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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기성장 Self-Discovery Lab] 나는 오리보다 못한 카이스트 대학원생, 싱가포르 날다 (2부)
Bio통신원(닥터헬렌킴SG)
싱가포르에 오지 않았다면 배울 수 없었던 삶의 가치와 업무 경험들에 대하여…
<제1 장> 고통을 감내하며 성공으로 치달으려고 했던 ‘한국 슈퍼우먼 증후군’에 걸린 나
“언니는 정말 대단해요! 난 남편이 도와줘도 어려운데, 어떻게 애들 키우면서 공부하는지 난 정말 상상이 안 가요.”
“넌 정말 대단하다. 우리 며느리는 다르다.”
‘애도 혼자 키우고, 프로젝트 기획부터 실험도 거의 혼자 다했는데 이제 못할게 어딨어? 다 들어오라고 해’
그랬다. 나는 한국에서 밤에 술잔에 기대 한숨지을지라도 다음날이면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나 자신이 갈아지는지도 모르고 이 칭찬과 나와의 싸움에 지지 않으려는 오기로 경주마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오르기 두 주 전, 전속력으로 달리던 그 경주마가 나뒹굴어져 뼈가 부러지고 온몸이 흙과 자갈에 갈아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적어도 싱가포르 비행기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아니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내 온몸이 심해의 바다에 가라앉는 경험을 할 때까지…
<제2 장> 낯선 곳에서 기다리듯 나를 맞아준 익숙한 소리와 같은 아픔의 사람들
이민 가방 두 개와 두 아이를 안고 맞이한 싱가포르에서의 첫 아침은, 한 달 동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먼지와 남편이 바퀴벌레 약 세 통을 뿌리고 간 사투의 현장이었다.
나는 집 창고에서 오래된 카세트 라디오를 찾아서 채널을 돌렸다. 전기를 꼽고 채널을 돌리다가 손끝이 지릿할 정도로 낡아서 전 주인이 버려두고 간 라디오였다.
“ 굿모닝~ 아임 앤드루! Symphony FM~”
경쾌한 남자의 목소리와 이윽고 들리는 익숙한 클래식의 선율들…
나는 매일 아침 그의 목소리를 듣고, 집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집 가구를 옮기며 이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또한 나를 이곳에 마음 열도록 한 이웃들이 있었으니…
도착하고 처음 맞는 일요일 낮에 열어놓은 나무 대문으로 중년 아주머니가 얼굴을 쑥 내민다.
“헬로! 아 유 프롬 코리아? 아이 써우 유어 박스(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나, 대충 밖에 둔 이사짐 박스를 봤다고 알아들음)~”
“오~ 아 데이 유어 키즈? 헬로 베이비~”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직접 만들었다는 망고 푸딩과 색연필 한 세트를 주었다.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 복도에는 나의 큰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다섯 집이나 되었다. 비록 국적과 배경은 모두 달랐을 지언정 아이들 때문에 우리는 인사를 자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 한 가족은 우리 둘째보다 육 개월 빨랐을까, 태국 엄마와 싱가포리언 아빠를 가진 K였다.
K는 약했고, 말을 할 수 없었으나 그의 엄마는 언제나 그를 앉고 다니며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와 그녀는 우리 아이들이 가진 발달지연에 관한 공통점으로 인해서 서로가 서툰 영어에도 마음이 통하게 되었다.
“마음 강하게 먹어요. 내가 봤는데 따님한테 아주 운이 좋은 점이 있더라고.
울지 마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제3 장> 싱가포르 A*STAR, ETC 연구소에서 배운 것들: Multidisciplinary, Project Management and Industry collaboration
싱가포르에 도착하고 두 달 만에 나는 드디어 출근을 했다.
아이들은 당분간 서울에서 오신 시어머님이 봐주시기로 하셨고, 나는 마무리해야 할 두 번째 논문의 리비젼과 두 달간 미뤄진 출근에 목말라 있었다.
내가 근무했던 A*STAR의 ETC (Experimental Therapeutics Center, 현재 EDDC)는 저분자 항암제를 발굴하고 전임상까지 개발하는 싱가포르 국가 신약개발 연구센터이다.
연구원을 이끌던 수장은 Dr. Alex Matter로 다국적 제약회사 노바티스(Novartis)에서 ‘글리벡 (Gleevec)’이란 만성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다.
ETC의 그룹 리더들 또한 노바티스와 아스트라제네카 그리고 GSK와 같은 다국적 제약사 출신이었고, 100여 명 남짓한 구성원들의 국적은 스위스, 영국, 프랑스, 덴마크, 오스트리아, 그리고 싱가포르, 중국, 인도, 일본, 호주 등으로 다양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연구원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한국의 아카데믹한 환경에서 줄곧 Bio NMR 한 분야의 사람들과 공부에 익숙했던 나에게 신약 개발이라는 한 목표를 향해서 각자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는 Multidisciplinary 팀으로 이루어진 연구소 환경은 배움과 자극의 신세계였다.
총 아홉 팀이 매주 각 팀들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전체 랩 미팅을 통해서 공유했다.
(1) 의약화학 (Medicinal Chemistry) 팀: 신약 후보물질의 합성 및 lead optimization
(2) HTS (High- Throughput Screening) + IT 팀: 한 번에 몇 만개의 화합물 라이브러리를 테스트하고, IT 팀에서 데이터를 처리
(3) Biochemistry: 약물의 enzyme activity와 같은 in-vitro 실험을 담당 및 X-ray 구조분석
(4) High-End NMR 팀: 내가 속한 팀으로 주로 약물과 타깃 단백질의 interaction을 규명
(5) Cell-based Assay team: 다양한 암세포에서 약물의 효능을 평가
(6) Peptide drug team: 펩타이드 신약 합성
(7) Antibody Development 팀: 항체신약 개발
(8) Technology Development 팀: IVD 진단키트 개발팀으로 주로 SARS, 조류독감, Zika 등 국가 전염병 관련 키트 개발
(9) 전임상 (Preclinical) 팀: 리드 화합물의 안전성과 약효의 동물 테스트
(10) Mass Spectroscopy 팀
위에 언급한 팀 외에 ETC에서 신약후보 물질이 나오면 초기 임상 시험과 글로벌 제약사와의 라이센싱 딜을 담당하는 D3 연구소가 있어서, 나는 ETC에서 근무하는 동안 신약개발의 타깃 동정 연구부터 전임상을 거쳐 초기 임상이라는 전반적 과정을 착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ETC 생활을 통해서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마일스톤’과 같은 생경한 비즈니스 단어들을 처음 접했다.
주로 제약사와의 공동 프로젝트 미팅이 있을 때 우리 연구소의 사업개발 담당자인 (Business Development) Dr.L이 들어오고 그녀는 미팅 내내 자판을 두드리며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기록하고, 그룹 리더들은 마일스톤에 대한 언급을 했다.
2011년 하반기 우리 팀도 노바티스 열대 질병 연구소(NITD)와 뎅기열 신약을 개발하는 프로젝트 계약을 맺고 Industry 협업을 시작했다.
두 주마다 한 번씩 바이오 폴리스의 건물을 잇고 있는 다리를 건너서 인테리어가 멋진 노바티스 연구소를 방문했다.
프로젝트 미팅이 끝나고 나면 제약사의 그룹 리더는 그날 논의했던 내용과 follow-up 사항들을 Meeting Minutes라는 이메일로 미팅 참가자 모두에게 공유했다.
요즘 내가 국제 협업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하고 있는 업무 방식의 많은 부분을 그 때 배웠다.
우리 연구원의 연구성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더스트리 공동연구는 나를 매우 들뜨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박사과정 때 연구 프로젝트 창안에서 논문을 쓰는 것까지 전 과정을 심도 있게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 때로는 그리웠다.
나의 보스는 사람은 좋았지만, 막 그룹리더로 부임된 그는 포닥때의 열기가 남아서 인지 일의 효율을 더 따져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 랩 미팅 발표는 그가 담당했고, 논문 또한 대부분 그가 썼다. 나는 NMR 데이터 분석 후에 의례 만들게 되는 그림들을 준비하면, 다시 새 단백질 스펙트럼이 주어졌다.
우리 연구원에는 NMR 기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NMR 실험을 내 동료에게 맡기고 철저히 분업이 된 상태로 나는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제품 가격을 찍어 대는 계산원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대로 이곳을 나간다면 PI로서 프로젝트를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발표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것 외에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우리 연구원은 매년 사업성 평가를 받고 펀딩에 대한 압박이 심하였다.
다음 계약 연장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2012년 남편은 갑작스러운 계약 연장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 당시 남편은 NTU에서 세 대의 NMR을 관리하면서 실험 데이터를 얻고, 성질이 더러운 사이즈가 큰 바이러스 단백질을 구조를 푸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가 연구를 못해서가 아니라 국가 연구회에서 심의를 통해서 평가되는 연구 펀딩이 끊어지면 포스트 닥은 파리 목숨이고, 담당 교수님마저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 통보 또한 너무 갑작스러웠다.
다행히 학과 교수님들의 지원으로 가족들이 모인 지 일 년 반 만에 뿔뿔이 흩어지는 참사는 막았지만, 나는 한국의 연구원에서 부터 보아온 대학 및 연구기관에 근무하는 포스트 닭의 운명, 나와 가족의 행복을 타인으로 늘 좌지우지되는 삶의 방식이 퍽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나는 배 밑 바닥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고, 배의 마스터에 올라간 사람만 알고 있는 세상처럼.. 나는 세상을 알지 못한 채 노를 젓는 일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그리고 내 답답한 마음을 표현한 듯 내 책상 앞에 우물 밖을 빠져나오려는 개구리 사진 하나를 붙여 놓았다
그런 나에게 눈에 뜨인 것은 우리 연구소 BD 담당자인 Dr.L이 각 팀 리더들을 쫓아다니며 결과를 디스커션 하고, 때로는 전화기로 침을 튀겨가며 계약서 내용을 작성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녀는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바이오폴리스 광장에 나가면 아는 이들이 많아서 인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에게는 무척 생경한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연구원에서의 역할에 끌리고 도대체 대학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으로 PhD를 딴 그녀가 어떻게 현재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녀와 가끔 점심을 함께하며 고민도 살짝 나누었기에, 어느 날 퇴근길을 나를 붙잡고 그녀가 묻는다.
“헤이 Helen! 우 쥬 라이크 투 고 네트워킹 미팅 투모로우? 유 캔 파인드 썸 아덜 오퍼튜니티 쓰루 더 네트워킹 미팅!”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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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서 Bio NMR을 전공하고 싱가포르 A*STAR 신약개발 연구소에 취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온 세상이 장미빛. 뷰리풀~그러나 5년의 포스트 닭(Post-Doc) 기간 동안 나는 랩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울면서 맞이한 38살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랩을 떠나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국 임상회사의 지사를 이끌며 매일 아침 일하고 싶어서 눈뜨는 한국 K-Biotech을 위한 전략적 글로벌 헬스케어 사업개발이라는 직무를 찾았다. 곡기를 끊고 싶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맞춤옷 같은 나의 천직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리고 내게 맞는 인더스트리 직업을 어떻게 찾았을까? 혹시 당신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연재가 한줄기 빛을 제시할 것이다. 운영 중인 수상한 랩실, Self-Discovery Lab (https://blog.naver.com/ttkkii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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