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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아빠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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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아빠의 진화

2021.04.18 07:52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이면 모두 엄마와 아빠, 즉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확실한 아버지가 있다고 해도, 새끼를 지켜주고, 돌보는 아버지는 예외적인 경우다. 포유류의 경우 고작 5%의 종만 수컷이 자녀 양육에 동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인간이다.

 

 

○ 아이를 돌보지 않는 아버지?

 

이혼 후 자녀의 양육비를 주지 않으면 당장 ‘배드 파더스’ 사이트에 올라갈 지도 모른다. ‘배드 파더스’ 사이트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법적 논란이 있지만,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아버지는 아이를 돌봐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진화적으로 수컷 육아는 세 가지 조건이 뒷받침될 때만 일어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첫째, 아버지 양육이 새끼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도와줄 것이 없거나 그 효과가 미미하면 아버지는 아이를 돌보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한다. 뭐, 당연한 일이다.

 

둘째, 새로운 짝짓기 기회가 많으면 수컷 양육은 좀처럼 나타나기 어렵다. 새끼를 내버려 두고 새로운 짝을 찾아 나서는 것은 금수와도 같은 짓이지만, 말 그대로 금수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흔하다. 인간과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 오랑우탄은 아버지가 자식을 거의 돌보지 않는다. 침팬지도 새끼를 챙긴다는 몇몇 일화적 보고가 있지만, 진위가 의심스럽다.

 

셋째, 아버지는 자신의 새끼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상당수의 종에서 아버지는 자기 새끼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다. 비슷한 시기에 복수의 상대와 교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식 입장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독특한 조건이 모두 성립되어야 부성 양육이 진화한다. 일단 '저 녀석이 내 새끼다’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고, ‘새 짝을 찾는 것이 쉽지  않겠군’이라고 판단하여, ‘내가 도와주면 자식에게 유리하겠다’라는 확신이 서야 한다. 인간 사회가 그 어려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들어냈다.

 

 

○ 아버지는 정말 필요한가?

 

그런데 정말 아버지가 있으면 자녀에게 도움이 될까? 어머니만 있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 입장으로는 조금 서운한 말이지만 사실 누구나 경험하다시피 아이는 엄마를 더 좋아하고, 또 엄마가 더 필요하다. 아버지는 그냥 ‘무거운 물건을 옮길 때나’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 구석기시대 선조들은 외적도 막고, 포식자도 막고, 장작도 패고, 사냥도 해오고 그런 도움되는 역할이 아버지에게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은 경찰과 소방관, 그리고 배송 기사가 그 일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의 생존과 건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통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없으면 살해 및 납치 위험성이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유년기 사망률도 두 배 이상 높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식량이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해주는 가장 믿을만한 대상이다. 게다가 아버지가 있으면, 다른 어른도 아이에게 더 많은 식량을 공급한다. ‘그 집 자식’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 집 아비’도 ‘우리 집 자식’에게 먹을 것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없으면 이러한 ‘보험’ 성격의 복수 식량 공급 네트워크에서 소외당하기 때문에 굶는 날이 많아진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버지의 오랜 친구가 작은 손에 쥐여주는 사탕값을 받을 일도 없다는 것이다.

 

부성 부재 상황은 가계의 전반적인 사회경제적 지위를 하락시키는 중요 요인이다. 낮은 사회경제적 수준은 수많은 부정적 파급효과를 낳는다. 일단 가족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는 경우 자녀는 더 자주 질병에 걸리고, 일찍 죽는 일도 많아진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많이 겪고, 우울증도 많아진다. 사회적 네트워크도 취약해지고, 전반적인 사회적 성취에 악영향을 미친다. 다음 세대의 혼인과 양육에도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 아버지는 식량 공급만 하는가?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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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녀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하고 자원을 제공하여 가족의 건강 수준을 향상한다? 설령 맞는 말이라고 해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이 땅의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맨날 뼈 빠지게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유일한 임무라는 말인가?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덕분에 부성 식량 자원 공급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있다. 물론 산업 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족 전체 소비의 절반 이상이 아버지의 수입으로 충당되지만, 점점 어머니가 공급하는 재정적 역할이 커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자녀의 숫자가 줄어서 어머니가 양육에 할당하는 에너지와 시간이 줄었고, 산업 사회의 경제체제에서 신체적 강인함이나 전투 능력 등의 중요성이 감소했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 참여가 늘어난 덕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역할은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버지와 신체적 놀이를 많이 할 경우, 자녀의 사회적 주도성이 높아진다. 아버지의 보호 속에서 아이는 더 거칠고 위험한 신체적 활동을 과감히 시도할 수 있고, 목적 지향적 놀이에 더 몰입할 수 있다. 이는 유년기의 초기 사회화 과정에서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하고, 결과적으로 무리에서 더 높은 인기를 얻도록 도와준다. 속칭 ‘인싸(인사이더)’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게다가 자녀 교육에 개입하는 아버지를 둔 자식은 높은 수준의 학문적 성취를 얻고, 심리적인 어려움을 적게 겪는다. 심지어 지능지수도 높아진다. 물론 연구를 해석할 때는 조금 주의해야 한다. 아버지가 원래 똑똑해서 자녀가 똑똑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자녀 교육을 많이 도와주어서 자녀가 똑똑해진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적인 원인이든, 환경적인 원인이든 상관없다. 학자 집안에서 학자가 나온다는 옛말처럼, 아버지의 교육은 자녀의 학문적 성공을 예견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다.

 

 

○ 생태 환경과 아버지

 

흥미롭게도 집단에 따라 아버지의 중요성은 상이하다. 일반적으로 저위도 지방일수록 아버지의 존재감이 희박해지는 특징이 있다. 농사의 중요성이 덜하거나 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다. 이에 반해서 척박한 고위도 지방일수록 아버지의 존재감이 뚜렷해진다. 유럽 사회와 동아시아 사회가 대표적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갖은 고생을 해야 하고, 수확량도 빈약하다.

 

자원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난하면 아무래도 살기는 편하다. 겨울이 없으니 장작을 팰 이유도 없고, 튼튼한 집도 필요 없다. 옷도 가볍게 만들어 입으면 그만이다. 씨를 뿌리면 금방 싹이 나고, 낟알이 왕창 달린 수확물을 일년에 여러번 얻을 수 있다. 농사에 실패해도 걱정 없다. 강과 바다에 물고기도 많고, 사냥할 날짐승, 들짐승도 많다.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데, 탐스러운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그득하다.

 

이런 풍족한 환경이라면 남성은 양육보다 새로운 짝을 찾아 번식하는 전략을 취하는 편이 유리하다. 남성, 즉 아버지의 가족 내 영향력은 줄어든다. 흔히 서구 사회의 여권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유럽 사회의 여권은 엄청나게 열악했다. 동남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권이 상당히 높았다. 천혜의 생태적 환경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하고 기후가 혹독하면 하루하루의 삶이 도전이다. 짧은 여름 한 철에 농사를 집중적으로 지어야 한다. 미적거리다가 때를 놓치면 굶어 죽는다. 땅은 척박하다. 고된 쟁기질을 하고, 냄새나는 퇴비도뿌려야 한다. 비가 안 오면 수로도 파야 한다. 빗물이 없으면 우물을 파야하고, 그것도 어려우면 먼 곳에서 물을 길어와야 한다. 긴 겨울을 나려면 미리미리 땔감을 산더미처럼 쌓아두어야 하고, 두꺼운 옷을 지으려니 목화밭을 또 일궈야 한다. 정말 겨우겨울 살아낸다.

 

이런 환경이라면 남성은 새로운 짝을 찾아 번식하는 전략을 쓰기 어렵다. 자칫하면 기존에 있던 자식도 굶겨 죽일 판국이다. 그래서 일부일처제가 강화되고, 역설적으로 아버지의 가족 내 영향력은 크게 높아진다. 한국이나 일본이 대표적이다.

 

 

○ 고개숙인 아버지

 

아무래도 현대 사회는 아버지의 중요성이 과거에 비해 덜하다. 전통적으로 아버지 및 부계 친족이 제공하던 식량 공급, 사회적 부조와 집단적 보호의 기능을 점점 국가가 대신하고 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지만, 지금은 둘 다 아니다. 동사무소 사회복지과 공무원이 더 낫다. 아버지가 있으면 자녀의 건강 수준이 높아진다지만, 그보다는 의료보험 유무가 훨씬 확실한 건강 수준 예측 요인이다.

 

이런 측면은 현대 사회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다. 어머니 양육의 상당 부분은 심지어 0세부터 제공되는 다양한 육아 프로그램에서 대신하고 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전통적으로 어머니가 정서적 유대와 보호, 가족의 질병 관리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는데, 지금은 학교 기관이나 친구, 전문적인 상담 프로그램과 보건 시스템이 전통적인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불과 3-40년 전만 해도 가정 내에서 처리되던 과업이다. 이제는 사회전체가 나눠 감당하고 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를 높이는 확실한 효과가 있겠지만, 왠지 아쉬운 면도 없지 않다. 부모님의 은혜는 여전히 하늘같지만, 아무래도 요즘의 아이에게는 비오기 전 하늘처럼 제법 낮아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근대 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아버지, 어떤 어머니를 만나는지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무지의 베일’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금수저, 흙수저 담론이 뜨거운 이슈지만, 과거 사회에는 정말 어떤 부모를 만나는지가 사실상 ‘모든 삶’을 결정했었다. 우리가 영아 유기나 살해 등에 관심을 가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각각의 가족 여건에 일임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복지국가의 기본적 전제다.

 

좀 실망스럽다고? 하지만 더 원초적인 아버지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기회다. 아버지의 비위를 거스르면 밥도 굶고, 집에서도 쫓겨날 것이라는 원초적 두려움으로 지탱되는 아버지의 권위가 그리운가? 곤란한 일이다. 인류의 더 오랜 과거로 돌아가 보자.

 

 

○ 전수자로서 아버지

 

인간의 수명이 지금처럼 늘어난 것은 약 20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는 침팬지와 수명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네안데르탈인은 대개 폐경을 맞기 전에 사망했다. 구석기 내내 인류는 단명했다. 그러나 구석기 후반에 들어 수명이 크게 늘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상징적 문화와 언어, 복잡한 사회 구조 등이 진화한 덕이다. 하지만 도약적 문화를 통해 수명이 길어진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길어진 수명이 고차원적인 상징적 문화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높은 수준의 인간 문화는 긴 수명과 공진화했다. 장수하는 아버지의 경험과 지혜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식에게 전달되어 적합도를 높였다. 오래 사는 지혜로운 아버지의 유전자가 자식을 통해 유전자 풀에서 크게 불어났다.

 

현대 사회의 아버지 역할은 강력한 신체적 힘을 통해 물리적으로 가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도 혹시나 해서 현관에 야구방망이를 가져다 놓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복면을 쓴 도둑 앞에서 아빠의 강력한 전투능력을 과시할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물론 가족에게 식량과 자원을 제공해주는 산타클로스도 아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늦은 밤, 양손에 통닭을 들고 귀가하는 아버지를 반기는 가족의 이야기는 자못 가슴이 저릿하지만, 철 지난 노스탤지어일 뿐이다. 클릭 몇 번이면 총알 배달되는데, 왜 아버지가 들고오는 식은 통닭을 기다리는가?

 

사실 우리 조상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주로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활쏘기나 사냥, 농사 등 신체적 활동도 배웠다. 삶의 지혜와 사회적 에티켓도 아버지에게 배웠다. ‘술은 아버지에게 배워라’라는 오랜 격언은 이러한 오랜 부성 지식 전달의 전통을 담고 있는 말이다. 정말 ‘술’만 아버지에게 배우라는 뜻으로 오해하지 말자. 자녀 교육에는 평소 아무 신경을 쓰지 않다가 느닷없이 19살이 되는 날, 이제부터 술을 가르치겠다고 하면 자녀들은 코웃음을 치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릴 것이다.

 

현대 사회의 여러 상황은 오히려 아버지의 가장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같이 놀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일하자.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며,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지식과 지혜를 전달하는 것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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