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역사를 살펴보면 기초과학 연구와 응용, 상품화 기술 개발의 관계 및 발전 순서가 꼭 일방향적이지는 않았다. 즉 기초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기술과 제품이 개발된 경우도 있고, 역으로 기술이나 제품이 먼저 나오고 나서 관련 기초과학이 발전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20세기 초중반 이후 탁월한 장인적 기술자나 개인 발명가의 역할보다는 조직적인 연구개발이 체계화되면서, 오늘날에는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목적이 자연 현상을 파악하여 이해하려는 순수한 지적인 활동 차원인지, 아니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장래 산업적 활용 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학문의 목적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질문은 차치해두고 현실적 차원에서 살펴보자면, 일단 OECD 등의 국제기구나 정책 전문가들은 기초과학 연구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누기도 한다. 즉 사회경제적 효익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순수 기초’와 현재 또는 미래의 문제 해결에 기여할 지식 기반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 기초’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수 기초와 목적 기초의 개념 구분은 2000년대 초반 이후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에도 채택되어 오늘날까지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나라 또는 학자마다 명칭과 개념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유사하게 기초과학 연구를 둘로 구분하여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 기초 연구라고 해서 먼 미래까지도 경제적 효익이나 응용 가능성 등이 전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한 목적기초 연구라고 해서 반드시 향후의 문제 해결을 위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 각국이 장래의 활용 가능성도 불투명한 기초과학 연구에 거액을 투자하는 이유가, 과학자들의 지적 호기심 충족만을 위해서는 결코 아닐 것이다.
나일론 개발과 트랜지스터 발명의 예에서 극명히 드러나듯이, 기초연구는 성공할 경우 원천기술의 독점적 확보 등을 통하여 장기적으로는 응용기술이나 제품개발 연구보다 훨씬 큰 경제적 효용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즉 금융상품에 비유한다면 ‘고위험-고수익’ 상품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반드시 산업적 기술 또는 제품 개발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향후 군사적인 목적의 활용 가능성을 고려하여 국가에서 기초과학에 거액을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는 특히 ‘거대과학(Big Science)’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한 과거 냉전 시대 미국의 과학기술연구체제에서 잘 드러난 바 있다.
예를 들면 항성에 관한 천체물리학적 연구라면 산업적, 군사적 목적과는 무관한 순수 기초 차원의 연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이 연구의 결과조차도 수소폭탄의 제조에 응용된 바 있다.
이와 같이 기초과학의 폭넓으면서도 막강한 잠재력은 연구를 진행할 당시의 기준이나 잣대로는 도저히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즉 나일론이나 트랜지스터는 기초연구와 응용, 상품화가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졌다면, 이와는 달리 기초연구의 성과가 나온 지 상당히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기술적으로 응용된 경우도 많다.
전자기파의 존재를 맥스웰 방정식을 통하여 수식적으로 예언한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과 실험을 통하여 이를 입증한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는 당시만 해도 ‘순수 기초 연구’ 차원에서 연구를 했을 뿐, 전자기파가 통신 기술 등에 응용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의 무선전신 발명 이후 텔레비전, 휴대전화 등이 탄생한 오늘날 우리는 가히 전자기파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트랜지스터만큼이나 중요한 발명품이라 평가되는 레이저 역시 기반이 되는 기초연구와 기술, 제품 간의 간격이 무척 긴 경우이다.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개발된 레이저는 1917년에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에 의해 발표된 ‘유도방출에 의한 전자기파 발생’ 이론이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순수 물리학의 영역인 자신의 연구가 수십 년 후에 대단히 중요한 응용광학기술과 제품을 낳을 것이라고는 역사상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는 아인슈타인이라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상대적으로 취약하다고 여겨져 온 기초과학 연구와 진흥에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관심이 크게 높아지고 한다. 물론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투자하는 것도 좋겠지만, 기초과학 연구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이에 걸맞은 정교한 정책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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