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로미어는 DNA 염기서열을 보호하는 염색체 끝부분으로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는 것이 곧 노화를 의미한다. ⓒphoto genengnews.com
텔로미어는 DNA 염기서열을 보호하는 염색체 끝부분으로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는 것이 곧 노화를 의미한다. ⓒphoto genengnews.com

노화는 필연일까. 세포분열이 멈추면 모든 동물은 죽지만 텔로미어의 길이만 유지할 수 있다면 노화 방지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연구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꿈에 그리던 장수의 비밀이 ‘텔로미어 길이의 늘림’에 있다는 것을 입증할 임상시험이 이뤄지고 있어 불로장생의 꿈을 실현하는 데 한 발짝 다가서고 있다.

텔로머레이스 이용한 노화 조절

‘100만달러의 임상시험으로 당신의 생체시계를 최소 20년 되돌려드립니다.’

지난해 10월 미국 캔자스주에 본사를 둔 바이오벤처기업 리벨라 진 테라퓨틱스가 미국립보건원(NIH)이 운영하는 임상시험 등록사이트(Trials.gov)에 공고한 내용이다. 100만달러를 들이면 인간의 노화 속도를 늦춰주겠다는 것이다. 리벨라의 치료제 요법은 노화를 지연시키고 심지어 역전하는 것이 목표다. 유전자 수준에서 환자의 텔로미어 구조를 늘려 노화를 원점에서 거꾸로 되돌리겠다는 것. 이를 통해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병을 치료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연말 기준 리벨라의 임상시험에 지원한 사람은 2명. 이 중 1명은 노령(79세)이다. 미국 임상윤리심의위원회(IRB)의 승인도 받았다. 리벨라는 자신들의 유전자 치료법이 세계 최초의 노화 치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실제로 효과가 있을까.

텔로미어(Telomere)는 염색체 끝에서 DNA 염기서열을 보호하는 염기쌍을 말한다. 인간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생명을 유지한다. 세포들이 분열될 때는 DNA를 복제한다. 하지만 염색체 끝부분에 달린 텔로미어는 복제되지 않고 세포분열 때마다 조금씩 길이가 짧아진다. 그리고 더 이상 줄어들 수 없을 만큼 짧아지면 세포분열은 정지하고 세포는 사멸한다. 이것이 바로 나이가 드는 과정, 즉 노화다. 근육세포에서 텔로미어의 길이가 짧아지면 힘이 약해지고, 피부세포에서는 탄력이 감소한다. 인간의 노화와 텔로미어는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렇다면 텔로미어가 닳는 걸 막을 순 없을까. 다행히도 가능하다. 텔로머레이스(Telomerase·텔로머라제라고도 함)라고 불리는 효소를 통해 텔로미어의 길이를 유지할 수 있다. 텔로머레이스는 염색체 끝의 특정 염기서열 구조인 텔로미어를 복구하는 효소로,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엘리자베스 블랙번 교수에 의해 처음 발견됐다. 이 발견으로 그는 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효소가 활성화되면 텔로미어가 짧아지지 않아 세포 노화가 억제되고, 생명체의 노화도 지연돼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리벨라가 ‘20년 회춘’을 해주겠다는 것은 바로 텔로머레이스를 이용해 텔로미어를 재건한다는 데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런데 텔로머레이스는 자연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 효소의 유전자가 활성화돼야 체내에서 텔로머레이스가 움직이도록 만든다. 텔로머레이스가 만들어지면 손상된 텔로미어가 복구된다.

실제로 이와 관련된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텔로머레이스 유전자가 고장 난 쥐에게 ‘4-OHT’라는 화학물질로 텔로머레이스 발현을 유도하자 놀랍게도 쥐들이 젊음을 회복한 것이다. 후각신경 세포가 퇴화해 냄새도 잘 맡지 못하던 녀석들이 세포가 살아나면서 킁킁거리게 되고, 고환과 비장, 내장의 세포들도 활력을 찾았다. 이들 세포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거의 고갈됐던 텔로미어가 텔로머레이스의 작용으로 상당히 복원돼 있었다. 이러한 역전은 노화 관련 질환에 대한 텔로미어의 회춘이 가능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임상시험 진행은 리벨라가 처음이다. 2015년 바이오벤처인 바이오비바의 엘리자베스 패리시 대표가 자사의 유전자 치료제로 텔로머레이스를 발현해 자신의 텔로미어가 길어졌다고 밝혔지만 미국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지 않은 데다 시험 대상자도 1명이고, 결과도 학술지에 발표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공식 임상시험으로 여기지 않는다. 리벨라의 임상시험 또한 대다수 세포에서 텔로머레이스가 활성화될 확률은 대체로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의학계에서는 역으로 암세포의 텔로머레이스 활성을 떨어뜨려 텔로미어를 짧게 하면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암세포의 죽음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텔로머레이스는 세포가 태어난 초기에는 높은 활성을 가진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기능이 억제된다. 반면 암세포는 세포분열을 격렬하게 하지만 텔로미어 길이가 짧아지지 않는다. 텔로머레이스가 계속 활성화돼 암세포는 노화하거나 죽지 않고 계속 증식한다. 암세포의 약 90%는 텔로머레이스 활성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텔로머레이스 감소시켜 암세포 죽음 유도

텔로미어 관점에서만 본다면 노화와 암은 반대의 선에 서 있는 것.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결국 노화를 막으려고 텔로미어의 길이를 길게 하려다 잘못 조작하면 정상세포가 암세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의학계에서는 노화를 되돌리려는 연구보다 텔로머레이스를 항암 유전자 치료제로 개발하려는 연구가 더 활발하다.

대표적인 연구가 일본 생명공학기업인 온코리스다. 이 기업은 감기의 원인이 되는 아데노바이러스를 이용해 피부암 흑색종을 치료하는 항암 유전자 치료제 ‘텔로머라이신’으로 임상 2상을 진행 중이다. 아데노바이러스에 암 억제유전자를 삽입해 병소에 주입하여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암세포처럼 텔로머레이스가 활성화되는 곳에 가면 스위치가 켜지는 단백질(프로모터)을 치료제에 내장하고, 이를 아데노바이러스에 삽입해 암세포로 운반한다. 텔로머레이스 활성이 높은 암세포에 들어가면 스위치가 켜져 암세포를 죽이는 기능이 작용한다. 한편 텔로머레이스 활성이 없는 정상세포에서는 스위치가 꺼지기 때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미국 바이오제약회사 제론은 텔로머레이스 효소 억제제인 ‘이메텔스타트(Imetelstat)’로 지난 5월부터 골수이형성증후군(MDS)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3상을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메텔스타트는 이미 FDA로부터 골수이형성증후군 치료제로서의 희귀의약품 지정을 받았고, 7월에는 유럽의약품청(EMA)으로부터도 긍정적 의견을 받았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바이오 스타트업 진메디신이 현재 고형암 치료용 GM101(임상 1상 완료), 췌장암 치료용 GM102(임상 1상 준비 중), 전이성 폐암 및 간암 치료용 GM103(임상 1상 준비 중) 등 항암 아데노바이러스 신약 후보물질을 개발하고 임상시험을 진행 중이다. 이들의 임상시험이 모두 성공해 암을 퇴치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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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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