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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에게 보내는 철학 서신] (1)-1) 과학의 거울, 과학철학
오피니언 갑오징어 (2019-07-11 10:26)

과학의 힘, 과학의 가치 그리고 과학철학

모두가 과학을 주목한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과학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보든(박정희 이후 한국의 주류), 서방의 세계 지배를 가져온 힘의 원천으로 보든(많은 비 서구 지식인들), 인류의 자연 지배를 가져왔고 더욱 확장시킬 수 있는 힘의 근원으로 보든(베이컨 이래의 다수 철학자들), 계몽의 과업을 완성시켜 사회를 재조직할 핵심 원리로 생각했든(콩트 이후의 다수의 실증주의자들), 사회의 다른 분야에게 일종의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모형으로 보든(포퍼 이후의 일부 철학자들), 보수주의의 새로운 원천으로 보든(일부 포스트모던 저술가들과 20세기 후반 이후 일부 페미니스트들), 아니면 취향의 집합체와 같은 심미적 공동체로 보든(최근의 일부 과학자들), 기생해서 한 몫 챙길 무언가로 바라보든(이른바 ‘사이비 과학’), 이 모든 동상이몽은 그 초점에 과학을 담고 있다.

이들 이질적인 시각은, 그러나 하나의 공감대 위에 서 있다. 과학은 성공했으며, 그것도 인류의 다른 모든 분야를 압도할 만큼의 강력한 성공을 일구어 냈다는 공감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 능력이 미심쩍거나, 그 성취의 영향력에 대한 공감을 사지 못하거나, 과거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 나은 성과를 내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실패한 분야가 이처럼 주목받고,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며, 수백~수천만 명의 헌신을 받아내는 한편, 심지어는 사기꾼까지 모여들게 하는 장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의 현실적 힘에 대해서는 인류 차원의 공감대가 있다. 다만, 과학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시각이 병립하거나 충돌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병립, 또는 충돌에서, 과학에 대한 오늘의 철학적 질문은 싹튼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방금 제시한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논박하는 활동 역시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 관점에 앞서 해결되어야 하는 중요한 질문들이 있음을 부정하기도 또한 어렵다. 대체 과학이 일궈냈다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왜, 어떻게 그와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인간의 다종다양한 활동 가운데, 대체 무엇이 달라서 과학은 그토록 특별한 관심을, 심지어 정치적·도덕적 관점이나 심미적 관점에서도 받을 가치가 있는가? 

 

과학의 구조 속 철학적 단층

논의의 출발점은, 과학자들이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경험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바로 이 측면에서, 과학은 경험주의적 과업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가진 모든 과학 지식은 궁극적으로 경험에 기반한다. 하지만 경험은 언제나 변덕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과학은 특수한 종류의 경험을 활용한다. 과학은, 수많은 측정 장치,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개념과 이론 체계의 그물망 속에서 경험을 정리해 활용한다. 변덕스러운 경험에서 독립해 있는 어떤 기준 없이, 과학은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이들 장치와 이론 체계, 나아가 이들을 다루는 개별 과학자들의 숙련은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적 구조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과학은 개별 과학자들의 경험을 넘어서는 이론과 물리적 장치의 그물망, 그리고 사회적 제도 속에서 작동하며, 과학의 특별함은 이들 이론이나 장치, 제도에서도 찾아야 하는 것 같다. 

개별 과학자들의 실천 속에서는 하나의 단위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는 이들 요인들을 하나하나 분해해 지적하는 이유는, 이들 사이에는 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단절이 있다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기 때문이다. 먼저, 경험주의적 원칙과 이론의 활용 사이에 있는 긴장 관계가 있다. 과학이 사용하는 이론은, 때로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현실 세계에서 그 원리를 얻었다고 말하기 극히 곤란한 부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 과학이 경험적 정보를 다룬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이 경험적 정보를 종합하는 이론이 경험적 정보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견해가 갈린다. 과학 이론, 또는 철학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을 사용하자면 과학적 추론의 논리는 예외 없이 경험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은 한 쪽의 극단이다. 콰인은 이런 주장을 내세운 철학자의 대표격이다(주 1). 한편 칸트의 범주 이론(주 2)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으며 언어로 이뤄진 진술이라는 틀 속에 구속되어 있기는 하지만, 경험으로부터의 영향이 면제되어 있는 일정한 논리적 틀이 인류가 내리는 모든 과학적 판단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한 고전으로 꼽을 만하다. 

또 다른 단층은 20세기 후반, 쿤의 작업으로 인해 과학철학의 핵심 주제로 등장할 수 있었다. 이 단층선은, 라이헨바흐의 말을 빌리면 “정당화의 맥락(context of justification)”과 “발견의 맥락(context of discovery)” 사이에 있다.(주 3) 여기서 전자는 어떤 과학 지식을 믿을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논리적 맥락, 그리고 후자는 어떤 과학 지식이 형성되기까지의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맥락을 의미한다. 적어도 흄의 저술(주 4)까지는 거슬러 올라가는, 경험과 이론 사이의 단층에 대한 고민보다 훨씬 뒤 시점에야 이들 단층이 과학철학자들의 쟁점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결국 근대 철학 이후 20세기 초반까지의 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개별 인간, 즉 독립적인 행위자의 경험과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과 논리 구조에 대한 논의를 초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의 특별함을 그 논리적 구조 속에서 찾고자 했던 논리실증주의나 포퍼 역시, 과학철학의 과업은 ‘정당화의 맥락’을 정교하게 규명하는 데 있지 ‘발견의 맥락’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데 있지 않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주 5) 하지만 모든 과학자들이 알고 있듯, 과학은 혼자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은 길게는 수천 년(천문학)에 걸친 전통 위에 서 있으며, 이 전통은 특유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개별 과학자들의 탐구를 촉진해 왔다. 인류의 다른 활동과 과학의 차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완성된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 구조를 검토하는 것으로는 적어도 부족하다. 기실, 상당수의 철학자들은 과학적 지식이 믿을만한 경험적 원천을 가진 일상적인 경험적 지식(e.g 러시아워에는 길이 막힐 것이다, 철도는 늘 정체 없이 정시 운행을 할 것이다, ..등등)과 기껏해야 정도 차이를 가질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과학사의 맥락, 그리고 과학자 사회의 상호 작용 메커니즘이 과학에게 독특함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의 경우, 쿤 이래로 반대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전자, 즉 경험과 이론의 관계를 둘러싼 긴장은 여전히 수많은 철학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다. 후자, 즉 과학이 서 있는 심리적, 역사적, 사회적 맥락이 우리 세계에 대한 지식을 산출해 내는 과학의 특유한 힘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쿤 이후 과학철학의 중대한 쟁점으로 떠올랐고, 과학사회학이나 과학학의 발흥과 더불어 철학자들이 더 세밀하게 문제에 응전하면서 논의는 한층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쿤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이후의 상대주의적 경향이 과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일지라도, 쿤은 과학의 구조 속에 내재하지만 그 이전에는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단층선을 과학철학의 초점으로 등극시켰다는 점에서 과학철학, 나아가 과학에 대한 여러 연구 경향 전체에 있어 매우 중대한 기여를 했다. 

 

구 당산철교.
(그림 1) 옛 당산철교의 모습. 과학은 여러 부재를 조합하여 경험과 이론 사이의 간극을 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과학이라는 다리는 수백 년을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자체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십여 년 만에 철거되고 재건축된 사진 속의 옛 당산철교처럼 될지도 모른다. 출처: 서울특별시, 『서울의 다리』, (서울특별시: 1988), 1-2쪽. 

 

과학철학 삼분법

과학 속의 철학적 단층을 좀 더 세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철학의 전통 속에서 확립된 일종의 분과 사이의 경계선을 활용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주제에 대한 한 고전적인 저술(주 6)에 따라, 과학 철학을 다음 세 분야로 나누어 본다.

1.    과학의 인식론. 과학은 어떻게, 왜 세계에 대해 올바른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가? 즉, 과학의 결과를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원천은 무엇인가? 
2.    과학의 의미론. 과학은 언어, 수식, 도표, 각종 모델과 같이 다양한 종류의 표상 체계를 활용하여 전개되는 활동이다. 이들은 단순히 세계를 묘사하는 도구일 뿐인가, 아니면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 즉 실재와 일정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체계인가?
3.    과학의 형이상학. 과학이 탐구하는 대상은, 대체 어떤 종류의 존재들인가? 과학자들의 이론적 믿음에 의해 만들어지는 대상인가, 아니면 과학자 사회와 독립적인 실재인가?

 

세 번째 분야, 즉 과학의 형이상학은, 많은 과학철학자들이나 일부 과학자들은 일종의 도구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주제다. 즉, 과학이 활용하는 이론과 개념들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 배후의 실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았던 주제다. 하지만 이런 입장은 다수 과학자들의 직관과는 거리가 있다. 과학이 실재를 밝혀내기 위해 수행되며, 몇몇 분야는 바로 그 실재에 거의 도달했다는 믿음 없이 과학은 지금과 같은 열광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근 이 직관은 많은 철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자연종(natural kinds)’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런 주목의 수단이다. 이 말의 기본적 의미는 실재의 단위·유형이지만, 그 주변에는 해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대체 어떤 단위·유형에게 자연종이라는 자격을 부여할 수 있는가? 과학의 또 다른 근본 직관인 경험주의, 즉 과학적 진술은 근본적으로 모두 경험에 기반해야 한다는 주장과 자연종이라는 실재의 단위가 있다는 입장 사이에는 중요한 모순이 있지 않은가? 자연종이라는 개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러 개별 과학의 종 사이에는 그 성격에 따라 수많은 차이가 있을 것인데, 이들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모두 한 가지 자격 개념을 적용할 수 있기는 한 것인가? 이들 질문은 제3부에서 집중해서 다룬다.

첫 번째 주제는, 바로 앞 절에서 살펴본 두 단층과 관련된 내용이다. 따라서 ‘과학의 인식론’은 제1부에서 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한편 두 번째 주제는 그 자체로 매우 흥미로운 분야지만, 논의의 복잡성에 비해 저자의 연구가 부족해 약간의 고전적인 논의만을 검토할 수 있을 것 같다. 

의미론과 형이상학 부분에서 던진 질문들로 잠시 돌아가 보자. 여기서, 과학의 표상(서술, 또는 도표 등등)을 단순히 도구라고 간주한다거나, 과학자들의 믿음에 의해 과학자들의 탐구 대상이 만들어진다는 선택지를 많은 과학자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반응에 대해, 적지 않은 철학자들은 과학자들의 의문에 대해 (오만하게도) 철학적 반성 없는 일종의 순진한 직관의 결과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철학과 과학 사이의 골을 더 깊게 파헤치는 방침처럼 보인다.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들 질문을 정당화하고 싶다. 이들 두 질문은, 과학자들의 상식이 정말로 단단한지 점검해 보기 위해 던지는 지적 도전이다. 또는, 과학자들이 과학 활동을 통해 활용하는 전략과 추구하는 이상을 좀 더 명시적으로 만들고,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한 대조의 출발점이다. 과학철학과 과학 사이에서도 의미 있는 분업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메커니즘을 구동시키고자 한다면, 아마도 이처럼 과학자들의 머릿속에 있으나 쉽사리 명시화하기는 어려운 내용들을 거울처럼 비춰 줄 수 있는 위치에 과학철학 특유의 질문들을 설치하는 작업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거울
(그림 2) 거울. 이 연재가 과학에 대한 철학의 관계,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모형은 바로 이 거울이다. 마치 거울처럼, 철학 역시 그 자체만으로는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 과학을 이 거울에 비추어 반성하고자 하는 작업이 과학 철학이라는 것이 이 연재 전체가 염두에 둔 과학철학관(觀)이다.  출처: https://pixabay.com/ko/illustrations/%EB%AF%B8%EB%9F%AC-%EB%B0%98%EC%82%AC-%EA%B1%B0%EC%9A%B8-%EB%B0%98%EC%82%AC-983427/

“자연주의”
방금 내놓은 지적은 이 연재가 서 있는 한 가지 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 정신의 이름은 ‘자연주의(naturalism)’다. 상식에 비추어, 이 이름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유기농 제품에 달린 꼬리표에 적혀 있으며, ‘인공물’과 ‘자연물’ 사이의 미심쩍은 구별에 의존해 사람들의 소비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하려는 의도를 담고 널리 쓰이고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중요한 거울로 작동하는 과학 철학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기획이 자신이 따르는 정신을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무언가 오해를 불러오는 방침 같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이름들은 더욱 매력이 없다. 예를 들어 ‘물리주의(physicalism)(주 7)’라는 이름은, 그 내용과 무관하게 과학 내부의 다양성을 무시해 버리는 입장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또한 ‘과학주의(Scientism)’(주 8)라는 이름을 택한다면, 이 말에 비난의 의미를 담아 사용했던 많은 철학자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이기 좋다. 철학적 작업이나 여러 다른 지적 작업들이 가진 고유의 가치를 인정하는 입장임을 표시하면서, 동시에 과학 내부의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는 용어로서, ‘자연주의’는 대체하기 어려운 용어다.

용어법은 이 정도로 줄이자. 그렇다면 무엇이 자연주의인가? 핵심은, 철학이 과학의 논리적 토대를 제공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오히려 오늘날 최선의 과학이 제공하는 세계상이 철학의 출발점임을 인정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인간과 동물의 마음이 가진 특징들은 그 진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은 진화 이론과 고인류의 역사라는 배경 하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과학철학 역시 앞서 확인했던 세 영역 모두에 걸쳐, 오늘의 과학이 서 있는 위치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믿을만한 이유에 대해 과학자들이 가진 입장, 과학의 표상 체계 활용 방식,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실재의 구조가 오늘의 과학철학이 서 있어야 할 출발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 연재에서 계속 사용하고자 할 태도인 ‘자연주의’의 핵심이다.

이런 주장이 가진 무게는 17세기 이후 20세기 초반까지의 서양 철학사에 대한 지식을 배경에 가지고 있을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철학사는, 경험적 지식 외부에, 또한 과학 지식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하며 이들을 지도하는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철학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철학자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실험과 데이터 수집에 바쁜 과학자들에게 철학사를 검토하는 것은 사치일 것이다. 이 연재의 목적을 감안하면, 철학사, 그리고 여전히 상당수의 철학자들이 방금 제안한 자연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고 넘어가면 충분할 것이다.

물론 자연주의에 반대하는 철학자들은 자연주의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단골로 던지고는 한다. 철학은 늘 세계에 대한 서술을 활용해 왔고, 또 그것을 평가하려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무언가에 대한 평가는 그것을 서술하는 것과는 다르다. 서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활동이라면, 평가는 대상과는 별도로 있는 독립적인 기준을 대상에게 적용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과학 철학은 개별 과학들로 환원되지 않는 질문을 다룬다는 것이 자연주의의 입장이라면, 그것은 곧 과학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어떤 평가적 틀거리를 인정하는 입장인 것이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변은 무엇인가? 한 가지 입장은, 적어도 인식론은 과학, 예를 들어 심리학으로 환원될 것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다(주 9). 그렇지만 나는 좀 더 온건한 답을 선호한다. 설사 구체적인 과학적 작업에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어떤 평가 기준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과학자들이 활용하고 있는 것들로 보인다. 예를 들어, 이론의 단순성과 같은 심미적 가치는 분명 경험과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특히 수리적 요소가 많은 과학 분과에서는 흔하게 활용되어 온 평가 기준이었다. 나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작업이 서 있는 기반을, 그리고 연구 과정에서 마주치는 판단의 순간에 자신이 따르게 되는 원리를 성찰할 때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는 일종의 철학적 질문을 좀 더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이들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이라는 입장을 자연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들 질문은 과학 활동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철학의 전통적인 질문과 연결되어 있다. 왜 내 논문이 주장하는 지식은 믿을만한가, 왜 내 논문의 표현은 (근사적으로) 참인가, 내 논문은 다루고자 했던 실재를 반영하고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발전 속에서 철학은 전혀 사라지지 않으며, 오히려 편재해 있다거나, 만연하게 된다고 말할 만하다. 다만, 과학을 수행하는 여러 중요한 국면에서, 일종의 집중을 위해 철학적 질문들을 검토하는 것을 보류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도 또 다시 쿤이 등장한다. 그의 중요한 기여는, 철학적 질문을 보류하는 단계(정상과학)가 과학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제안했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보류는 영구하게 이어져서는 곤란하다는 것 또한 쿤의 지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주 10) 

결국,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과학철학은 과학의 논리적, 현실적 진행 과정 속에서 어딘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에 광범위하게 주목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두 ‘단층’을 철학적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과학철학자들은, 이들 단층에 대해,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결정적인 비법을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은 이 단층을 해명하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다량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과거의 데이터가 오늘에 대해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상당히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과학자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일을 손쉽게 끝낼 비법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수준의 약속일지 몰라도, 학문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학자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과학에게 과학철학은, 일종의 비법을 선사하는 마법사가 아니라, 고민을 차분히 들어주고 해결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려 하는 거울과 같은 친구다.
 

 

 

일러두기
※    이 연재는 3개 부로 이뤄질 예정이며, 이 글은 그 가운데 1부의 첫 글이다. 
※    크게 다음 세 교과서를 중요하게 참조했으나, 이들의 논의가 불충분하거나 동의할 수 없을 때는 원전을 우선시하여 논의에 활용했다. 처음 두 개는 글쓴이가 오래 전 교과서로서 읽었던 것이며, 마지막 책은 최근 인상깊게 읽은 교과서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권의 본래 출간 년도는 약 20년 터울을 두고 있다. 수년 뒤면, 지난 20년간의 발전을 반영하는 과학철학 교과서가 나오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 카를 C. 헴펠, 곽강제 옮김, 『자연과학철학』, 서광사, 2010. (영어판: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Prentice-Hall, 1966.)
● 앨런 F. 차머스, 신일철·신중섭 옮김, 『현대의 과학 철학』, 서광사, 1985. (영어판: What Is This Thing Called Science?, University of Queensland Press, 1982.)
● 피터 고프리스미스, 한상기 옮김, 『이론과 실재: 과학철학 입문』, 서광사, 2014. (영어판: Theory and Reality,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3.)

주석 

1) W. V. O. Quine, 1951, “Two Dogmas of Empiricism”, Philosophical Review, 60: 20–43; reprinted in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Harvard University Press, 1953, pp. 20–46. 최근 출간된 번역본은 김은정 등 옮김, 『있는 것에 대하여』, 전기가오리, 2019.
2) 『순수이성비판』의 초중반, ‘순수 지성’의 구조를 다루는 ‘초월적 논리학’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있다.
3) Reichenbach, Hans., "The Three Tasks of Epistemology", in Experience and Prediction(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38: reprinted 1970), pp. 3-16. 이 부분을 개인적으로 번역한 글을 유지하고 있다.
4) 번역본은 이준호 옮김, 『오성에 관하여』, 서광사, 1994.
5) 물론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적 작업을 다수 수행한 포퍼의 저술 속에 쿤 이후의 발전이 예비되어 있었다고 보는 시각 역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자세한 논의는 포퍼를 다룬 글에서 계속한다.
6) Psillos, Stathis, Scientific Realism. Routledge. 1999: p. 5.
7) 상세 논의는 다음 링크를 참조. https://plato.stanford.edu/entries/physicalism/
8)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에 표제어가 없긴 하지만, 검색을 해 보면 흥미로운 페이지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의 용례의 핵심에는, 과학에 대한 신뢰가 적절한 영역을 벗어난 지점에도 적용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9) Quine, W. V. O., "Epistemology Naturalized", in 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9: pp. 69~90. 
10) 상세한 논의는 쿤을 다룬 에세이에서 진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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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우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
과학철학을 공부했다. 철학이 오늘날의 정교한 지적 분업 체계 속에서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 이 연재는 바로 이 고민에 대한 응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다. 의학의 철학을 다룬 책 약간을 번역(공역)했고, 지금은 주로 교통과 철도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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