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 필자가 근무하는 오스트리아 분자 생명공학 연구소(IMBA) 에서는 사흘간의 일정으로 1년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 ‘의회위원회 등의 휴회 기간’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Recess(리세스)’ 라는 이름의 행사로, 연구소 내 모든 실험실의 모든 구성원이 의무적으로 이 행사에 참여해야 한다. 덕분에 실험이 멈추고 휴식에 들어가니, 이런 면에서는 ‘휴회’라는 이름을 참 제대로 지은 듯하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 보면, 이 행사를 전후한 시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책임연구원들의 긴장감이 엿보이는 시기이다.

리세스의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여느 학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른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연구 내용을 발표하는 세미나가 꽉 차 있고, 학생들과 박사 후 연구원들의 포스터 발표도 있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연구와 상관없는 외부 인사를 한 분 모셔와 강연도 한다. 작년에는 에베레스트 단독 등반에 처음 성공했던 산악인이, 올해는 한 코미디언이 등장했다. 이후에는 저녁 식사와 파티가 이어지니, 연구 내용을 나누고 인맥을 쌓는 학회의 구색을 모두 갖췄다. 다만 업적에 상관없이 연구소 내 모든 책임연구원이 필수로 발표를 해야 하고 몇몇 박사 후 연구원, 박사 과정생들이 나머지 발표 시간을 채운다는 점이 일반 학회와 다른 점이다.

리세스는 사실 연구소 내 각 실험실과 연구소 전반의 연간 평가가 진행되는 행사이다. 연구소 구성원들 외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관련 분야 과학자들을 비롯해 정부 기관(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파견된 공무원, 연구소에 재정지원을 하는 모그룹의 관계자도 참여한다. 지난 1년 연구소의 운영과 각 연구실의 연구 성과를 평가하고 자문하기 위해서다. 이들은 세미나장 맨 앞줄에서 모든 발표를 경청하고 다른 자료들을 종합해 평가지를 작성하며, 마지막 날 토론을 통해 평가 내용을 정리한다. 정리된 보고서는 각 책임연구원에게 전달되고 책임연구원들은 이 내용에 따라 연구를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는 계기로 삼는다. 특히 리세스에서 받은 평가 결과에 따라 3년 차 주니어 책임연구원들(Junior PI; 책임연구원으로서 커리어를 갓 시작한 새내기 연구원들을 일컫는다)은 연구소와 계약 연장을 할 수 있을지, 아니면 애초 계약대로 5년 계약을 끝내고 2년 후 연구소를 떠나야 할지가 정해지니, 연간 평가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연구소 내 연간 평가 행사의 한 장면. 평가의 마지막 순서로 외부 강연자의 강연이 열린다. 평가는 엄정하지만 그 과정에 즐거움도 함께 한다.  /사진=IMBA/IMP 

학회같이 개방된 형식의 연간 평가는 여러 이점을 갖는다. 연구소 구성원들은 세미나를 들음으로써 다른 실험실의 연구와 진행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특히 포스터 세션에서는 연구자들 간에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고 그 안에서 공동연구의 토대가 마련되기도 한다. 또한, 리세스에서 이루어진 평가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중대한 결정들은 그 형식 덕에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게 되기 때문에 결정에 따른 잡음이 나오지 않는다.

연간 평가 제도는 사실 필자의 연구소에만 특별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 유수 연구소들은 모두 이러한 정기 평가 제도를 갖고 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연구소를 평가하기에 적합한 과학자문단(Science Advisory Board; SAB)을 두고 매년 혹은 2~3년에 한 번 과학자문단을 연구소로 초청해 책임연구원들과 구성원들의 발표를 진행한다. 필자의 연구소와 이웃한 세계적 수준의 식물 연구소 중 하나인 그레고리멘델 연구소(GMI)의 사례처럼, 과학자문단이 각 실험실 내 구성원들과 따로 만나 실험실 생활에 어려움은 없는지, 책임연구원이 그들을 공정하게 대하는지 등을 묻고 평가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러한 엄정한 평가가 연구소 차원에서 연구의 질과 수준을 관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가를 받는 연구자 입장에서도 장점이 있다. 공정한 평가는 연구소의 유연한 연구 환경을 만드는 바탕이 된다. 문제가 있다면 정기적인 평가를 통해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문에 평소에는 책임연구원들에게 많은 자유와 결정권이 주어질 수 있는 것. 예컨대, 책임연구원은 누구든 재량껏 고용할 수 있다. 자격만 검증이 된다면 가족을 고용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연구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그것을 꼭 과학기자재 회사에서 구매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시중에서 더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은 복잡한 서류 작업 없이 간단한 보고로 구매할 수 있다. 정기적인 평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연구 환경에서는 문제가 되고 엄청난 행정 작업을 필요로 했던 일들이 공정한 평가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는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소모적인 일에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이 같은 연구 환경에서 질 높은 연구 업적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정기적인 평가 시스템으로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을 만들고, 엄정한 평가마저 많은 이가 즐길 수 있는 장이 되는 모습, 한국에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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