 14면 참조).

미아즈마란 ‘나쁜 공기’라는 뜻인데, 그 옛날 사람들은 사체나 배설물 따위가 썩을 때 나오는 악취가 감염병의 원인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시절에는 의사가 손을 씻지 않고(심지어 시신을 다룬 후에도) 진료를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는 사실이 그 맹신의 정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죽하면 손 씻으라 말했다가 지독한 따돌림 속에 고독한 삶을 살다, 종국에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해 비명(非命)에 간 이그나즈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1818~1865)라는 의사까지 있었겠는가!

유럽 대륙에서 제멜바이스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바다 건너 영국에서는 존 스노(John Snow·1813~1858)라는 의사가 콜레라 확산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54년 여름, 런던의 빈민가 소호를 중심으로 콜레라가 창궐했다. 손쓸 사이도 없이 6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역시나 미아즈마로 콜레라가 전염된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스노는 나쁜 공기가 아니라 더러운 식수가 감염 경로라고 의심했다. 그는 희생자의 거주지를 지도에 표시해나갔다. 그러자 숨어 있던 진실이 그 지도 위에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망자 주소가 특정 거리를 중심으로 몰려 있었다. 스노는 해당 가정을 일일이 방문 조사했고, 이들 모두 같은 펌프에서 물을 길어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어서 문제의 펌프를 조사해보니 근처 화장실에서 나오는 오물이 펌프의 수원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오염된 물이 콜레라를 퍼뜨리고 있다고 확신한 스노는 펌프 사용 중단을 강력히 주장했고, 급기야 문제가 된 펌프의 손잡이를 빼버렸다. 이런 극단적 조치 이후로 콜레라 환자 추가 발생이 멈추었다. 스노의 공로를 기려 지금도 그 거리에는 손잡이가 빠진 펌프가 그대로 남아 있다.

파스퇴르의 한 맺힌 결심

1857년, 발효가 효모에 의한 생물학적 반응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1895)는 자연발생설 논파(1861)와 저온살균법 개발(1864) 등 혁혁한 연구성과를 연이어 내놓았다. 마침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그를 초청하여 공로를 치하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이 자리에서 파스퇴르는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찾아내서 없애는 게 자기 꿈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안타까운 개인사가 있다.

장티푸스로 두 딸을 잃은 파스퇴르, 독일인 코흐가 먼저 탄저병 균을 발견한 데 분노했고 결국 백신을 최초로 만들었다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앙숙’ 관계 속에서 두 맞수의 연구소는 세계의 감염병 연구를 선도했다

호사다마라고 결혼 10주년이 되던 1859년, 이 전도유망한 과학자에게 엄청난 시련의 파도가 몰려왔다. 아홉 살 난 큰딸이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에는 둘째 딸마저 같은 질병으로 잃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이 자식을 앞세우는 것이라고 하는데, 병마로 어여쁜 두 딸을 잇달아 먼저 보낸 그 심정이 어땠을까? 황제에게 말한 그 꿈이 단순한 과학자의 꿈이 아니라 한 맺힌 아버지의 복수심으로 다가온다. 1876년, 탄저병으로 죽은 소의 사체에서 분리된 세균이 그 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드디어 규명되었다. 그러나 주인공은 파스퇴르가 아닌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Robert Koch·1843~1910)였다.

당시로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코흐가 특정 미생물이 감염병의 원인이라는 ‘미생물 원인설(germ theory)’을 입증하며 혜성처럼 등장하자 학계는 놀라움에 들썩였다. 아울러 1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제멜바이스의 명예가 회복되고 공로가 재조명되면서 하늘나라에서나마 고인이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당시 세균학 분야 제1인자로 꼽히던 파스퇴르에게는 놀라움이 분노로 바뀔 지경이었다. ‘최초’ 타이틀 경쟁에서 밀린 아쉬움도 컸지만, 승자가 독일인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여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파스퇴르는 잔 다르크에 버금가는 애국심의 소유자였다.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파스퇴르는 쉰 살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입대를 지원했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그 이유는 나이가 아니라 1868년에 맞은 뇌졸중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파스퇴르의 간절한 바람과는 반대로 프랑스는 반년 만에 참패했고, 독일에 50억프랑이라는 거액의 배상금에 더해 영토 일부까지 내주어야 했다. 알퐁스 도데의 유명한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알자스-로렌 지방이다. 1871년 파스퇴르는 3년 전 프로이센의 본대학교 의학박사 학위를 반납하며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백신 개발자 1호는?

백신 하면 으레 1796년 우두(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소에서 뽑은 면역 물질) 접종으로 천연두 박멸의 길을 연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1749~1823)를 떠올린다. 제너가 접종한 우두를 최초의 백신으로 볼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백신을 개발한 게 아니라 정황 증거만으로 멀쩡한 사람에게 병원체를 일부러 감염시킨 셈이다. 다행히 접종을 받은 소년을 궁극적으로 천연두에서 보호할 수 있었고, 이로써 백신 개발의 실마리를 주었지만 말이다. 명실상부하게 백신을 최초로 개발한 인물은 다름 아닌 파스퇴르다.

1877년 파스퇴르는 가축 전염병 예방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닭 콜레라 연구를 시작해 이듬해에 그 원인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병원성 미생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백신으로 연구 범위를 넓혔다. 실험동물에 관한 전문성이 부족했던 파스퇴르는 1878년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면서 젊은 의사 한 명을 연구원으로 고용했다. 그해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 연구를 재개했다. 그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키웠던 세균 배양액의 일부를 뽑아 닭에게 주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닭들이 콜레라에 걸리지 않았다. 그 배양액에서 추출한 병원균을 새로 키워 닭에게 투여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파스퇴르는 휴가 동안 방치된 배양액 속 세균들이 약해져 병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추정하고, 반복 실험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약해진 닭 콜레라균을 건강한 닭에 주입하면 병은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정상 콜레라균의 감염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후속 동물실험 결과는 파스퇴르가 옳았음을 입증해주었고, 마침내 1880년 파스퇴르는 이러한 연구성과를 발표했다. 파스퇴르는 약화한 병원균을 ‘백신(vaccine)’이라고 명명했는데 여기에는 제너의 업적, 즉 최초의 우두 접종을 기리는 뜻이 담겨 있다. 영어 ‘vaccine’은 라틴어로 소를 뜻하는 ‘바카(vacca)’에서 유래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작동원리는 몰랐지만, 최초의 ‘약독화 생균백신’을 제조하여 향후 백신 개발 연구와 면역학이 자리 잡는 주춧돌을 놓았다. 그리고 곧이어 탄저병 백신을 만들어(1881년) 뒤늦게나마 한풀이를 했다.

두 거인의 첫 만남과 오해, 그리고 경쟁

영국 외과의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1827~1912)는 제멜바이스와 스노, 파스퇴르의 연구성과에 주목해 1865년 무균수술법을 최초로 시도했고, 임상 데이터를 모아 1867년 논문으로 그 성과를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명성을 쌓기 시작한 리스터는 1881년 여름, 런던에서 열렸던 제7회 국제의학회에 코흐를 연사로 초빙했다. 파스퇴르도 그 학회에 참석했고, 거기서 두 거인이 처음으로 대면했다.

코흐는 자신이 개발한 미생물 배양법(우무와 ‘퓨어 컬처’·경향신문 2021년 7월9일자 14면 참조)을, 파스퇴르는 탄저균 백신 개발 성과를 각각 소개했다. 첫 상견례는 적어도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학회 직후에 코흐 연구진에서 미생물 배양 전문가의 자부심을 뽐내듯이, 파스퇴르가 개발한 탄저병 백신의 순도가 의심된다는 부정적 내용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이듬해인 1882년 제네바에서 학회가 열렸는데 이번에는 파스퇴르가 그 논문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고, 청중석에는 코흐도 앉아 있었다.

파스퇴르는 프랑스어로 발표를 진행했다. 불어를 잘 모르던 코흐는 듣는 내내 옆자리 교수에게 수시로 질문했다. 그러던 중 그 교수가 의도치 않게 통역 실수를 저질렀다. 파스퇴르가 자신의 백신 연구를 비판한 코흐의 논문을 언급하면서 ‘독일의 문헌(recueil allemand)에 의하면’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독일의 오만(orgueil allemand)에 의하면’이라고 오역한 것이다. 이를 들은 코흐는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았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두 거인은 맞수에서 앙숙이 되어 서로에게만은 절대로 지지 않으려고 연구에 더욱 매진했다.

파스퇴르는 1885년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우고 초대 원장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코흐는 1891년 설립된 ‘프로이센 왕립 전염병 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연구소는 1905년 코흐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이후로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로 개칭했다.

이 두 라이벌 연구소는 유럽을 넘어 세계적으로 미생물 연구, 특히 감염병 연구를 선도해왔고, 21세기 감염병의 시대에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혁명과 전쟁으로 얼룩진 혼란의 시기에 두 적대국에 속한 과학자들의 치열한 경쟁이 인류를 감염병에서 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파스퇴르의 말대로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김응빈 교수

[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결…감염병의 시대, 인류를 지키다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은 책으로 <술, 질병, 전쟁: 미생물이 만든 역사> <온통 미생물 세상입니다> <생명과학, 바이오테크로 날개 달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미생물과 산다>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 등이 있다. 또한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파트너 채널 ‘김응빈의 생물 수다’를 연재 중이다. ‘수다’는 말이 많음과 수가 많음, 비잔틴 백과사전(Suda) 세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네이버 채널 링크: https://contents.premium.naver.com/biotalkkim/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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