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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협주곡 2-42] 과학고와 의대 (2)
오피니언 한빈 (2019-05-13 09:45)

이전에 썼던 <과학고와 의대>은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에게 보내는 내용으로 예전부터 해왔던 주장들을 정리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당사자에게는 무슨 얘기를 해야할까 고민을 하다 이제야 글로 옮길 수 있을 것 같아 <과학협주곡> 지면을 빌어 글을 쓴다.

내가 의과대학 원서를 썼던 이유 중 5할은 성적 때문이었다. 공대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고 (지금은 복수 전공을 마친) 수학과는 면접 평가를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수학과나 물리학과는 올림피아드 출신들이 의대보다 본래 학과에 지원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내가 명함을 내밀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생명과학, 특히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생물학과를 가기에는 점수가 너무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디선가 수도권 의과대학들은 연구환경이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 의과대학 원서를 썼다.

그렇게 의과대학에 진학을 했고 첫 3년 동안 필수과목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수학과에서 수강했다. 수학과의 3년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경험이었는데 대학원 진학에 대한 생각을 같이 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확률론이나 그래프이론처럼 진화생물학에서 중요하게 쓰이는 기반 이론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의과대학 밖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진로에 관한 고민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 가장 중요한 경험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당연히 과학고를 졸업하고 공대나 자연대를 진학하면 누구나 연구자가 된다고 생각했지만 수학과를 다니면서 현실을 그렇지 않다는 걸 일찍 배웠다. 기초 학문이라서 더 그랬겠지만 자의보다 타의로 공부를 그만두는 사람이 더 많았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늘 듣던 '열심히 공부해서 과학자가 돼라'은 굉장히 기만적인 언어였던 셈이다. 그나마 서울대가 이 정도라면 다른 학교들은 상황이 더 열악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나 정도면 믿는 구석을 갖고 공부하는 것이니 환경이 썩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의대가서 무슨 연구를 하냐는 얘기를 들었는데 3년간 모든 방학을 연구실에서 보냈던 걸 생각하면서 이런 오해를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도 했다.

첫 번째, 의과대학 학생은 특혜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좋은 대우를 받는다. 학부 1학년 (예과 1학년) 때 연구실 문을 두드렸을 때 받아준 곳이 있었는데 다른 과의 모든 정규 프로그램들은 최소 2학년 1학기를 마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의대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여러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신다. 지금의 나도 실제 실력에 비해서 심하게 고평가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의 부풀려진 모습이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두 번째, 개인 공부를 할 시간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의학과 진입 이전에 바쁘다는 얘기를 듣고 많은 걱정을 했지만 막상 성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니 수학과에 다니던 시절보다 특별히 더 바쁘진 않았다.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이 강제되면서 전체적인 공부 시간은 더 늘었다.

세 번째, 학과 공부 자체가 연구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생물학적 배경이 충분치 못해서 발생했던 어려움이 학기가 지날수록 빠르게 줄어들었다. 특히 암기가 강조되는 의과대학의 특성상 많이 할 수밖에 없었던 단어 공부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 특정 조직, 장기 혹은 유전자 등이 뭔지 매번 찾아가면서 논문을 읽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타학과들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겠으나 앞서 말한 세 가지는 학부생이 연구에 참여할 때 누릴 수 있는 의대 고유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 가에 따라 다르게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이 너무 장황해질 것 같아 생략한 내용도 많지만 결국 실제 현실에 대한 얘기를 고등학생이나 학부 저학년에게 잘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시절에 들었던 내용의 상당수는 추측과 소문에 근거한 것들로 지금 와서 보면 모두 허무맹랑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도움이 됐던 건 나처럼 과고를 나와서 의대를 다녔던 선배들이 준 도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고에서 의대를 진학하는 현상에 대한 논의도 당위로만 이뤄진 감정싸움에서 현실을 바탕으로 한 실질적인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빈

 한빈 – 수학과 생물학에 관심이 많은 학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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