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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연구원이라도 괜찮습니다] 딥프리저 _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실험실 장비관리
Bio통신원(세균맨)
미생물을 다루는 분이라면 대부분 초저온 냉동고인 딥프리저를 사용하시겠죠.
딥프리저 대신 액체질소를 사용하는 실험실도 본 적은 있습니다. 딥프리저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 이유라고 하면서 일시적으로 사용하시더군요. 액체질소가 딥프리저를 전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그런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실험실이라는 게 원칙이 중요하고, 어느 곳보다 정확해야 할 것 같은데, 가끔 로빈슨 크루소가 된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당장 필요한 것이 없을 때,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가는 역량이 키워지는 곳도 실험실이기는 합니다.
초저온냉동고 (Deep freezer)
[출처:By Ajay Kumar Chaurasiya - Own work [CC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산출물의 보고 딥프리저
딥프리저를 사용하시는 분들은 가끔 드라이아이스도 사용하시지 않나요?
굉장히 잘 만들어진 건물이라도 전기 점검이나 수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미생물 실험실에서는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해서 딥프리저에 보관된 균주를 보호하곤 합니다.
제가 대학원 생활을 하던 실험실은 꽤 오래된 건물 안에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여러 가지 기반 장치들이 열악해서 전기가 나갈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지가 뜨면 학생들은 드라이아이스를 주문해서 딥프리저 안에 채워 넣었습니다. 모든 인원의 연구 산출물이 담겨있는 곳이 딥프리저였으니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죠.
딥프리저의 안전 사수는 늘상 있는 일이라서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모두가 실험실을 장기간 비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2002 7월 경주에서 있었던 일
경주 학회에 왔다. 5일간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라는데 뉴스에도 나오는 걸 보니 굉장히 큰 학회인가 보다.
선배들이 포스터도 내고, 발표도 하는 등 한동안 학회 준비를 하느라 다들 분주했다. 석사 1년 차들은 특별히 할 것 없이 와서 보고 배우기만 하면 된단다. 사실 학회를 간다고 해서 좀 귀찮기도 했는데, 막상 짐을 싸들고 경주에 도착하고 보니 수학여행을 온 것처럼 즐거워졌다. 규모가 큰 국제 학회이고, 경주는 볼거리도 많으니 여행 삼아 다녀오자는 교수님의 배려로 4박 5일이나 묵어가게 되었다.
특히 선배 한 분이 경주 출신이라 맛집도 소개해 주고, 관광도 시켜주는 바람에 학회 참석이 더욱 여행스러워졌다.
경주가 이런 곳이었던가, 고등학교 때 돌아봤던 불국사랑 석굴암은 하나도 재미없었는데, 다시 와서 보니 꽤 매력 있는 동네다.
고즈넉한 경주 거리를 걸으며, 도시 중간에 불쑥불쑥 솟아있는 고분들이 주는 기이하고도 평화로운 모습에 모두 마음이 풀어져 있던 그때, 옆 실험실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갑자기 건물에 전기가 나간다는 통보였다.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이틀이나 일정이 남았던 차라 그대로 두었다가는 딥프리저의 균주들이 다 위험해질 상황이다. 두 개나 되는 대용량 딥프리저에 균주가 대부분 꽉 차 있기 때문에 일부는 아이스박스에 덜어놓고, 드라이아이스를 군데군데 테트리스 쌓듯이 쌓아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라 옆 실험실 학생들에게 부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 한 명이 올라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구세주와 같은 자가 등장했으니, 박사과정 선배가 일이 있어서 다음날 오전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고 그 선배에게 드라이아이스 배치를 부탁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이랬다.
“싫어.”
아, 참 밉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했다. 싫은 것을 즉시 싫다고 할 수 있는 저 위치와 냉철함이 말이다.
다 정리하고 옮겨 담고 하려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일이니, 귀찮고 실은 일은 분명했다.
그렇긴 해도 이런저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고 “싫어”라고 말하다니, 그 담백함에 어쩐지 미운 마음보다 부러운 마음이 더 컸다.
아무튼 ‘싫어’ 통보를 받고 난 석사 1,2년 차 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결국 희생정신이 그득한 아름다운 석사 2년 차 한 명이 다음날 새벽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에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던 그 학회는 ‘GIM 2002’였습니다. 그 큰 학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봤고, 경주 구경도 한참을 했지만, 그 여행이 제게 남긴 가장 큰 기억은 딥프리저였어요.
벌써 20년이 다 되어 지금은 그 낡은 건물은 폐쇄되고 실험실은 이전을 했지요.
(기억을 더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싫어’를 외친 박사과정 선배의 험담이 되어버렸네요. 사실 좋은 분이었습니다. 실험과 공부에 매진하시던 모범적인 선배님이셨어요. 진심입니다.)
건물의 전기공급 중단은 현재 제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도 가끔씩 발생합니다. 주로 주말에 진행되기 때문에 지금도 딥프리저에 넣을 드라이아이스를 급히 공수해서 채워 넣고 금요일에 퇴근하는 일도 간혹 있습니다.
회사 연구소에는 다양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합니다. 여러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있으니 각기 다른 실험실 생활을 했고요.
하지만 딥프리저 전원이 나갔을 때는 모두들 드라이아이스를 썼다고 합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인데 가끔 그런 부분에서 동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모두 다른 시기에 다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 그거! 하면서 똑같은 해결책을 내는 것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진달까요.
참 중요한 장비관리의 허와 실
제가 일하는 곳은 매년 심사를 받는 공인 기관입니다. 매년 심사를 받는 것은 기관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데 꼭 필요합니다. 우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심사받으면서 파악하고, 매일 점검과 관리를 반복하게 되니, 실험 품질에도 좋은 영향을 줍니다.
하지만 가끔 심사를 위한 심사가 될 때도 있습니다. 서류상 만족을 위해 정작 실무에서는 부적합한 조치가 취해지는 일도 많으니까요. 결국 실무자들이 장비와 실험의 원리를 파악하고, 고민할 때 심사관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며, 서로 도움이 되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2019년 어느 날 실험실 일지
매년 진행되는 공인시험기관 심사가 있었다. 심사관은 3일간 실험 환경, 장비, 실험 기록지, 관리 문서 등 실험실 유지관리 전반을 촘촘히 검토하고, 이 기관이 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인지 판단한다. 연중 가장 중요한 이벤트로 모두가 긴장 상태로 심사에 임한다.
이곳은 오랜 기간 운영되어온 기관이라서 크게 부적합한 사례는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매년 심사관들의 판단에 따라 크고 작은 시정해야 할 건들이 지적된다. 그중 미생물 실험실이 올해 지적받은 것은 딥프리저 관리에 대한 건이었다.
“초저온고 점검은 어떻게 합니까?”
“매년 교정을 받고 있고, 매일 온도를 확인하여 기록합니다.”
“온도 관리는 뭘 기준으로 하나요?”
“딥프리저에 표시되는 온도가 –70도씨를 유지하는지 여부를 확인합니다.”
“그럼, 딥프리저에 표시는 수치가 맞다는 것은 뭘로 판단합니까? 온도계를 달아야죠.”
“저희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온도계가 –70도씨를 커버하지 못해서요. 알아봐서 부착하겠습니다.”
다행히 경고 조치를 받지는 않았고, 추후에 온도계를 부착하라는 구두 경고로 마무리되었다.
심사를 마치고 즉시 실험기기 취급 업체를 수소문해봤더니 생각만큼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마이너스 70도씨를 커버하는 프로브를 장착한 온도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 온도를 표시해 주는 액정 디스플레이는 마이너스 70도씨를 버티지 못한다. 그러니 프로브는 딥프리저의 내부에 넣고, 액정 디스플레이는 밖으로 꺼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관하면 딥프리저 문이 완벽하게 닫히지 않는다. 방법은 매일 딥프리저 문을 열어놓고, 온도계로 온도를 체크하여 일지에 기록하는 것 밖에 없다.
무슨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도 아니고......
결국 불가능한 방법이다. 문을 열어놓고 온도를 재면 딥프리저의 관리 기준인 마이너스 70도씨를 만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온도계가 온도를 감지할 때까지 딥프리저 문을 열어놓고 온도를 재는 것은 보관 중인 균주에도 좋을 것이 없다.
서류상 만족을 위해서 실제 관리는 부적합하게 하는 격이 된다.
딥프리저 안에 넣고 보관할 만한 액정이 달린 제품만 사면 되는데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서 심사관에게 전화를 해봤더니 찾아보면 있을 거라는 무책임한 답만 돌아왔다.
우리는 상의 끝에 추가 온도계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매년 교정을 받고 있고, 교정받을 당시 딥프리저에 표기되는 마이너스 70도씨가 맞았다면 딥프리저 내의 센서도 교정을 받은 것과 동일하다고 판단했다. 따로 교정받은 온도계를 부착한다 해도 그 온도계도 연 1회 교정받기는 마찬가지이다.
딥프리저는 최대한 열지 않는 것이 좋은 관리 방법이니 지금 관리하는 식으로 관리하자는 답을 내렸다. 만약 이 문제로 나중에 또 경고를 받게 된다면 그때 경고를 주는 심사관에게 적합한 온도계 제품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기관 심사를 받다 보면 가장 강력한 방패를 가장 강력한 칼로 치면 어떻게 되냐는 옛날이야기처럼 상대방도 모르는 답을 내야 하는 궁지에 몰리는 듯한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수의 기관에 일반화가 가능한 규정을 적용하기 위한 것임을 알지만 규정을 위한 규정 때문에 실무의 효율이 떨어지고, 자원이 낭비되는 경험을 할 때면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가 없네요.
업계라고 하면 뭔가 거창한 비즈니스를 하는 집단인 것 같습니다.
사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실험실마다 존재하는 목적이 달라서 각자 전혀 다른 일들을 하는 것 같죠.
하지만 기회가 될 때,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사소한 실험 장비에 대한 얘기 해 나눠보세요. 척하면 척 알아들을 때 은근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재미를 느끼실 겁니다. 모두들 그들만의 크고 작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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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황량하고 지루한 곳 같지만 역동적인 매일이 담겨있는 곳이다. 모든 연구원들에게는 실험실에서의 추억이 있다. 즐거웠던 기억, 지긋지긋했던 기억, 성취감에 기뻤던 기억, 그리고 가장 많은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는 삽질의 기억. 그런 나와 내 주변의 얘기들을 나눠보려고 한다. 모두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니까, 과학도들도 잠시 바쁜 손을 놓고, 조금 감성적인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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