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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 (마지막회) 보통과학자론, 과학을 지탱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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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 (마지막회) 보통과학자론, 과학을 지탱하는 사람들

2022.08.11 10:56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엘리트스포츠는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은 물론이고 국위 선양의 첨병으로서 국민에게 기여하는 정서적 효과가 매우 크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활체육과 사회체육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김정효, 남궁영효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문화철학적 고찰》 중에서.

 

한국에서 스포츠와 과학이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스포츠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과 월드컵 등이 끝나면 일부 인기종목을 제외하면 관심이 사그라든다. 과학도 매년 10월 발표되는 노벨상 시즌에 반짝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지만 수상 발표가 끝나면 무관심의 긴 터널에 진입한다. 두 분야 모두 극단적인 엘리트 중심의 분야라는 공통점도 있다. 손흥민, 김연아, 박태환 등 스포츠 엘리트의 이름을 잘 기억하는 만큼 뉴턴, 아인슈타인, 다윈과 같은 과학 영웅의 이름도 잊히지 않고 역사에 기록된다. 두 분야 모두 엘리트를 영웅으로 미화하며 이들은 심지어 해당 분야를 넘어 국가의 영웅으로까지 추앙되기도 한다. 

 

엘리트 스포츠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탄생한 역사를 지녔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위대한 과학자들의 영웅서사 또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각색되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엘리트스포츠를 통한 국민통제가 국가권력에 의해 치밀하게 기획되었다면, 영웅주의 과학사는 과학자사회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노벨상이라는 피라미드의 꼭지점을 상징으로 하는 영웅주의는 과학계 스스로 만들어낸 문화인 셈이다. 20세기는 과학의 영웅주의가 잘 작동했던 한 세기였다. 하지만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과학자사회의 문화와 여러 제도들은 이제 과학생태계 전체에 균열을 만들며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불평등과 중산층, 위기의 기원과 해법

 

경쟁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모든 분야는 승자에게 큰 보상을 제공할 수 밖에 없다. 스포츠는 올림픽 금메달로, 예술분야는 각종 경연대회의 상으로 승자에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우위를 약속한다. 과학에도 노벨상을 비롯한 각종 상이 존재하지만, 실제로 과학계의 경쟁은 눈에 보이는 트로피 아래에서 작동한다. 현대의 과학자사회는 궁극적으로 연구비를 두고 경쟁하며 연구비 경쟁은 결국 논문 실적으로 귀결된다. 누가 더 많은, 그리고 좋은 논문을 출판했느냐가 결국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가져가느냐를 결정하고 더 많은 연구비를 가져간 연구자가 더 많은 논문을 출판하는 일종의 양극화 체제가 만들어진다.

 

건강한 경쟁은 과학의 진보에 도움이 된다. 문제는 현재 과학자사회가 겪고 있는 경쟁이 희소자원을 두고 무한경쟁을 펼치는 생존투쟁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는 상업화된 대학에서 지나치게 많은 과학자가 수요공급의 고려 없이 생산된 지난 20세기에 발생한 문제다. 일자리의 증가보다 지나치게 많이 생산된 과학자의 숫자는 과도한 경쟁과 더불어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가져왔고 생존을 위한 경쟁에 노출된 과학생태계는 데이터조작, 논문출판을 둘러싼 정치적 암투, 연구비를 둘러싼 불공정 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그렇게 과학생태계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으로 불평등이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결과임을 보여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018년 발표한 《세계불평등 보고서》에서 상위 1퍼센트의 인구가 하위 50퍼센트 전체와 동일한 규모의 부를 소유하고 있음을 밝혔다. 흥미로운 점은 소득 불평등이 OECD 국가들의 국내총생산 성장과 음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소득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 사회 안정성과 사회 구조가 무너진다”고 경고한다. 영국의 전염병학자 리차드 윌킨슨은 불평등은 사회 자본을 무너뜨림으로서 사회를 불안과 분쟁에 취약한 상태로 만든다고 경고했다. 피케티는 “불평등 심화가 사회 내 경제, 사회, 정치적 취약성을 만들어내고 이는 약화될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아 여전히 우려된다”고 말한다.

 

과학생태계가 놓인 상황은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와 닮아 있다. 경쟁이 심화될 수록 논문과 연구비를 둘러싼 양극화는 심각해지고, 이렇게 심화된 불평등은 과학생태계의 건강한 발전을 저해할 정도의 생태적 위기로 나타나고 있다. 유명 과학자의 논문조작과 연구비 부정, 교수들의 권위주의와 학생의 인권침해, 과학자들의 가짜학회 참석과 교수들의 논문 저자 등재를 둘러싼 각종 비리는 심각한 불평등과 양극화가 과학생태계에 미친 구조적 영향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과학계의 구조적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이런 총체적 부정부패 행위들은 과학생태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피케티와 경제학자들이 경고한 불평등의 귀결은 사회의 불안정성으로 나타난다.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중산층을 두텁게 만드는 것이다. 정치인도 경제학자도 모두 알고 있는 이 단순한 대안이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불평등한 양극화 사회에서 큰 이익을 취하는 해당 사회의 기득권들이 제도를 이용해 중산층이 두터운 사회로의 전환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득권에 해당하는 이들이 정치를 장악하고 정책을 결정한다는 점이다. 과학생태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왜곡된 체제에서 이미 성공한 엘리트 과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과 제도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것이다. 보통과학자의 연구와 삶이 계속해서 악화될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는 기득권에 의한 정치의 부패가 전세계적인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불평등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치밀한 통계분석으로 밝혀냈다. 동아일보DB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불평등이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치밀한 통계분석으로 밝혀냈다. 동아일보DB

4할타자의 멸종과 보통과학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과학자들에 의해 과학이 진보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과학분야에서의 통계로 스타과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스타과학자의 장례식이 과학을 진보시킨다는 점이 알려져 있지만 과학생태계에서 기득권을 점유하고 있는 과학자 대부분은 이런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아인슈타인과 다윈 같은 과학자들의 성공이 과학의 진보에 더욱 중요하다고 믿는 영웅주의 신화의 충실한 신도들이기 때문이다.

 

작고한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미국 프로야구의 광팬이기도 했고, 미국 야구에서 4할타자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논문을 쓴 적도 있다. 그의 책 《풀하우스》는 야구에서 4할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통해 진화의 역사에서 인류의 탄생과 같은 큰 도약이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낸다. 야구에서 괴물 같은 4할타자가 사라지는 이유는 타자의 실력이 하락했거나 투수의 실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야구 선수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굴드가 야구 통계를 통해 도달한 결론이었다. 야구가 프로리그가 되고 점점 더 선수들의 수준이 전체적으로 상승하게 되면 괴물처럼 튀는 4할타자는 나타날 확률이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굴드의 4할타자 가설은 진화의 역사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도약을 설명하는 비유이지만 한 분야가 전문화되고 경쟁을 통해 발전하면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육상과 수영에서 엄청난 세계신기록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프로복싱에서 엄청난 괴물 선수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나아가 과학계에서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엄청난 영웅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굴드의 4할타자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엄청난 전문화를 통해 과학자 전체의 수준이 크게 증가한 과학생태계에서 아인슈타인과 같은 4할타자의 등장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정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현대 과학계는 갈 수록 공동연구 체제를 선호하고 있다. 과학자 혼자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연구는 공동연구를 통해 수행되고 있다. 4할타자가 사라진 과학생태계에서 99%의 과학자는 모두 보통과학자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억지로 4할타자를 찾으려 애쓰는 논문출판과 연구비지원 시스템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과학은 더이상 소수의 영웅에 의해 진보할 수 없으며 과학의 영웅은 이제 나타날 수도, 나타난다 해도 혼자서는 과학을 진보시킬 수도 없다. 모든 과학자는 보통과학자이며 과학은 영웅이 아니라 보통과학자들의 협력네트워크를 통해 진보하는 체제로 변화되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굴드가 4할타자론을 주장했던 책 《풀하우스》의 핵심 주장은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명제였다. 과학생태계에서 더이상 4할타자가 불가능하다면 과학생태계의 진화 또한 다양성의 증가를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과학을 지원하는 제도와 정책 그리고 논문출판과 연구비지원 시스템은 모두 이런 고려 속에서 다시 짜여야만 한다.

 

스테븐 제이 굴드는 4할타자의 비유를 통해 진화의 역사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중가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4할타자의 비유를 통해 진화의 역사가 진보가 아닌 다양성의 중가인 이유를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Triumph and Tragedy in Mudville' 표지.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 제공

계급투쟁의 과학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 사회·정치·경제적 입지를 가진 상류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는 혁신의 주체였다고 평가했다.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지주 계층이 각종 기술적 혁신을 통해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한 셈이다. 하지만 봉건사회를 타파했던 이 상류층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하층민들을 착취했고 결국 봉건귀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무산계급이 결국 부르주아의 불평등한 체제를 타도하고 역사의 주체가 되는 것만이 그가 완벽한 이상향으로 상정한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기득권 엘리트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심화된 불평등이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의 혼란이 결국 기득권의 타파로 이어지는 계급투쟁의 순환이 마르크스가 생각한 사회불평등이 해소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져올 폭력과 야만의 퇴행을 경험했고, 마르크스식의 계급투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해소하는 방식이 프롤레타리아의 직접혁명이 아닐 수 있다는 역사적 실험결과를 가지고 있다.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을 직시하고, 기득권 엘리트와 무산계급의 필연적인 충돌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통찰은 위대하지만 불평등의 해소가 단지 혁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본 그의 예측은 나이브했음이 분명하다. 사회의 불평등은 자본주의적 경쟁도 공산주의적 혁명도 아닌 어딘가의 중간영역에서 그 해결책이 찾아지게 될 것이다.

 

과학생태계는 어떻게 될까.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가는 무한경쟁 속에서 불평등이 고착화되고 부르주아지 같은 소수의 과학엘리트가 독점해버린 과학생태계를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이 과연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듯 프롤레타리아, 보통과학자의 독재를 통한 혁명 외엔 없을까. 그것이 혁명을 통해서는 아닐지라도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었던 역사적 교훈이 보통과학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법칙임은 분명해 보인다. 과학자들은 스스로의 권리와 과학생태계의 건강과 나아가 과학을 통해 사회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의 극대화를 위해서 연대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의 부상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부르주아지가 싫든 좋든 촉진하지 않을 수 없는 공업의 진보는 경쟁에 의한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에 연합에 의한 그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이처럼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점유하는 기반 자체가 부르주아지의 발 밑에서 무너져 간다. 부르주아지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덤을 파는 일꾼을 생산하는 셈이다.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다 같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보통과학자들의 연대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연대가 실패한 혁명으로 이어지게 될지, 성공한 혁신이 될지는 모르지만 보통과학자는 반드시 연대하게 될 것이다. 과학이 지닌 합리성의 힘이, 마르크스주의가 실패한 지점에서 성공의 좁은 길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계급투쟁을 통해 해소된다고 생각했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과학생태계의 모습은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19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닮아 있는지 모른다. 그 해결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될지, 아니면 과학자사회가 새로운 해법을 찾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키미디어 제공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체제의 모순이 계급투쟁을 통해 해소된다고 생각했다.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대 과학생태계의 모습은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19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닮아 있는지 모른다. 그 해결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 될지, 아니면 과학자사회가 새로운 해법을 찾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위키미디어 제공

※참고문헌

-김정효&남궁영호. (2009). 엘리트스포츠에 대한 문화철학적 고찰. 움직임의 철학 : 한국체육철학회지, 17(1), 83-100.
-김태호. (2013). 근대화의 꿈과 ‘과학 영웅’의 탄생: 과학기술자 위인전의 서사 분석. 역사학보, 218, 73-104.
-스포츠스타를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하는 엘리트스포츠 시스템과, 노벨상 수상자를 꼭지점으로 하는 현대 과학생태계는 서로 닮아 있다.
- https://ipdefenseforum.com/ko/2018/10/%EB%B6%88%ED%8F%89%EB%93%B1-%EC%8B%AC%ED%99%94/
-김지윤, 마르크스주의를 명쾌하게 정의하다, 마르크스21941호(2021년 9~10월호), https://marx21.or.kr/article/495
- https://ko.wikisource.org/wiki/번역:공산당_선언/부르주아와_프롤레타리아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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