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에세이] 강석기의 과학에세이 241
대장균은 말 그대로 대장에 사는 박테리아임에도 왠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약수를 검사해 대장균 수치가 높으면 ‘음용불가’ 판정이 나는 등 음식물과 연관돼 경고로 작용하기 때문일까. 사실 이는 음식물이 배설물에 오염됐을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일 뿐이다.
물론 대장균 가운데는 O157처럼 치명적인 병원성을 지니는 균주도 있다. 반면 장내에 거주하는 대다수 균주는 특별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또는 그 영향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어떤 균주는 우리 몸에 유익한 작용을 하기도 한다. 즉 대장균과 인체와의 관계는 종(species)의 차원이 아니라 균주(strain)의 차원에서 논의돼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17년 독일의 의사 알프레드 니슬(Alfred Nissle)이 1차 세계대전 기간 한 병사의 분변에서 한 대장균 균주를 분리했다. 이 병사는 동료들이 배탈이 나 설사를 하는데도 혼자 멀쩡했다. ‘대장균 니슬 1917(이하 EcN)’로 명명된 이 대장균 균주는 이후 ‘뮤타플로(Mutaflor)’라는 상표명의 장질환 치료제로 쓰이고 있다. 장이 안 좋아 고생하던 아돌프 히틀러도 뮤타플로를 복용해 효과를 봤다고 한다.
EcN은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도 쓰이는데 특히 복통을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다. 지구촌 인구의 11%가 지니고 있다는 과민성대장증후군은 복통, 복부 팽만감, 설사, 변비 등 한마디로 장이 불편한 만성질환으로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뚜렷한 원인을 밝히기 어렵고 완치시키는 약도 없다. 다만 EcN 같은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가 증상을 줄여준다는 임상사례가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EcN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통을 완화하는지는 모르는 상태였다.
독소와 진통제 같이 만들어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11월 3일자에는 EcN가 만드는 C12AsnGABAOH라는 지질펩티드 분자가 진통제임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물론 다른 대장균 균주들은 이 분자를 만들지 못한다.
2000년 대 초 프랑스 툴루즈대 연구자들은 EcN의 게놈에 존재하는 ‘pks’라는 유전자군에 주목했다. 유전자군(genomic island)이란 특정한 물질을 만드는데 필요한 유전자들의 묶음이다. pks 유전자군은 B2형의 대장균에서만 발견된다. 대장균은 계통분류학에 따라 A형, B1형, B2형, D형으로 나뉜다. 즉 EcN은 pks의 유전자들을 이용해 이 균주에 고유한 물질들을 만들 것이고 이 가운데 진통효과가 있는 분자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놀랍게도 pks가 만드는 물질 콜리박틴(colibactin)은 DNA이중가닥을 자르는 유전자독소(genotoxin)인 것으로 밝혀졌다. 대장벽을 이루는 상피세포의 게놈이 콜리박틴으로 손상되면 세포교환주기(피부의 표피세포처럼 대장의 상피세포도 수명을 하다면 일정한 주기로 떨어져 나간다)가 느려진다. 따라서 대장균이 더 오래 장벽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자칫 장벽 안쪽의 세포가 장기적으로 노출될 경우 암세포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실제 대장암 환자의 경우 장내 미생물에서 콜리박틴을 만드는 대장균 NC101 균주(역시 B2형에 속한다)의 비율이 건강한 사람에 비해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EcN가 대장암을 일으킨다는 증거는 없지만 찜찜한 사실이다. 그런데 EcN에서 pks 유전자군을 이루는 유전자의 하나인 clbA를 고장 낼 경우 콜리바틴 뿐 아니라 프로바이오틱스 활성도 잃게 된다. 콜리바틴은 진통효과가 없으므로 EcN의 pks 유전자군은 복통을 완화하는 다른 물질도 만든다는 말이다.
툴루즈대의 연구자들은 이 물질의 실체를 찾기 위해 정상 EcN과 clbA가 고장난 EcN의 대사산물을 비교해 전자에는 있고 후자에는 없는 물질을 찾았다. 그 결과 몇 가지 분자를 찾았고 진통작용을 시험한 결과 C12AsnGABAOH라는 분자가 진통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흥미롭게도 이 분자에는 인체의 신경전달물질인 GABA(감마아미노뷰티르산)의 구조가 포함돼 있다. 즉 대장균 EcN이 만들어내는 C12AsnGABAOH가 인체에서 GABA 역할을 해 진통효과를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GABA는 억제성 신경전달물질로 장에서는 통증 신호를 차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편 GABA 자체는 세포막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나 GABA에 탄소 12개 짜리 지방산이 붙은 형태인 C12AsnGABAOH는 상피세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연구자들은 대장균 EcN이 만들어 분비한 C12AsnGABAOH가 상피세포층을 뚫고 들어와 신경세포의 GABA수용체에 달라붙어 과민반응으로 인한 통증신호를 차단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한편 EcNpks 유전자군에서 clbA나 clbN, clbB, clbC, clbP 등 다섯 가지 유전자 가운데 하나만 고장 내면 유전자독소인 콜리박틴을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조사 결과 clbC나 clbP를 고장 낸 EcN는 C12AsnGABAOH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 균주를 쓸 경우 콜리박틴 없이 진통제만 만들므로 대장암 걱정이 없다는 말이다. 다만 장내 부착력을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편 연구자들은 C12AsnGABAOH를 합성해 그 자체를 약물로 쓸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과도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대사회를 살면서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이번 연구가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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