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나의 멘토
어스름이 내려앉으면 간편한 옷과 도톰한 양말에 운동화 끈을 고쳐 메고 집을 나선다. 탄천을 따라 구비구비 이어진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맥락 없이 뛴다. 하루의 되새김질과 내일의 기대가 뒤섞인 상념의 발자국들이 저만큼 멀어져 간다. 산책로 옆을 흐르는 물소리는 엔야(Enya)의 Orinoco flow 선율 속 Sail away 후렴구와 함께 귓가에 맴돈다.

일상 속 산책길 달리기에서 멘토를 만난다. (출처: Pixabay)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남미 대륙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오리노코 강(Orinoco)을 거슬러 남미의 자연을 탐사하고 생명은 서로 얽히고설켜 공존하고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 이치의 과학적 근거들을 정리하고 설파하였던 200여 년 전 홈볼트의 여정과 삶을 떠올린다. [자연의 발명: 잊혀진 영웅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읽으며 단번에 사로잡혔던 4년여 전의 감동과 여운이 그리워 책을 다시 펼쳤지만 애석하게도 반짝이던 그 생생한 감동은 다시 찾아들지 않았다. 마음과 머리는 굳어졌고 삶의 무게가 조금 더 무거워졌기 때문일까? 연구라는 직업으로 밥벌이를 하고 실험 결과에 가슴 뛰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면 책을 읽었던 당시의 감동 탓인지, 200여 년을 훌쩍 넘어 책 속의 한 과학자가 당대와 현재까지 과학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의 행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몽글거린다.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성과와 재원을 만들어 연구개발을 해야 하는 그 책무가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일인지 깨닫고 다시금 맘을 다잡게 한다. 매사에 큰 의미를 주는 일상으로 가득할 수는 없겠지만 늦은 밤 뜀박질과 함께 뜬금없이 책 속에 있던 훔볼트를 다시 만나면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진다.
작가 안드레아 울프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 생애를 따라가며 과학적 탐구와 탐사활동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자연주의적 과학관에 영향을 받았던 동시대의 사상가, 정치인, 과학자,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마도 훔볼트의 자취를 훑으며 베네수엘라의 열대우림, 오리노코강, 침보라소 산, 독일 예나의 실험실, 에콰도르의 키도,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윌든 호수를 직접 찾아가 현장의 감상까지 담아냈기 때문에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듯하다. 나에게는 위인전이었고, 미생의 과학자에게 위로를 주는 동료의 이야기였고 자연과 과학을 공존과 공생에 관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일깨워 준 멘토의 조언이기도 했다.

공존과 공생
과학은 필연적으로 더 세분화된 전문가의 영역이 되어간다. 분야가 조금만 달라도 세부적인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부지불식간에 과학, 인문학, 예술 그리고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어느 때 보다 다양한 학문과 과학기술의 융합, 통섭의 절실함을 갈망하고 있다. 시장과 사회는 급변하고 노사, 세대 갈등에 더해 젠더 갈등이 사회를 뒤흔들고 환경문제는 범지구적인 이슈로 대응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전 세계적으로 기업과 국가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ESG(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환경, 사회적 가치, 지배구조)를 강조한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을 중요시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사회적 책무를 도외시할 수 없다. 과학기술을 통한 ESG 가치 실현은 이제 필수적인 셈이다. 공생의 가치 실현을 위해 탄소중립을 위한 정책과 과학기술 개발, 지구환경에 좋은 제품을 쓰려는 소비자의 확산, IT 기술 기술 기반의 디지털 전환을 접목하여 기후 중립화와 자원 순환 경제를 활성화하고 탄소배출량을 감축하는 활동, 친환경 생산체제 구축, 기후 혁신 펀드 조성, 전기차 전환, 재생에너지 사용률 증대 등 세상은 공생의 가치를 깨닫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200여 년 전 훔볼트가 자연을 탐구하고 탐험하면서 제시한 생명망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지구와 개체의 생태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의미가 있다. 베네수엘라 탐사여행 당시 밀림지대에서 자행되는 무분별한 벌목이 기후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듯 과학과 자연에 적용한 학제적 접근 방법, 자유로운 정보교환, 학문 분야 간 폭넓은 의사소통, 자연주의적 과학관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다. 이 책이 새롭게 읽히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다.
시인과 훔볼트
과학과 시가 어떻게 맞닿을 수 있을까? 미국의 근대 자연주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에서 훔볼트의 자연주의 과학관을 다시 한번 만났다. 소로는 “인생의 필수적인 팩트에만 직면하면서 살고 싶다”며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을 손수 짓고 2년 2개월을 살면서 자연과 호수를 관찰하며 적은 글을 엮어 월든을 펴냈다. 월든의 초고인 자연관찰 노트에는 훔볼트의 저서 코스모스와 그의 과학적 자연주의 내용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시인이 수집한 팩트는 진실의 씨앗이며 언젠가 날개를 달고 멀리 퍼져나간다” 며 마치 코스모스에 대한 화답을 하듯 월든을 집필했다.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한 습관이야 말로 과학을 오랫동안 지탱하는 힘이고, 자연과 과학과 시를 결합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문득 에밀리 디킨스(1830~1866)의 시 한 편을 마음에 다시 담아본다.
초원을 만들고 싶으면 (에밀리 디킨스)
초원을 만들고 싶으면
클로버 한 잎과 꿀벌 한 마리가 필요하다네
클로버 한 잎과 한 마리 꿀벌,
그리고 몽상
꿀벌이 없다면
몽상만으로도 충분하다네
To Make a Prairie (Emily Dickinson)
To make a prairie it takes a clover and one bee, one clover, and a bee,
And reverie.
The reverie alone will do,
If bees are few.
Reverie를 ‘꿈’으로 적은 번역본이 많지만 공상, 몽상, 환상에 가까운 원래 의미가 더 와닿는다.
책을 읽으며 또다시 즐거운 몽상을 해 본다.
에필로그
4년 전 어느 날 이렇게 썼다.
짙은 열대우림을 만들어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를 곁에 두고 흘러가는 생명의 흐름. 아일랜드 뮤지션 엔야(Enya)가 생명이 약동하는 물줄기를 보고 “Let me sail, Sail away”를 노래한다. 꿈속 노래와 같은 읊조림이 넘실거리며 오리노코에 녹아 흐른다.
출근길 새벽 기차 차창으로 흘러가는 낙동강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산 능성을 어슴프레 타고 넘실 거리며 내게로 쏟아져 내리는 설익은 석류빛 아침노을에 마음을 빼앗긴다.
바알간 그 생명의 태동이 내 마음을 오리노코로 이끌었을까.
그래 생동하는 시작이다.
오늘도 발갛게 태우자.
참고문헌
1. 자연의 발명, 잊혀진 영웅 알렉산더 폰 훔볼트, 안드레아 울프 저/양병찬 역, 생각의힘
2. ESG경영 트렌드 속 과학기술의 역할. 사이언스 타임즈(KIST TePRI Report), 김태형
3.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저/강승역 역, 은행나무
작성자: Laevis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이 책 봤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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