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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토픽] 선택적 변시증(selective metamorphopsia): '글자'는 읽지만 '숫자'는 못 읽는 남자
의학약학 양병찬 (2020-07-30)

선택적 변시증

ⓒ SCHUBERT ET AL., PNAS, 117, 16055 (2020)


아래 사진에 등장한 남자는 웬 호러무비의 주인공 같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건 단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해요"라고 중얼거리니 말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큼직한 '8'이라는 숫자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게 '고리 모양의 과자'처럼 보인다. 숫자를 90도 회전시키니, 이번에는 '마스크'처럼 보인다. 당황한 그가 뒤집었다 세웠다를 반복할 때마다 피사체의 형태가 수시로 변한다. 그는 마침내 옆에 있던 과학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하소연한다. "제발 그만 하게 해 주세요."
 


(이미지를 누르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이야기의 주인공은 RFS라는 남자인데,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의 책에 나올 법한 사례연구의 대상자다. RFS는 단어와 글자를 아주 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이번 달 《미국학술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참고 1), 그는 숫자를 전혀—적어도 의식적으로—볼 수 없다. 그의 놀랍도록 특이한 결손(deficit)은 신경과학자들이 '뇌 안에서 의식적 인식(conscious awareness)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이번 연구의 의의는," 앨런 연구소에서 의식을 연구하는 크리스토프 코흐(신경과학)는 말했다. "인지(cognition)와 의식(consciousness)이 분리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RFS는 60대의 지질공학자로, 2010년 10월 두통, 기억상실, 떨림, 보행장애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허둥지둥하던 의사들은 처음에는 뇌졸중을 의심했다가, 나중에 피질기저핵증후군(corticobasal syndrome) 때문에 뇌세포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했다.

그 후 RFS의 눈에 숫자가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컨대 시계에 있는 '4'라는 숫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더니 궁극적으로 모든 숫자들이 뭉개져 알아볼 수 없는 '스파게티 뭉치'가 되어 버렸다. 직업상 계산을 늘 해야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재앙이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직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격표나 속도제한 표지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다 못한 그는 호텔방의 문틀에 매직펜으로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 뒀다.

그럼에도 그는 암산이나 그 밖의 수학연산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2부터 9까지의 숫자는 엉망진창이지만 0과 1은 제대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0과 1은 숫자보다 글자에 가깝기 때문에 RFS가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0과 1은 심오한 개념(예: 부재, 합일)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뇌가 처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숫자체계(숫자를 알파벳에 대응시킴)를 마스터한 후,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컴퓨터 화면에 새로운 숫자를 띄웠다.

2011년, RFS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JHU)의 신경과학자 트리오(마이클 맥클로스키, 그리고 그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테레사 슈버트, 데이비드 로슬린)에게 인계되었다. 세 사람이 수행한 테스트 중에는 '8'자 모양의 녹색 폼(green foam)을 이용한 시험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하버드 대학교에 재직 중인 슈버트에 따르면, 그들의 바람은 '형상화된 숫자를 만지면, RFS가 숫자를 보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거였지만 허사였다고 한다. "그는 숫자의 곡선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그 이미지가 남아 있지 않고 뒤죽박죽되는 것 같았다"고 슈버트는 말했다. 뇌는 다른 감각보다 시각을 우선적으로 처리한다. 그리고 '어떤 것은 만지고 어떤 것은 본다'는 것이 RFS를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자신의 사례가 과학지식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이해하고, 모든 시험을 견뎌낼 의향이 있다. 그러나 그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맥클로스키는 말했다.

 

선택적 변시증

ⓒ SCHUBERT ET AL., PNAS, 117, 16055 (2020)


또한 세 사람의 시험에서, RFS의 결손은 단순한 시각장애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그는 폼으로 만든 8의 형태를 특정한 방향에서 명확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결손은 해석(interpretation)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즉, 그의 무의식적인 뇌회로가 숫자를 입력하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는 것이었다. "그가 글자를 아직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은," 슈버트는 말한다. "'뇌가 숫자를 처리하도록 특화된 모듈(specialized module)을 보유하고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수치를 '숫자의 표상'으로 인식하고 조작할 수 있는데, 이는 고차원적인 수리능력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더욱 중요한 것은, RFS의 결손이 '의식적 인식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에 한줄기 빛을 비출지 모른다는 것이다. JHU의 과학자들이 수행한 다른 시험에서, RFS는 (아주 작은 얼굴 그림이 새겨져 있는) 커다란 숫자와 글자들을 들여다봤다. 먼저 얼굴 그림이 새겨진 글자의 경우, RFS는 글자와 얼굴이 모두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뇌파도(EEG)에서는 N170이라는 뇌파가 두드러졌는데, N170은 얼굴을 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얼굴 그림이 새겨진 숫자의 경우에는, 숫자의 효과가 얼굴의 효과를 약화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즉, RFS는 "숫자와 얼굴이 모두 안보이며, 온통 스파게티만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EEG에서는 N170의 특징적인 스파이크가 여전히 나타났다. 그렇다면 그의 뇌는, 의식적 마음이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여전히 처리·확인하고 있다—이것은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이다—는 이야기가 된다. "높은 수준의 인지처리(cognitive processing)와 의식(consciousness)은 별개다." 코흐는 말했다. "당신은 둘 중 하나만 보유하고 있을 수 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시각인식결손(visual awareness deficit)—이를테면 맹시(blindsight)—을 연구하는 사라 아지나(신경과학)는 단일사례를 갖고서 왈가왈부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나 그녀는 RFS의 사례연구를 높이 평가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한 '숫자 읽기 장애'를 넘어 그것이 안면인식과 다른 고차원적 능력에 미치는 영향까지 탐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나는 "JHU 팀이 숫자 속에 광범위한 자극을 내장했으면 좋을 뻔했다"며 아쉬워한다. 예컨대, RFS는 숫자 속의 '정지된 그림' 말고 '움직이는 그림'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가 시각에 치중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움직이는 그림은 '숫자의 스파게티'를 뚫고 의식적 인식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JHU 팀이 아지나의 질문에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RFS의 건강이 최근 악화되어, 말을 하거나 움직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결손과 의지는 지금껏 많은 시험을 통해 연구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줬다. "RFS는 우리에게 '인식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몸소 보여줬다"라고 슈버트는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재능(인식)이 얼마나 취약한지도 알게 해줬다."
 

※ 참고문헌
1. https://www.pnas.org/content/117/27/16055

※ 출처: Science https://www.sciencemag.org/news/2020/07/mysterious-case-man-who-can-read-letters-not-numbers-exposes-complex-ro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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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찬 (약사, 번역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은행, 증권사, 대기업 기획조정실 등에서 일하다가, 진로를 바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사면허를 취득한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현재 서울 구로구에서 거주하며 낮에는 약사로, 밤에는 전문 번역가와 과학 리포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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