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논문관련 분야의 소개, 동향, 전망을 설명, 연구과정에서 생긴 에피소드제 논문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양적유전학(quantitative genetics) 기법을 적용하여 자연계에 존재하는 예쁜꼬마선충(
C. elegans)의 히치하이킹 능력 차이에 piRNA라는 small RNA가 관여함을 밝혀낸 연구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유전학은 표현형과 유전자형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행동유전학은 동물의 행동이라는 아주 복잡한 형질의 유전적 기반에 주목합니다. 고전적인 행동유전학은 관심 있는 행동을 연구하기 위해 방사선 등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그 행동(표현형)에 문제가 생긴 돌연변이를 만들고 문제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유전자형)를 발굴하는 방법론을 이용합니다. 반면 이번에 논문으로 발표된 제 연구는 인위적인 돌연변이가 아니라 야생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변이를 추적해 행동의 유전적 기반을 분석하는 접근법을 택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질적 수준의 표현형 차이를 넘어 양적 수준의 차이를 분석할 수 있는 양적유전학을 적용하였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행동-유전자의 관계를 들여다볼 뿐 아니라 '자연적 변이'를 탐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실제로 자연에서 행동 차이를 이끌어 내는 유전적 기작을 추적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박사과정 동안 연구한 행동은 예쁜꼬마선충의 닉테이션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행동입니다. 닉테이션 행동은 많은 선충들이 쥐며느리나 딱정벌레에 히치하이킹 하여 새로운 서식처로 이동하는 것을 촉진하는 일동의 ‘댄스'입니다. 특정 조건 아래에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꼬마선충들이 3차원 구조물 위에서 몸을 세워 웨이브를 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세계 각지에서 채집된 선충들은 이 댄스에 대한 열정에 큰 차이를 보입니다. 예를 들면 1시간 동안 영국에서 온 꼬마선충은 20분 넘게 이 춤을 추는 반면 하와이에서 온 꼬마선충은 10분 남짓 이 춤을 추는 것입니다. 저는 거의 100가지 꼬마선충 품종의 닉테이션을 행동을 측정했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닉테이션 행동의 광범위한 양적변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닉테이션 행동이라는 표현형의 변이는 확인했는데, 그 원인이 되는 유전적 변이를 알아낼 길이 막막했던 것입니다. 양적유전학을 적용해야 하는 문제였는데, 연구실에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연구라 필요한 실험 자원도 없을 뿐더러 조언을 구할 사람을 찾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았지만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특정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습니다. 연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저는 지도교수님께 부탁드려 당시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한 양적유전학 연구에서 가장 앞서나가던 Leonid Kruglyak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고, 의외로 자문을 넘어 공동연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공동연구 실무자로 현재 제 포닥 지도교수이신 Dr. Erik Andersen과 연결되면서 연구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개별 유전자 수준으로 행동 변이를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적용할 수 있게 되면서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습니다.
그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던 연구에는 예상치 못했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2014년 즈음, 저는 영국산 꼬마선충과 하와이산 꼬마선충의 닉테이션 행동 차이의 원인이 되는 후보 유전자를 네 개 정도로 추릴 수 있었습니다. 원인 유전자를 특정하고 그에 대한 기능 연구를 하는 것이 논문의 마무리 실험에 해당했는데, CRISPR 유전자 가위를 이용해 만든 돌연변이를 포함하여 다양한 돌연변이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들이 서로 상충되는 결과를 내놓으면서 약 2년 동안 원인 유전자를 특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통스럽게 실패를 인정하고 결론은 짓지 못한 채로 논문을 정리하기 시작할 무렵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동시에 진행한 실험에서 small RNA의 일종인 piRNA가 행동 차이를 조절하고 있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piRNA의 기능은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고, 더군다나 제가 아는 선에선 행동 조절에 관여한다는 결과는 전혀 보고된적이 없었기에 그전까지 후보 유전자에서 제외하고 있었습니다. CRISPR를 이용해 piRNA가 관여되어 있다는 보충 실험을 진행하여 리비전을 무사히 통과한 끝에 연구를 시작한지 7년 만에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에 양적 유전학을 이용한 행동 변이 연구의 패러다임은 1) 행동 차이를 보이는 야생 품종들을 찾고 2) 이들의 행동 차이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찾아 3) 유전자의 기능을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패러다임을 통해 주로 신경 관련 protein-coding gene들이 동정되었고 (ex) tyramine receptor, GABA receptor), 그것이 신경네트워크와 행동 차이를 어떻게 조절하는지를 보고하는 것이 표준이었습니다. 저도 연구를 시작할 때 제 연구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자연과 생명은 제 기대와 달랐고 저는 그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는데 7년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겨우 piRNA가 관여되어 있음을 밝혀냈을 뿐 이처럼 단백질이 아니라 RNA의 변이가 행동 차이를 이끌어내는 현상이 예외적인 것인지 널리 퍼져있는 것인지, small RNA의 차이가 어떤 기작을 통해 행동의 차이를 이끌어내는지 등 여전히 많은 질문들이 남아있습니다. 앞으로 행동유전학 분야에서 더 많은 연구결과들이 쌓이고 생명 현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확장된다면 제가 관찰한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되는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2. 연구를 진행했던 소속기관 또는 연구소에 대해 소개 부탁 드립니다.저는 서울대 유전공학연구소에 위치한 유전과 발생 연구실에서 이준호 교수님의 지도 아래 박사 과정 동안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저희 연구실은 예쁜꼬마선충을 모델로 발생, 노화, 신경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연구실의 가장 큰 장점은 연구실 내에서 top-down이 아니라 bottom-up 방식의 연구가 장려된다는 점입니다. 이준호 교수님은 지도교수님이나 사수가 시키는 실험이 아니라 본인이 관심이 있는 연구를 자유롭고 도전적으로 밀고나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십니다. 연구비가 넉넉치 않을 때에도 무리해서라도 학생들의 연구를 지원해주시고, 기존 주제들과 전혀 상관없는 뜬금없는 연구 시도에 대해서도 경청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지도교수님을 만난 것은 엄청난 행운이었습니다. 제 연구만 하더라도 저희 실험실에서 한번도 해본적 없는 양적 유전학을 적 용하는 연구였고, 처음 시작 단계에선 나이브하고 어설픈 연구였음에도 지도교수님께서 7년동안 묵묵히 지원하고 응원해주셨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저를 포함한 대학원생들은 단순히 지식과 실험 기법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 독립된 연구자로서 자신만의 과학을 만들어 나가는 고민을 쌓아나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한 연구실에서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좋은 논문들을 많이 발표했고, 많은 선배들께서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멋진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연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연구실 문화에 있어서도 국내 많은 연구실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권위주의적이고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지도교수, 선배, 동료, 후배 사이의 수평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민주적인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연구 주제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음에도 서로의 연구에 대해 진지하고 활발하게 토론할 뿐만 아니라 연구 외적으로도 대학원생들끼리 연구실 내에서 페메니즘 독서 모임을 갖고 여러 집회에도 함께 참여하기도 하는 특별한 실험실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4명의 다른 동료 대학원생들과 함께 대중들에게 최신 논문을 풀어 쓴 글을 엮어 단행본 <벌레의 마음>(바다출판사)을 올해 초 출판했는데, 아마 다른 연구실에서였다면 쉽지 않았을 시도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연구활동 하시면서 평소 느끼신 점 또는 자부심, 보람과학자로 산다는 것의 가장 짜릿한 점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 과학자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깨우쳐나간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특히 연구가 깊어지면서 그 공동체 속에서도 나만의 독보적인 연구영역을 만들어 나간다는 느낌이 들 때 큰 자부심이 드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제가 연구를 시작한 2010년만 하더라도 예쁜꼬마선충에 양적유전학을 적용해 행동을 개별 유전자 단위에서 연구하는 건 아주 소수만 할 수 있던 가장 'edge'에 있는 연구였는데, 거기에 도전하면서 이렇게 논문도 쓰고 또
창간 100주년 기념 연합 conference인 학회 특별 세션 등 에서 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특별한 경험들도 할 수 있었던 것이 뿌듯합니다. 사실 연구가 잘 안 풀릴 때는 과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조금 후회하기도 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려는 후배들을 만류하기도 하였지만, 과학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특별한 경험들을 하면서 지금은 자주 ‘과학하길 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현대 생물학의 최전선에서 재미있는 연구들을 진행해 나가고자 합니다.
4. 이 분야로 진학하려는 후배들 또는 유학준비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씀을 해 주신다면?
제가 박사과정을 밟은 2010년에서 2017년까지의 시기는 유전학 분야에서 정말 혁명적인 혁신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NGS의 도입과 비용 감소로 인해 whole genome sequencing, RNA-seq 등 엄청난 양의 유전적 빅데이터들이 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CRISPR가 도입되면서 genome-editing의 새로운 장이 열렸습니다. 제 논문들도 두 혁신 위에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혁신의 결과로서 유전학분야에서 빅데이터를 생성, 분석, 적용을 모두 한 실험실에서 진행하는 드라이 랩(drylab)과 웻 랩(wet lab)의 결합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전학에 관심이 있는 후배나 유학준비생들은 유전학에 대한 공부뿐만 아니라 빅데이터를 다룰수 있는 코딩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됩니다. R이나 Python처럼 바이오 빅데이터를 다루는 데 널리 쓰이는 언어들을 기회가 닿는 데로 습득해두길 추천합니다.
동시에 여기저기 빅데이터가 넘쳐나고 또 쉽게 생산해낼 수 있는 만큼 데이터의 늪에 빠지지 않고 연구의 방향성을 잡아줄 수 있는 ‘좋은 질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글이라는 정보의 바다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려면 정확한 키워드를 입력해야 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면 오히려 중구난방 식의 연구를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연구 결과의 깊이는 결국 그 연구가 시작된 질문의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처음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자신만의 질문을 만들어내고, 연구를 계속하면서 질문을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는 과정이 연구 활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5. 연구활동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는 지난 3월부터 이 논문의 공동 교신 저자인 Erik Andersen 교수의 지도하에 포닥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양적유전학이 적용된 부분을 거의 공동연구에 의존하다시피 해서 진행했는데, 독립적으로 양적유전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 위해 이곳을 선택하였습니다. 현재는 박사 과정때 집중했던 행동보다는 진화와 발생에 더 초점을 맞춘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학부 시절부터 제 관심 주제였던 ‘Evodevo’에 접근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에른스트 헤켈부터 이어져온 오래된 진화와 발생의 유비적 관계를 들여다 보는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6. 다른 하시고 싶은 이야기들....
과학은 사회적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혼자서라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연구를 수행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제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 늘 활발하게 토론해주시고 제 의견을 존중해주시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지도교수님, 이준호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교수님의 지도 아래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립 연구자에게 필요한 인간적 품성과 자질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 제 가까이에서 늘 도움을 주고 질문을 받아주었던 닉테이션 팀 선배 최명규, 이학선 박사님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논문의 저자로서 중요한 실험에 참여하였던 양희승, 김준 군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밖에도 제 연구에 대해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준 실험실의 모든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 연구에 핵심적인 재료를 제공해준 오동윤 군과 연세대 백융기 교수님 연구실의 김희경 박사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사실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거의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연구실 공동체 속에서 제가 하고 싶은 연구를 자유롭게 하고 좋은 동료들과의 따뜻한 교류 속에 박사과정을 보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 실험실 바깥의 많은 동료 대학원생들이 여러 부조리에 시달리면서 고통받고 때론 연구의 길을 접는 안타까운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가 많은 분야에서 오래된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데, 인권과 민주주의의 사각지대인 과학계에도 구조적인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브릭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심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제가 지금 즐기고 있는 ‘과학의 즐거움’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저도 기회가 있다면 제 작은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