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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 우리만의 과학
Bio통신원(곽민준)
자연사박물과 © 위키백과
지난달, 영국 자연사박물관을 방문한 필자는 그 압도적인 규모에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자연사박물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크기와 놀라운 방문객 수, 상상도 못 했던 수준의 전시물의 양과 질, 거기다 연구와 전시에 이용되고 있는 총 8000만여 개의 표본들까지. 정말 놀랄 만한 요소가 한 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표본 중 많은 것들은 바로 찰스 다윈이 비글호 항해를 통해 직접 수집해 온 것들이었으며, 수많은 표본을 비롯한 다양한 연구 자료를 바탕으로 그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는 무려 3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필자는 원래 영국 자연사박물관을 3~4시간 정도 관람할 예정이었지만, 전시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거의 12시간을 둘러봐도 시간이 모자랐다. 야간 개장 시간까지 관람했는데도 결국은 2층의 일부 전시물을 보지 못하고 박물관을 나서야 했다. 그러나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박물관의 크기가 아니었다. 진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관람객의 수다. 개장 시간에는 박물관 밖에서부터 줄을 서서 입장해야 했으며, 사람이 많아 전시물을 보려면 천천히 기다려야 했다. 영국 통계 사이트에서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18년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방문객 수는 총 520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 숫자는 영국 관광지 중 네 번째로 많은 입장객 수며, 같은 연도의 우리나라 주요관광지점 입장객 통계와 비교하면 무려 경복궁, 롯데월드와 비슷한 수다.
관광객 수 못지않게 놀라웠던 점은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구의 규모였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는 직원의 수는 약 900여 명이고, 그중 3분의 1 정도는 연구하는 과학자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8000만여 개의 표본들을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이 엄청난 수의 표본 중에는 다윈이 비글호 항해 도중 직접 수집해 온 것들도 있으며, 그보다 더 오래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들도 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표본은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과학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연구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필자가 직접 만난 영국 자연사박물관 척추동물 분야 수석 큐레이터 리처드 사빈은 몇 년 전 학회에 갔다가 고래의 뼈 성분을 분석해 고래가 살았던 시기의 환경 변화를 유추해내는 연구와 관련된 발표를 들었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고래의 earplug 표본을 떠올렸고, 그 표본을 이용해 공동 연구를 진행하여 작년에 20세기 인류의 포경 활동에 대한 고래의 스트레스 수치 변화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예시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이 전시기관뿐만 아니라 연구기관으로서도 충분히 좋은 기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 중 과학자가 아닌 직원들마저도 자신의 분야에서 매우 전문성을 갖추고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흔히 과학자가 아니면서 과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는 이들을 통틀어 모두 ‘과학 커뮤니케이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영국 자연사박물관에는 과학을 알리는 일을 하는 이들의 역할이 조금 더 자세히 나뉘어 있다. 예를 들어 SNS, 인터넷 홈페이지, TV 방송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일을 하는 이들은 오로지 미디어를 통한 소통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전시공간 뒤에 보관된 더 많은 연구용 표본과 실제 과학자들의 연구현장을 보여주는 투어 등을 진행하는 이들은 과학 교육사(Science Educator)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오로지 투어 진행과 과학적 지식을 전달하는 일만을 전담으로 한다. 이 일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교육을 전공으로 공부한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Science Communicator)’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곳에서 하는 일은 ‘과학 통역사’에 가깝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에는 Nature Live Talk라는 대중 강연 행사가 매주 열리는데, 이 행사의 진행방식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강연과 조금 다르다. 방송 스튜디오와 유사한 강연장의 무대에는 한두 사람의 과학자, 그리고 또 한 명의 진행자가 앉아있다. 이 진행자가 바로 과학 통역사(Science Communicator)라 불리는 이들이다. 강연은 일방적인 한 사람의 발표가 아닌 무대 위 과학자와 과학 통역사 간의 대화로 진행된다. 마치 TV 토크쇼처럼 말이다. 과학 통역사(Science Communicator)들은 이처럼 과학자와 대중이 함께 만난 자리에서 그들 간의 소통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전담한다. 영어와 한국어만을 각각 할 줄 아는 사람들의 원활한 소통을 도와주는 통역사들과 비슷한 역할이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은 한 사람이 이런저런 다양한 활동들을 모두 하며,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일들까지도 맡아서 한다. 아직 문화로서의 과학이 자리 잡지 못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교해 영국 자연사박물관이 과학을 알리는 방식은 훨씬 전문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지금까지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좋은 점들을 소개한 것이 해외의 좋은 문화로서의 과학 사례와 비교해 우리나라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다양한 과학 문화 활동이 시작되고 있으며, 또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과학계와 사회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지금 당장 영국의 자연사박물관과 맞먹는 수준의 기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영국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공룡과 뛰놀며 자연과 생명에 대한 애정을 기르고 있을 것이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방해를 힘겹게 피하며 전시물 옆의 설명까지 하나하나 읽고 궁금한 사실을 배우고 있는 10대, 20대들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과학의 재미에 흠뻑 빠지게 될 듯하다. 그 옆에는 사자 표본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노부부가 있을 것이고, 또 그 옆에는 다윈센터 투어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오늘의 참가자들이 모여있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 후 자연사박물관 내 실제 과학자들의 연구공간을 신기하듯 둘러볼 것이며, 곧 한 장식장 내 표본들에 붙어있는 설명표에서 어디선가 들어 본 Galapagos, Beagle이라는 글자가 적힌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랄 것이다. 밤이 되면 그 위층 스튜디오의 문이 열리고 맥주 한 캔, 포도주 한 잔을 각각 손에 든 젊은 부부가 과학자와 직접 만나기 위해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곳에서 열리는 Nature Live Talk에 참여한 이들은 이미 과학을 취미 생활이자 문화 활동으로 즐기는 이들일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관람객들의 입장에 앞서 과학자들이 먼저 출근할 것이고, 표본을 꺼내 들고 어제 실패한 실험에 다시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무리의 초등학생들이 배낭을 메고 들어와 힌츠 홀의 거대한 고래 Hope를 만나며 영국 자연사박물관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영국 자연사박물관 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해서 좋은 모습만을 표현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과학 문화 공간,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없고, 당분간은 계속 없으리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영국 자연사박물관은 1880년대에 영국박물관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지금 박물관이 보관 중인 8000만여 표본들은 그 당시부터 오랫동안 하나둘씩 수집되어 모인 자연사박물관의 역사다. 찰스 다윈이 비글호 항해를 통해 수집해 온 표본과 동물의 뼈는 자연사박물관의 보물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역사와 보물이 없다. 예전 우리 한국의 과학이 얼마나 위대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우리에게는 남아있는 것이 없다. 우리의 과학은 그저 서양의 것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며, 우리만의 전통과 문화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우리는 영국의 자연사박물관 같은 공간을 만들 수 없다. 그런 곳에서 과학과 사회가 함께 만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몇몇 이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과학은 많은 성과를 내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커다란 자연사박물관 하나 없는 게 마치 큰 문제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필자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국의 자연사박물관은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다. 영국 과학의 역사이자 문화유산이다. 우리에게 영국 자연사박물관과 같은 기관을 만들 능력이 없다는 것은 곧 우리 과학에 그만큼의 역사와 문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과학은 단기적으로는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가게 되면 결국 오래된 역사와 탄탄한 기초를 다진 사회가 우리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밖에 없다.
우리 한국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난 발전을 이뤄왔다. 그리고 그 눈부신 경제, 정치의 진보를 이룩한 세대가 여전히 사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한때 매우 배고팠던 우리 사회는 다른 무엇보다 지금 당장 먹고살 수 있는 기술과 실력을 갖출 필요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탄탄한 기초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성과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단기간에 말도 안 되는 대단한 성과를 이룩하고 경제 발전을 이뤄냈으나, 이제는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게 된 지금, 그때 기초를 다지지 않았던 부작용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는 정경유착과 일부 정치인의 부패로 몇 년 전 아주 큰 혼란을 겪었으며, 경제는 지난 몇 년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다. 우리 국민의 의지와 노력으로 다른 사회는 절대 해낼 수 없을 기적과도 같은 엄청난 발전에 성공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기초공사가 전혀 안 된 티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과학을 받아들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에 진출한 엘리트 학자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과학은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 5위 규모의 R&D 투자를 받으며 많은 세계적인 연구들을 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탄탄한 기초작업 없이 그저 성과만을 보고 빠르게 달려왔기에 나타나게 된 결과이며, 이런 기초공사 없는 단기간의 성과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회 지도층은 과학의 작동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돈만 쏟아붓고 자신의 권력유지에 도움 되는 그럴싸한 성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게다가 실질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원생들은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애매한 대접을 받으며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힘든 시간을 버틴다. 심지어, 작년 가짜 학회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미 우리 학계에는 제대로 된 연구보다는 빠르게 성과를 내는 것에만 집착하는 문화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잘못된 문화는 기초 연구를 무너트리고 결국에는 우리 과학이 퇴보할 수밖에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우리나라 과학에는 영국 자연사박물관에 보관된 다윈의 표본과 같은 역사도 없고, 그런 표본을 이용해 자연을 연구하는 기초과학 문화도 없으며, 자연사박물관에 500만 명이나 찾아갈 정도의 대중 과학 문화도 없다. 물론 지금처럼 많은 돈과 노력을 투자하면 이런 문화와 역사 없이도 남들 하는 만큼은 따라갈 수 있다. 그러다가 한두 번쯤은 먼저 가는 이들을 추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전통과 기초가 없는 우리는 결국에는 자신만의 문화를 가진 다른 사회와 비교해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앞서가기 위해서는 없는 길도 만들어서 뛸 수 있어야 하지만, 따라가기에 바빴던 우리는 그런 능력을 전혀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의 기술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만의 과학이 필요하다.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를 벤치마킹해 기초과학연구소를 세우는 것도 좋고, 영국 자연사박물관과 유사한 형태의 과학문화기관을 짓는 것도 좋다. 그러나 지금은 남들이 간 길을 따라갈 때가 아니라,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야 할 때다. 우리만의 연구 시설, 우리만의 연구환경, 우리만의 연구 분야, 우리만의 독특한 실험실 분위기, 우리만 할 수 있는 과학 문화를 만들어 일등을 노려야 할 때다. 이제는 지금 당장 실용적인 연구를 하지 않는 것이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우리 사회의 형편이 나쁘지 않다.
기초가 부족한데도 지금까지 남들보다 훨씬 열심히 성실하게 달려온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그래도 먹고 살 만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기적이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해선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남들이 간 길을 따라온 것에 불과하다. 그 길이 끊긴다면 새로운 길을 만들 능력이 없는 우리는 다시 바닥에서 시작해 다른 이들의 뒤꽁무니나 쫓아야 한다. 찰스 다윈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역사적인 과학자가 외국에서 나오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것이며, 영국 자연사박물관처럼 우리나라보다 훨씬 체계적인 과학 문화 공간을 가진 다른 나라의 모습을 부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우리만의 과학 문화와 전통을 만들어나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는 않더라도 30년 뒤에는 매년 노벨상을 받는 과학 강국이 되어있을 수도 있으며, 영국 자연사박물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더라도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우리만의 새로운 공간이 여기저기에 생겨날 수도 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방이 아닌 창조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모든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것은 아니다. 남들의 뒤만 쫓는다고 우리가 그들을 앞서는 문화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다른 사회와 차별화되는 고유의 전통을 만들고 기초를 다져야 한다. 늦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과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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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통해 나의 지식과 생각을 표현하는 게 즐거운 평범한 생명과학도입니다. "일상 속 생명과학 이야기" 를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생물학적 물음에 대한 답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생활의 지혜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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