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켈의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1866)에 실린 도판. 저자는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해 사진을 조작했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적 증거가 사실은 조작된 것이라면? 1980~90년대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실리던 에른스트 헤켈의 ‘발생반복설’ 사진이 그런 예다. 우리는 이 사진(엄밀하게는 사진을 이용해 헤켈이 그렸다)을 통해 모든 생명이 발생 시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헤켈식의 진화론을 교육받았다. 1866년 헤켈의 〈생물체의 일반 형태론〉이라는 기념비적인 대작에 대해 학계는 “돛대에 진화라는 깃발을 달고 생물학의 바다를 항해하는 젊고 배짱 좋은 해적 하나가 아직도 창조론이라는 깃발을 단 배들을 남김없이 물고기 밥으로 삼으려 한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덕분에 이 책에 실렸던 사진은 1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 교과서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19세기 중반, 사진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꼽힌 것은 ‘과학 발전에 대한 기여’였다. 이때 벌써 현미경을 이용한 사진 촬영이 가능했고 헤켈은 다양한 척추동물의 배아 단계 사진을 수집했다. 그의 이론을 위해서는 배아 초기의 모든 동물의 모습이 비슷해야 했다. 그는 이를 위해 사진 속 배아의 꼬리뼈와 척추의 수를 조작하고 인간과 물고기 배아를 비슷할 때까지 수정했다.

하지만 이런 헤켈의 조작은 20세기에 들어와 아놀드 브라스나 빌헤름 룩스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 폭로된다. 헤켈은 동료 과학자들의 협조로 ‘나에 대한 비난은 진화론 자체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며 논쟁을 덮어버렸다. 과학에 의리가 개입하면서 벌어진 최악의 한 수였다.

헤켈의 조작을 계속 묻어둘 수는 없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대중에게 알린 사람들은 창조론을 신봉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헤켈의 사진 조작을 증거로 진화론은 잘못된 이론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결국 1998년 과학 학술지 〈사이언스〉는 헤켈의 사진들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는 논문을 게재한다. 그 덕분에 지금도 인터넷에서 창조론을 주장하는 음모이론가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소재가 바로 헤켈의 사진이다. 진화론을 증명하고자 했지만 결국 그것을 부정하도록 만든 증거가 ‘사진 조작’이었던 셈이다.

지구 평면설에서 팬데믹 음모론까지

하지만 헤켈이 잘못된 방향으로 증명하려 했던 생물발생의 법칙은 분자생물학과 유전학 덕분에 대부분은 맞는 이야기로 증명되었다. 생물들은 ‘혹스 유전자(Hox gene:척추동물의 발생 과정에서 몸의 형태를 만드는 데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전자)에 의해 배아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머리부터 꼬리까지 매우 비슷하게 나타난다.

사실 창조과학처럼 도저히 동의하지 못할 유사 과학이 요즘 들어 극성이다. 지구 평면설에 이어 5G 유해설이 창궐하더니 요즘은 코로나가 팬데믹(pandemic:세계적 유행)이 아니라 플랜데믹(plandemic:plan과 pandemic의 혼성어. 코로나19 팬데믹이 사실은 글로벌 거대 권력의 조작이라는 음모론)이라며, 미국과 유럽에서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극우 기독교계도 유사한 궤도를 밟고 있다. 이런 유사 과학이나 음모론에 대해 과학계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냉소적이고 소극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하지만 과학자들 역시 헤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어설픈 논증으로 세상을 현혹한 적은 없는지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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