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체 감염에 대한 면역 반응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말라리아 원충(plasmodium)은 까다롭고도 흥미로운 존재다.
다른 감염병은 한 번만 걸려도 평생 면역이 생기지만 말라리아는 그렇지 않다. 말라리아에 면역력을 가지려면 보균자로든 환자로든 수십 년간 계속해서 말라리아 감염에 노출돼야 한다.
그런데 말라리아 감염으로 생기는 강한 염증 신호(inflammatory signal)가 강력한 항체 형성을 유발한다는 동물 실험 결과가 나왔다.
이런 염증 신호는 인간의 말라리아 감염이나 만성 바이러스 감염, 자가면역 질환 등에서도 관찰된다. 따라서 이 발견은 C형 간염,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 루푸스병 등 난치성 감염 질환의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연구를 수행한 호주 멜버른 소재 ‘월터 & 엘리자 홀 의학 연구소’의 다이애나 한센 박사팀은 19일(현지시간) 관련 논문을 저널 ‘셀 리포츠(Cell Reports)’에 발표했다. 같은 날 이 연구소는 논문 개요를 온라인(www.eurekalert.org)에 공개했다.
한센 박사팀은 지난 10년간 말라리아 감염과 숙주의 면역 시스템 연구에 매진했다.
과거엔 말라리아 원충의 면역 회피 능력을, 말라리아 퇴치를 어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봤다. 그러나 한센 박사는 항체 형성 과정을 주목했다.
이 연구진은 2016년 염증 신호가 ‘도움 T세포(helper T cell)의 발달을 막는 염증 분자를 자극해, B세포가 항체 형성에 필요한 지시를 받지 못하게 한다는 요지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T세포의 일종인 도움 T세포는 사이토카인(신호물질로 쓰이는 당단백질)을 분비해 다른 면역세포의 기능 조절이나 억제를 돕는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염증 신호가 항체의 방어력을 크게 향상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염증 신호를 받은 B세포는, 정예 요원 트레이닝 캠프에서 ‘극기 훈련’을 받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프로 포식자(professional predators)’로 양성됐다.
면역체계가 말라리아 감염에 맞서 이렇게 강력한 항체를 생성한다는 게 밝혀진 건 처음이다.
연구팀은 또한 면역 시스템에 항체 형성 신호를 보내는 ‘분자 스위치(molecular switch)’와 여기에 작용하는 염증 신호도 발견했다.
하지만 자기 항원을 바탕으로 항체를 만드는 B세포는 파괴력이 엄청나 종종 자가면역 질환을 일으킨다고 한다.
한센 박사는 “염증 신호는 항체 반응의 규모를 제한하는 동시에 항체 반응의 질을 개선한다”라면서 “B세포는 정예 요원 같은 능력을 갖췄지만, 미래의 감염에 대해선 그 정도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만성 바이러스 감염과 자가면역 질환 환자에 새로운 치료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구 결과”라면서 “만성 감염 질환에 맞설 땐 분자 스위치를 올려 정예 B세포의 생성을 돕고, 루푸스 같은 자가면역 질환이 걱정될 땐 스위치를 내려 B세포 생성을 중단하는, 그런 백신이나 치료법을 개발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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