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벌이 새 항생제 시대 열까?

[금요 포커스] 부작용 없고 치료 효과 높은 벌독 변이체 발견

동양 최초의 침구학 문헌이라 할 수 있는 기원전 160년경의 ‘마왕퇴의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살아 있는 닭의 털을 뽑아 장대에 매달아 벌집 옆에 두어 벌들이 침으로 닭을 쏘아 죽게 한다. 그 후 닭의 살점을 발라내 말려 대추 기름에 재운 다음 헝겊에 싸서 사람의 발에 문질러주면 기가 왕성해진다.”

말벌 독에서 발견되는 독성 단백질을 이용해 강력한 항균 물질을 만들어낸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게티이미지뱅크

벌독의 치료 효과는 서양에서도 오래전부터 주목받았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바빌로니아 의서에는 벌독이 치료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역시 벌침을 신비한 약이라고 하며 벌침으로 질병을 치료한 기록을 남겼다.

벌독은 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독샘에서 분비하는 독액이지만, 강력한 항균 작용도 지니고 있다. 독성을 제거해 정제한 벌독은 화학물질이 전혀 없는 천연 항생제로서, 페니실린의 1000배나 되는 항균 효과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뉴질랜드와 영국, 미국 등의 양봉 선진국에서는 화장품, 연고, 안약 등에 벌독을 이용하고 있다.

새 항생제의 후보 물질, 마스토파란-L

그런데 최근 말벌 독에서 발견되는 독성 단백질을 이용해 새롭고 강력한 항균 물질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의과대학 연구진이 이용한 말벌은 바로 한국에 사는 땅벌이다.

땅벌은 말벌의 일종으로서 몸길이가 10~14㎜에 불과해 일반적인 말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연구진은 땅벌이 지닌 벌독의 핵심 성분인 마스토파란-L에 주목했다. 마스토파란은 말벌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펩타이드 독소다.

말벌에게 쏘였을 때 마스토파란-L을 함유한 독성분은 그 양이 그리 많지 않아 사람에게 위험하지 않지만, 독성 자체는 상당히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독은 적혈구를 파괴하며, 민감한 이들에게서는 아나필락시스라고 불리는 치명적인 증후군을 일으키기도 한다. 항원-항체 면역 반응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아나필락시스 쇼크가 일어나면 혈압이 떨어지고 호흡이 어려워지거나 아예 불가능해진다.

땅벌은 말벌의 일종으로서 몸길이가 10~14㎜에 불과해 일반적인 말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국립생물자원관

마스토파란-L은 항균 효과가 높아 새로운 항생제의 유력한 후보 물질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항균 성질을 높이는 방법이나 인간에게 안전하게 사용하는 방법 등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연구진은 이미 알려진 수백 개의 항균 펩타이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박테리아에 대해 강한 활동성을 보이는 ‘펜타펩타이드 모티브(pentapeptide motif)’로 불리는 작은 부위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이 모티브를 인간 세포에 대한 독성의 주요 원천으로 여겨지는 마스토파란-L의 한쪽 끝부분과 대체시켰다.

즉, 박테리아에는 강하지만 인간 세포에는 독성이 없는 펩타이드의 변이체를 만든 것이다. 연구진은 실험 쥐에게 치명적인 패혈증을 유발하는 균주에 감염시킨 후 몇 시간 뒤 그 변이체로 치료했다.

박테리아에 강하나 인간 세포엔 독성 없어

그 결과 이 펩타이드 변이체는 실험 쥐의 80%를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스토파란-L로 치료를 시도한 실험 쥐들의 경우 생존 가능성이 낮았으며, 고용량을 투입했을 때 심각한 독성 부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 변이체의 효력은 젠타마이신이나 이미페넘 등의 기존 항생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 변이체가 세포의 외막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박테리아를 죽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런 작용은 함께 투여되는 항생제가 세포에 침투하는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일부 박테리아 감염에서 심각한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해한 면역 과잉반응을 완화시키는 작용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발표됐다. 연구진은 수십 가지의 펩타이드 변이체를 만들었는데, 그중 몇 개는 인간 세포에 대한 독성은 없는 대신 항균 효능은 크게 강화됐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를 이끈 세자르 드라 푸엔테 박사는 “우리가 만든 것처럼 독에서 유래된 분자가 앞으로 새로운 항생제 시대를 여는 귀중한 자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변이체의 발견은 이처럼 항생제 내성 문제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많은 박테리아 종들이 기존 약물에 대한 내성을 발달시키고 있기 때문에 박테리아 감염에 대한 새로운 약물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에 의하면 매년 약 300만 명의 미국인들이 항생제에 내성이 있는 미생물에 감염되어 그중 3만 5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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