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은 어떻게 과학을 움직이는가 폴라 스테판 지음 | 인윤희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04월 22일 출간
BRIC
(2019-05-21 10:25)
책을 읽는 동안 과학사회학자인 로버트 K 머튼이 떠올랐다. 약 70년 전 과학사회학에서는 머튼 등의 학자들이 과학자 사회의 작동 원리와 내부 보상 체계 등을 연구했다. 이 책과 비슷한 논의가 이루어졌던 셈이다. 그러다가 사회구성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는 과학사회학의 주류 주제가 ‘과학자 사회’보다는 ‘과학 지식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것인가’로 변화했고 21세기에 막 들어서던 순간까지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자 및 과학철학자들과 과학 지식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나는 과학사회학의 이러한 역사를 공부하고 나서 ‘과학자 사회’에 대한 연구가 계속 활발히 진행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로버트k머튼을 언급한 것은 머튼이 옳았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머튼이 다뤘던 주제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더 진행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다. 머튼이 틀렸다면 어디서 틀렸는지, 그리고 과학자 사회 및 과학자 사회 밖의 더 큰 사회는 서로 어떤 상호작용을 하며 움직이는지 이런 연구가 좀더 일찍 진행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대신 이 책을 통해 ‘과학자 사회’에 대한 연구가 다른 분야인 경제학에서도 일부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향후에도 이 주제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이 책의 주제를 놓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통계 작업을 진행하는 연구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통계는 이미 꽤 옛날이 되어버린 시점에 대한 연구 자료이기 때문이다. 정책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여기서 파생되는 여러 의문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되길 바란다.
이제 책의 내용을 놓고 몇가지 논의를 펴고자 한다.
첫째, 연구 결과의 우선권 등 학계의 중요한 요소들이 과학기술 분야에서만 중요한지 인문사회 등 다른 학문분야도 마찬가지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 로버트 K 머튼과 이 책의 저자 모두 학계의 중요한 요소들이 과학기술 분야에서만 중요한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책 내용에서 ‘과학자’를 빼고 ‘학자’ 또는 ‘인문학자’ 또는 ‘사회과학자’를 넣어도 상당 부분이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돈을 잘 버는 직업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그 직업을 위한 재능을 지닌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분류하는 것 같았다. ‘능력 있는 사람’과 ‘능력 없는 사람’. 하지만 능력이라는 것은 분야에 따라 다르다. 경영 컨설팅을 하는 능력과 과학연구를 하는 능력은 다른 능력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차이를 감안하지 않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서 돈을 더 잘 버는 직업을 갖고자 할 것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저자도 수수께끼 풀이의 즐거움 등 다른 요인을 언급하긴 했지만, 급여에 대해 비교할 때 단순한 접근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급여’라는 것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지급받아야 하는가’ 같은 근본적인 논의가 진행되어야 과학자들의 급여에 관한 논의도 충실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 논의는 한국의 이공계 기피 현상 담론과도 관련이 있다. 여전히 한국에서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연구계가 아닌 임상의사를 희망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의사에게 필요한 능력과 과학자에게 필요한 능력은 다르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이과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를 희망하는 것을 문제 삼을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최상위권 학생 중에서도 연구직을 희망해서 연구계로 진로를 계획하는 학생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최상위권이 아닌 연구계를 희망하는 상위권 학생들이라 해도, 그 학생들이 원하는대로 연구계에서 즐겁고 의미 있게 돈도 잘 벌면서 지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학생들이 향후 훌륭한 연구자로 성장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성 세대들이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대학 진학 시점의 성적 편차를 두고 그렇게까지 논쟁을 벌일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셋째, 한국 과학기술계에서 문제로 지적되는 여러 가지(행정에 시간 너무 많이 쓰는 것 등)가 미국에서도 똑같이 지적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한국과 미국의 과학기술 역량 차이를 만든 건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넷째, PBS(Project-Based System)인 과학 연구계에서 대학이나 공공기관 같은 ‘단체’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도 언급했듯 현재 한국과 미국의 과학자들(연구책임자 및 그 제자들)은 마치 백화점에 입점해있는 중간관리자 및 그 직원들과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백화점과 과학기술계는 다르다. 백화점은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여러 가지 상품을 모아놓음으로써 고객들이 편리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나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은 교육과 연구라는 다른 목적과 함께 학풍 등 각 단체별 내부문화를 지닌다. 정부의 개인연구자 단위 연구비 배분 시스템이 과연 ‘단체’의 목적 및 문화와 잘 융화되고 있는지 논의해야 한다. 사실 이런 생각은 메타적인 것이다. 애초에 존재하던 단체들에 개인 단위 연구비 지원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얹어지면서 생긴 기형이다. 이런 기형을 유지해도 괜찮은 것인지, 개선해야 한다면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
다섯째, 미국 대학 교수들이 연방정부의 연구자금을 받아오지 못하면 자신의 급여를 100%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보아 이들은 한국 대학 교수들보다는 오히려 한국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 연구자에 가깝다. 한국 대학 교수들도 정부의 연구자금을 받아오려고 애쓰지만, 그 이유는 자신의 급여를 다 채우지 못할까봐 그런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연구를 위한 자금이 필요해서이다. 한국 대학(과기원 제외)에서 급여와 연구를 위한 자금은 별개이다. 반면 한국 정부출연연구기관 소속 연구자는 수탁 사업이 없으면 급여를 다 채울 수 없다. 허구한 날 지적되는 PBS가 이것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미국도 그러니 한국 출연연 연구자들도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출연연 소속 연구자의 급여를 기관고유사업에서 100% 보장하고, 연구를 위한 자금을 플러스알파로 수탁사업에서 보충하는 방식으로 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즉, 이 이슈에 있어서는 미국도 기형적인 셈이다. 정확한 통계를 내가 내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이런데도 미국이 버티며 과학기술 최강국의 위치를 유지하는 것은 애초에 (GDP 대비 연구자금과는 별개로) 연방정부 연구자금의 규모가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물론 그만큼 연구자 Pool Size도 비교가 안 되겠지만).
여섯째, 도제식으로 운영되는 실험실은 필연적으로 피라미드 형태의 인력 구조를 보인다. 교수 1명에, 박사후연구원 몇 명, 대학원생은 그보다 조금 더 많은 수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과연 교수보다 수적으로 많은 대학원생들이 학위를 받고 스스로 자리를 잡아 연구를 할만한 일자리의 수가 충분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그냥 산술 계산만 해도 정부가 의도적으로 일자리를 늘리지 않는 한 불충분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안은 산업계에서 졸업한 인력을 흡수해주는 것인데, 그렇게 할지는 산업계 마음이고, 산업계도 분야에 따라서 졸업한 인력을 잘 받아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한국에 한정해서는 새로 태어나는 인구가 줄고 있고, 얼마 전 한참 이슈가 되었던 칼럼에서 언급한 대로 서울대 대학원도 미달인 상황이니 다른 논의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이를 감안하면, 이 책에서 미국용으로 제시된 대안이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졸업하는 대학원생 수가 차차 줄어들면서 수가 안정적으로 많아질 박사후연구원이 교수에게 의존해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어느 정도의 연구비를 들고 있음으로써 약간이나마 독립적인 연구자로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정규직/비정규직 시스템이 도제식 과학기술 연구계와 겹쳐서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지만 돌파구가 아예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본 서평은 페이스북에 한원석(트리마란 기업부설연구소)님이 올리신 글로 글 작성자의 허락을 받고 공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