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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토픽] 범고래에서 “할머니가설”의 증거 발견, 비인간동물 중 처음
생명과학 양병찬 (2019-12-11)

할머니 범고래는 손주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 싱싱한 먹잇감은 보너스일 뿐.

범고래에서 “할머니가설”의 증거 발견, 비인간동물 중 처음

많은 '인간 할머니'들은 지나친 관심과 환대(歡待) 때문에 손주들의 버릇을 잘못 들이기 일쑤인데, 할머니들의 그런 행동에는 나름 근거가 있다. 연구에 따르면, 할머니가 살아있으면 손주의 생존 가능성이 증가한다니 말이다. 이제 새로운 연구에서, 범고래(killer whale)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발견되었다. 연구팀에 따르면, 범고래 할머니들은 새끼들에게 간혹 '갓 잡은 연어'—또는 덤으로 어디서 잡았는지에 대한 지식까지—를 건네줌으로써 손주의 생존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번 연구는, 비인간동물에서 최초로 발견된 "할머니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의 직접적 증거다. 할머니가설의 내용은, 일부 종(種)의 암컷들은 생식기능이 중단된 후에도 오랫동안 살면서, 손주들에게 양육 서비스를 추가로 제공한다는 것이다(참고 1).

"오래 사는 고래목(cetacean) 동물들에게 '생식후의 삶(postfertile life)'이라는 단계가 있다니, 매우 흥미롭다"라고 유타 대학교 솔트레이크 시티 캠퍼스의 크리스틴 호크스(인류학)는 논평했다. 호크스는 경력의 상당부분을 할머니효과(grandmother effect)를 연구하는 데 할애했지만, 이번 연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인간 할머니들은 80~90세까지—때로는 그 이상 오래—살지만, 45~55세에 폐경을 경험한다. 현대의 수렵채취공동체는 물론 핀란드와 캐나다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나이든 여성들은 손주(딸의 자녀)의 수뿐만 아니라 생존율이 증가하는 데 기여하는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영국 요크 대학교의 댄 프랭크스(컴퓨터과학, 생물학)는 할머니효과라는 게 다른 종(種)에서도 나타나는지 여부를 알고 싶었다.

일례로 범고래를 생각해 보자. 일각돌고래(narwhal)·흰고래(beluga)·들쇠고래(short-finned pilot whale)와 마찬가지로, 범고래는 암컷이 폐경 이후에도 생존하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다. 암컷 범고래는 30대 후반~40대 초반에 출산을 중단하지만, 100살이 넘을 때까지 살 수 있다. (수컷 범고래의 경우, 일반적으로 암컷보다 수명이 짧지만 죽는 날까지 생식능력을 보유한다.)

프랭크스가 이끄는 연구팀은 미국 워싱턴주와 캐나다 브리티시콜롬비아주의 연안에서 수십 년 동안 수집된 두 범고래 그룹의 생존율 데이터를 분석했다. 또한 그들은 수중카메라를 이용하여, 독특한 특징들을 근거로 개체들을 확인한 후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했다.

그 결과, 연구팀은 두 그룹에 속하는 700여 마리의 고래 중에서, 378마리의 '외할머니를 보유한 고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연구팀은 가용먹이의 공급량을 통제변인(control variable)으로 한 상태에서 그들의 생존율을 분석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죽은 후 2년 동안, 손주들의 사망 확률은 그룹 내 다른 고래들의 4.5배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이상의 연구결과를 정리하여 12월 10일자 《미국학술원회보(PNAS)》에 발표했다(참고 2).

"어려운 시절, 할머니들은 손주들에게 '특별 보너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라고 프랭크스는 말했다. 프랭크스가 말하는 '어려운 시절'에는 '(굶주린 범고래들이 가장 좋아하는) 왕연어(Chinook salmon)가 부족한 시절'이 포함된다. 그럴 때 할머니들이 수행하는 역할은, 잡은 연어를 손주들과 나눠먹거나, (작황이 나빴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연어가 많은 곳에 대한 정보를 공동체에 제공하거나, 또는 두 가지 모두다.

선행연구에서는, 폐경이후의 '엄마 범고래'에서 유사한 효과를 보고한 적이 있다(참고 3). 즉, 어머니를 곁에 둔 중년의 수컷 범고래들—과학자들은 그들을 '마마보이'라고 부른다—은 생존할 가능성이 유의하게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에서, 손자와 손녀는 할머니의 존재로 인해 똑같이 득을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뜻밖의 결과인데, 그 이유는 수컷 새끼 범고래는 암컷보다 연어 잡는 실력이 서툰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프랭크스에 따르면, 할머니효과에서 중요한 것은 '연어' 자체가 아니라 할머니의 '리더십'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지혜가 많으며, 연어 사냥에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어, 그런 고급정보를 손자와 손녀 모두에게 제공한다"고 그는 말했다.

"범고래의 경우, 할머니가 갖고 있는 노하우는 진짜로 중요하다"라고 캐나다 댈하우지 대학교의 할 화이트헤드(생물학)는 말했다. 그는 범고래의 사회구조를 연구하고 있지만, 이번 연구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주에게 제공하는 혜택'이 암컷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출산을 중단하고 유전자를 대물림할 기회를 포기하는 이유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프랭크스에 따르면, 다른 요인들도 작용할 수 있다. 예컨대 2017년 발표된 연구에서, 저자들은 "여러 세대에 속하는 암컷 범고래들이 동시에 새끼를 낳을 경우, '나이든 엄마'에게서 태어난 새끼는—자원을 둘러싼 엄마들 간의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젊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새끼보다 생존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했다(참고 4). 그러니, 나이든 엄마들은 새끼 낳기를 포기하고, 딸들의 새끼를 양육하는 데 전념할 수밖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 또한 할머니가설의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범고래에서 “할머니가설”의 증거 발견, 비인간동물 중 처음

Current Biology(참고 5)

"이번 연구는 '특별히 판타스틱한 데이터'에 기반했다"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했다. "연구팀은 범고래의 비밀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에서 폐경이 진화한 이유를 밝히는 데도 기여했다."

"인간의 경우, 폐경의 원인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지만, 타임머신이 없으니 과거로 돌아가 시시비비를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다른 종(種)에 관한 데이터가 축적되면, 좀 더 합리적인 추론이 가능해질 것이다"라고 호크스는 말했다.

※ 참고문헌
1. http://science.sciencemag.org/content/276/5312/535.3
2. http://www.pnas.org/cgi/doi/10.1073/pnas.1903844116
3. http://www.sciencemag.org/news/2012/09/adult-killer-whales-need-their-mamas
4. http://www.sciencemag.org/news/2017/01/study-suggests-surprising-reason-killer-whales-go-through-menopause
5. https://www.sciencedirect.com/science/article/pii/S0960982216314622

※ 출처: Science http://www.sciencemag.org/news/2019/12/granny-killer-whales-pass-along-wisdom-and-extra-fish-their-grand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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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찬 (약사, 번역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은행, 증권사, 대기업 기획조정실 등에서 일하다가, 진로를 바꿔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약사면허를 취득한 이색경력의 소유자다. 현재 서울 구로구에서 거주하며 낮에는 약사로, 밤에는 전문 번역가와 과학 리포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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