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잔칫상’ 받으려면 연구자 흔드는 풍토 바꿔야[광화문에서/김재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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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영 산업1부 차장
김재영 산업1부 차장
만년 하위 팀 야구팬들이 ‘가을잔치’ 포스트시즌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럴까. 매년 가을 노벨상 발표를 지켜보는 기분이 딱 그렇다. ‘남의 잔치’다. 올해는 좀 달랐다. 노벨상 수상이 유력한 우수 연구자를 선정, 발표하는 학술정보분석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가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를 화학상 후보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화학상은 유전자를 마음대로 잘라내고 교정할 수 있는 3세대 유전자 가위를 개발한 2명의 여성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연구 분야가 하필 유전자 가위여서 속이 좀 쓰렸다. 이 분야의 권위자로 수상자들과 특허 경쟁을 벌였던 김진수 IBS 유전체교정연구단 수석연구위원이 있기에 아쉬운 결과였다. 올해도 남의 잔치였으나 그래도 잔칫상의 말석에나마 앉아본 느낌이랄까.

과학계에선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과학 부문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그 시기를 앞당기려면, 수상하더라도 일회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연구자들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최근 몇 년간 과학계는 숱한 외풍에 시달렸다. 현 정부의 ‘과학계 적폐청산’ 작업이 대표적이다. 2018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국가연구비를 횡령하고 채용 과정에 부당하게 개입했다며 신성철 KAIST 총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과학계에선 ‘정치적 숙청’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올해 8월 무혐의 처분으로 일단락됐지만 과학계가 받은 상처는 컸다.

유전자 가위의 대가 김진수 수석연구위원도 재판을 받고 있다. 국가의 지원으로 연구 성과를 내고도 이를 특정 회사의 성과인 것처럼 꾸며 헐값에 넘겼다는 혐의다. 재판 중이어서 언급하기 조심스럽지만, 과학계에선 일부 절차상의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기술 탈취’라며 망신을 주는 건 지나치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국 기초과학 연구의 메카인 IBS도 지난해 강도 높은 감사를 받으며 홍역을 치렀다. 2012년 출범 당시 연구단별로 연간 100억 원 정도였던 연구비도 점차 줄어 이제 연 50억∼60억 원에 그친다. IBS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일본 이화학연구소를 모델로 만들었다. 탁월한 연구에 대해 국가적으로 전폭 지원한다는 게 설립 목표였는데 어째 갈수록 용두사미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물론 과학계가 성역은 아니다. 잘못이 있으면 따끔하게 지적해야 한다. 과학자들 스스로도 연구 부정이나 도덕적 해이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감사나 감독, 연구비 지원을 무기 삼아 연구자들을 옥죄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과학계를 흔드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올해 노벨 화학상 발표날이었던 10월 8일 현 교수는 강의 시작 전 학생들에게 방탄소년단(BTS)의 노래 ‘낫 투데이(Not Today)’를 틀어줬다고 한다. ‘아직 멀었다’는 겸양보단 ‘오늘이 아니었을 뿐’이란 자신감으로 읽혔다. 마침 가사 내용도 딱 알맞다. “네 눈 속의 두려움 따위는 버려/널 가두는 유리천장 따윈 부숴/승리의 날까지/무릎 꿇지 마. 무너지지 마….” 잔칫상을 받고 싶다면 우수한 연구자들이 탁월한 연구에 정진할 환경을 만들고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김재영 산업1부 차장 redfoot@donga.com
#노벨상#잔칫상#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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