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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4 “조작적 관점에서” (4) 조작주의와 생물종의 정의
오피니언 갑오징어 (2020-03-26)

일러두기

※ 네 번째 에세이는 브리지먼의 '조작주의'를 소개하고 관련된 주제에 대한 논평을 제시하는 부분으로, 분량이 길어 네 개로 나누어 업로드 될 예정이다. 이번 부분은 생물학의 기본 개념인 생물종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논란, 그리고 이 논란의 해법으로 조작주의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을 간략히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 다음 저술이 이 부분의 핵심 참고 문헌이다. Richard, A. Richards, The Species Problem: A Philosophical Analysi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개인적으로 미출간 번역본을 유지하고 있다. 
 

4.6 조작적 정의와 생물학: 생물종 문제


생물학의 사례로 논의를 옮겨본다. 여기서 논의할 사례는, 생물학의 기초 개념이지만 여전히 철학자들까지 참여하는 논란의 대상, ‘생물종(species)’이다. 생물종 없이 생명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수백, 수천만 년 단위의 진화나 지구적 규모의 분포는 물론, 인간의 스케일에서 관찰 가능한 여러 생명 현상, 그리고 세포 내부의 대사와 대사 과정을 지배하는 분자적 구조물의 현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범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예측에서 생물종 개념은 활용된다. 그러나 현재 이 개념에 대해 단일한 이해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편의상 아래 다섯 개 개념만을 간략하게 소개하지만, 여기서 더 세분화된 22개의 생물종 개념이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생물학적 종 개념. 어떤 개체군 P는, 상호 교배를 통해 증식 가능하며 다른 개체군 P와 생식적으로 격리되어 있을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생물종의 반열에 든다. 

유전적 종 개념. 어떤 개체군 P는, 구성 개체 사이의 유전적 거리가 일정 범위 내에 들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생물종의 반열에 든다. 

표형론적(phenetic) 종 개념. 어떤 개체군 P는, 여러 성질 사이의 유사성을 판별하기 위해 설계된 알고리즘을 활용했을 때 그 구성 개체들의 구성 성질이 일정 범위 내에 들어올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생물종의 반열에 든다. 

생태학적 종 개념. 어떤 개체군 P는, 다른 모든 개체군과 문턱값 이상으로 다른 적응적 구역을 점유하고 있을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생물종의 반열에 든다. 

분지론적 종(cladistic) 개념 또는 계통발생적(phylogenetic) 종 개념. 어떤 개체군 P는, 다른 개체군과 구별되는 진화적 계통수를 구성하고 있을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생물종의 반열에 든다. 

그림 1. 다양한 껍질 무늬를 가진 무당벌레의 모습. 다음 블로그에서 확보한 그림이다/
https://thenaturalhistorian.com/2011/08/27/17/


이들 다섯 개념은 서로 구별되는 생물학적 현상을 통해 개체군 P를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상호 교배 가능성, 또는 생식적 격리는 생물학 개론, 또는 교양서에서도 다뤄지는, 상식에 가까운 개념이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성이 없는 생물에게 적용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이다. 게다가 생식적 격리를 다른 종류의 격리와, 예를 들어 지리적 격리(그리고 현실의 생물학에서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겠지만, 시간적 격리)와 구분하는 데 충분한 기준인 것도 아니다. 유전자의 차이, 다른 여러 성질(가시적 규모의 표현형이든, 그보다 작은 규모의 형질이든)들 사이의 차이 역시 정도의 차이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어, 매우 유사한 개체군 사이에 생물학자들의 주관과 무관하지만 그 값이 명확한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만큼 정교한 개념이라고 하기는 어렵다.1 생태적 종 개념 역시 ‘문턱값’이 무엇이고 얼마인지 결정하는 데서 생물학자의 주관을 배제하기 어려워 보인다. 분지론적 종 개념은 시간대를 넓힐 경우, 그리고 조상-후손 사이의 혈족 관계가 명확한 개체군에 적용할 경우 개체군을 구별해 지시하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역시 종분화 사건이 발생하는 시점 전후의 개체군을 종으로 판정할 때는 생물학자들의 주관을 배제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생물종 개념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주제이므로, 이 연재는 이 주제만 다루는 에세이를 포함할 예정이다. 여기서 내가 주목할 사실은, 이들 여러 생물종 개념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개념을 압도하고 생물종을 해명하는 데 배타적으로 사용해야 할 만큼의 강점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지점이다. 생물학적 종 개념은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다른 네 가지 종 개념들은 생물학자들의 주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종 개념은 그것이 언제 참인지 밝힐 수 있는 객관적인 경험적 규준을 갖춘 듯 하지만 생명 현상 전반을 포괄하기에는 지나치게 국지적인 개념이고, 다른 네 가지 종 개념들은 비교적 포괄적인 듯하지만 그것을 실제 생물 개체군에게 적용할 때 활용할 경험적 규준의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다수의 생물종 개념 사이에서 우열을 가릴 방도는 없는 상태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생물종 개념의 증식 속에는, 브리지먼이 염두에 두었던 두 가지 상반된 힘이 모두 존재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생명 세계가 가진 극도로 높은 다양성은, 그것을 이루는 개체군을 서술할 수 있는 속성 역시 극도로 다양하게 만들어 냈다. 이들 다양성을 포괄할 수 있는 원심력, 또는 확장의 필요성이 생물종 개념의 증식 속에 반영되어 있다. 한편 이들 증식되어 가는 개념은, 지나치게 터무니없는 개념이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과거의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창조론, 즉 각 개체군의 모델이 되는 형상이 존재하며 이것이 개체들을 생물종으로 묶는 원리 또는 원인이라는 입장은 오늘의 생물학과 매우 거리가 먼데다, 문제의 형상을 경험적으로 확인할 방법도 없으므로 경험주의 자체와 부합하는 입장이 되기도 어렵다. 오늘의 생물학은, 그리고 그에 따라 생물종 개념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일정 범위 이내의 주장만을 포괄하는 구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생물종 개념 속에 있는 이들 두 방향의 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제언이 하나 제기된 바 있다. 리처드 메이든과 케빈 데퀴로스의 제언에 따르면, 생물종 개념 사이에는 “개념적 노동 분업(conceptual labor division)”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분업의 경계선은 일차적인 이론적 개념, 즉 생물종은 진화적 과정 속에서 구분될 수 있는 하나의 혈족이라는 개념과, 이차적인 조작적 개념, 즉 “생물종..을 어떻게 확인하고” 또한 이들이 어떻게 바로 그 자신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해”2 주는 개념 사이에 있다. 이차적인 조작적 개념의 사례들은 바로 앞서 확인한 다섯 가지의 생물종 개념이다. 이들 개념들은, 브리지먼이 길이에 대한 논의에서 강조했던 것과 유사하게, 생명 세계의 방대한 다양성 때문에 개체군들이 가지게 되는 다수의 성질로 확장되어 얼마든지 증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론적 개념, 즉 진화적 혈족의 개념은 역시 브리지먼이 강조했듯 이러한 증식이 지나치게 이질적인 범위로 번져나가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조작적 생물종 개념의 다양성을 묶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압도적인 수준의 다양성이 있는 생명 현상과 같은 영역에서, 조작주의가 강조한 원심력과 같은 힘이 유용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러한 원심력 없이, 매우 이질적인 여러 생명 현상 각각에 적용할 수 있는 조작적 개념을 개발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물론, 앞서 소개한 여러 생물종 개념은, ‘미터’와 같은 물리량을 측정하기 위한 조작적 개념과는, 그리고 이들 개념이 기반하는 여러 성질에 대한 측정과는 경험과 훨씬 멀리 떨어진 단계의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이들은, 앞선 논의에 따라 측정량에 기반하여 확인할 수 있는 생물학적 속성3에 기반한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의미에서 측정에 기반하는 이상 충분히 조작적 개념으로 볼 가치가 있어 보인다. 또한 이론적 층위에서 생물종 개념을 진화적 혈족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 즉 생물종 개념이 가진 구심력을 진화 이론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충분히 지지할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 역시, 조작적 관점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국제단위계가 기반해 있다고 진단했던 절충주의와 마찬가지다. 아마도 브리지먼이 살아 돌아와 철저한 조작적 관점만으로 생물종 개념을 설명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생물종 개념 사이의 구심력은 방금 소개한 개념적 노동 분업의 방법으로 확보되기보다는 여러 조작적 생물종 개념 사이의 비교동등성에 의해 확보되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확인한 비교동등성 확보 절차를 생물종 문제에 응용하자면, 서로 그 적용 영역이 겹치는 분류군(taxa)에 다양한 조작적 생물종 개념을 적용했을 때 거의 유사한 결과가 나올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문제의 개념들은 서로 비교동등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는 결과가 많은 분류군에서 확인되고 있다.4 그렇다면 '조작적 관점'에 서 있는 과학자는, 개념적 노동 분업이라는 제언을 조작적 관점에서 볼 때는 불충분한 것으로서 거부해야 한다고 볼 지 모른다.

여기서 개념적 노동 분업 제언에 대한 태도를 결정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생물종 개념은 국제단위계와는 상황이 다른 영역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과거의 국제단위계, 그리고 여기에 기반한 단위 체계는 이미 산업에서 활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정밀성을 가진 실용적인 비교동등성 표준을 확립한 상태였다5. 이런 상황에서 이론적 정의와 조작적 정의를 병용하는 절충적 접근을 채택하려면, 결국 조작주의의 경고를 넘어 물리학 이론이 제시하는 형이상학적 요소를, 즉 물리 상수가 기반하는 여러 메커니즘과 이론적 구성물들을 신뢰하는 방침을 택해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생물종 개념 사이에서 비교동등성 표준은 찾기 어려웠다. 이것은, 조작적 정의로만 이뤄진 생물종 개념들만으로는 개체군 사이의 거대한 다양성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아직 일관되고 통일성있는 해명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론적 정의와 조작적 정의를 병용하는 절충적 접근은, 이런 현실 속에서 생물종 개념에 대해 일관되고 통일성있는 해명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적 팽창주의6가 범람하고 있다는 브리지먼 식의 우려는, 생물종 개념과 같은 종류의 과학 개념 앞에서는 잠시 접어 두어도 무방해 보인다.

 

주석

1. 보편적 생물종 개념에 대한 선언이 담긴 문헌이 있는데, [James T. Staley, Transitioning Toward a Universal Species Concept for the Classification of all Organisms, in The Species Problem - Ongoing Issues, 2013.] 이에 대한 논의는 제1부 후미나 3부에서 기약한다.

2.   R., A. Richards, 2010: 5장 3절. 

3. 이에 대한 보강 논의를 이번 연재 후반에서 기약한다.

4. R., A. Richards, 2010: 1장 2-4절.

5.  그리고 실은, 온도의 경우 물의 삼중점 부근에서는 플랑크 상수의 불확도보다 물의 삼중점의 불확도가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6.  진화 이론 역시 개체군의 (또는 다른 진화 단위의) 형이상학에 대한,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이론적 구성물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형이상학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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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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