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진화: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 리처드 프럼| 동아시아| 2019.4.17
Homo runners
(2019-04-15 07:02)
진화론에 관한 책은 많지만, 키플링이 말하는 '그저 그런 이야기들' 류類의 책이 범람하는 세태를 감안할 때 가려읽는 안목이 절실히 요망된다. 그와 관련하여, 역자는 과학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의 시각을 바로잡는 책을 두 권 번역하여 출간한 적이 있다. 하나는 케빈 랠런드의 『센스 앤 넌센스』이고, 다른 하나는 조너선 와이너의 『핀치의 부리』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도서출판 동아시아에서 나왔다.
『센스 앤 넌센스』는 모든 진화이론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진화론의 백과사전'이고, 『핀치의 부리』는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진화사례를 관찰하여 보고한 '진화의 현장보고서'다. 두 책이 발간된 후, 역자는 한국의 지성사에 점 두 개를 찍었다고 나름 자부해 왔지만, 켕기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선택selection에 관한 문제였다.
진화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한 적응적 진화adaptive evolution'라고 할 수 있다. '환경에 적합한 개체가 자연의 선택을 받아 대代를 잇는다'는 내용만큼 명쾌하고 설득력이 강한 스토리도 없다. 그러나 막상 세상을 둘러보면, 빈틈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세상에는 '빠릿빠릿한' 개체들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며, 언뜻 보면 '비리비리해' 보여도 꿋꿋이 삶을 영위하는 개체들이 많다. 물론 그런 개체들 중에는 '비장의 무기'를 가진 축도 있겠지만, 사는 데 별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장식품'을 달고 다니는 축도 꽤 있다.
그러고 보니, 자연계에서 선택권을 행사하는 게 꼭 '자연'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등장한 시나리오가 '성선택sexual selection에 의한 미적 진화aesthetic evolution'다. 양성생식을 전제로 할 때, 아무리 잘나가는 개체도 이성異姓의 선택을 받지 않으면 대를 이을 도리가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날 거 아닌가!
그러나 선택에는 기준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자연선택의 기준은 누가 봐도 대충 뻔하지만, 성선택의 기준은 그렇지 않다. '십인십색, 백인백색'이란 말도 있듯, 성선택의 미적 기준은 중구난방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람의 경우에는 말이 통해서 뭐라도 물어볼 수 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의 성선택을 연구하려면 산과 들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암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리라는 보장도 없이... 설사 천신만고 끝에 어떤 결과를 얻더라도, 적응론자들이 판치는 학계의 인정을 받을지는 미지수다.
연구자들에게 외람된 말이지만, 역자도 성선택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왔다. 『센스 앤 넌센스』와 『핀치의 부리』에 이어, 성선택을 집중적으로 다룬 책을 번역하여 진화론을 완벽 정리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동아시아의 한성봉 사장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2017년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올해의 책' 중 과학책이 딱 한 권인데, 그 제목이 『아름다움의 진화』라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동갑내기 한 사장님의 말이라,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번역을 수락했다.
며칠 후 받아본 책은 기대 이상이었다. 저자 리처드 프럼은 수십 년간 조류의 생태를 관찰해온 조류학자로, 성선택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첫째로, 다윈도 인정했듯이 조류는 인간 다음으로 미적 안목이 뛰어난 동물이므로, 미의 진화를 연구하기에 적합한 1순위 동물이다. 둘째, 그는 수학과 경제학에 조예가 깊어, 성선택 이론의 대가인 피셔와 랜드/커크패트릭의 복잡한 이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셋째, 그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키츠의 시와 셰익스피어의 소설 등을 수시로 적절히 인용하며 자신의 미적 진화론을 뒷받침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펼친 미적 진화론은 성선택을 이해하는 데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는 미적 진화론을 이용하여 성적 자기결정권, 성 소수자, 가부장제도의 문제를 설명하고, 기존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페미니즘을 과학적 페미니즘으로 격상시켰다.
혹자는 성선택의 모호함을 들며, 그로 인해 진화론이 구심점을 잃을 것을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선택을 이론과 사례, 풍부한 도표, 삽화, 사진을 곁들인 이 책을 읽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껏 진화론의 근간으로 여겨져온 자연선택을 훼손하기는커녕, 성선택은 자연선택과 어우러져 진화이론에 깊이와 넓이를 더할 것이다. 더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까 봐 하지 않겠다.
진화론은 세상을 바꿨다. 그러기에 철학가 대니얼 데닛은 일찍이 다윈의 진화이론, 특히 '자연선택에 의한 적응적 진화'를 가리켜 '다윈의 위험한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는 '다윈의 정말로 위험한 생각'이다. 세상을 다시 한번 바꿀 테니 말이다.
여성의 성적 자기선택권이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일단 이 책을 읽어보라. 그러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며, 역자가 그랬던 것처럼 어느새 과학적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갈등과 투쟁의 역사보다는 화해와 평화의 역사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