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가 어떻든 앞으로가 어떻든지 간에 이것저것 따져봤자 골치만 아파져요. (...) 소마 1그램이면 그런 걱정은 다 없어진다니까요. ”
- 올더스 헉슬리, 『멋진 신세계』 중에서
알약을 하나 드릴게요. 이 약은 당신의 뇌를 자극합니다.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결국 뇌가 느끼는 거잖아요? 약 하나로 당신의 뇌가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해드리죠. 모든 걱정과 근심은 사라집니다. 아, 이건 보너스, 꾸준히 많이 드신다면 이전엔 몰랐던 새로운 쾌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어찌나 짜릿한 느낌이던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모르죠.
이것은 ‘진짜’ 이야기입니다. 주디스 그리셀(Judith Grisel) 스스로가 오랜 약물 중독자였거든요. 중독으로 무너졌던 본인의 삶을 시작으로, 어떻게 중독을 극복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신경과학자가 된 후 얻게 된 여러 중독성 물질에 대한 통찰까지. 중독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모두 녹아든 책이 바로 『중독에 빠진 뇌과학자』입니다.
뇌의 무한한 학습 능력
“쾌감은 그 반대인 것으로 보이는 고통과 아주 기묘하게 연관되어 있지. (…) 사람이 둘 중 어느 하나를 쫓아가서 붙잡으면, 다른 한쪽도 거의 언제나 붙잡게된다네. 마치 이 둘은 하나의 머리를 가진 두 개의 몸처럼 말이야.”
- 플라톤, 『파이돈』 중에서
중독성 약물은 우리 뇌의 도파민 시스템을 자극합니다. 도파민은 쾌락 자체보다는 쾌락에 대한 기대감과 관련된 화학물질이에요. 따라서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직접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 심장을 쫄깃해지는 느낌을 선사하죠. 또한 도파민은 새롭고 재미난 것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우리 몸을 이끕니다.
도파민 시스템은 뇌의 핵심적인 학습 메커니즘으로 진화해왔습니다. 음식이나 섹스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자극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도파민 농도를 점차 바꾸고, 계속해서 이런 자극을 찾을 수 있도록 학습하는 것이죠. 하지만, 약물은 인간의 10만 년 진화 시계를 뛰어넘습니다. 우리 몸에 빠르게 흡수되어 도파민을 포함한 뇌 속의 화학물질 농도를 급격하게 바꿔버려요. 복잡한 과정 없이 뇌를 직접 자극해서 즉각적인 쾌락을 얻는 셈입니다.

뇌가 충분하다고 느낄 만한 약물은 없다. 처음에는 약물이 삶의 활력을 불어넣는 듯하지만, 결국 정상적인 상태조차도 약물을 통해서만 다스릴 수 있는 절박한 지경에 이른다. (사진은 TV시리즈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의 한 장면)
문제는 우리 뇌가 변화를 빠르게 학습하고 거기에 적응한다는 것입니다. 약물도 마찬가지예요. 처음 약물은 신선한 기쁨일지 몰라도, 뇌는 약물의 맛을 ‘학습’하고 이내 정상적인 상태라고 ‘적응’합니다. 약을 하면 할수록 그 효과를 상쇄하는 방식으로 우리 뇌가 적응한다는 얘기죠. 따라서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약을 하는 것뿐입니다. 더 강력하고 새로운 쾌락을 느끼고 싶다면 전보다 저 많은 약이 필요할 거예요. 바로 중독입니다.
대마, 모든 시냅스를 춤추게 하는 마법
대마에 취해 있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입가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고, 마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벅차오르는 기분이라네요. 대마의 주성분인테트라히드로칸나비놀(THC)은 뇌 전반에 걸쳐 작용합니다. THC와 결합하는 수용체가 대뇌 피질부터 피질 아래의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마는 세상의 모든 자극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어 줍니다. 유치한 개그에도 박장대소하고, 조금이라도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이내 황홀경에 빠집니다.
대마가 없을 땐? 인생의 재미가 사라집니다. 모든 문장에 형광펜을 칠하면서 책을 읽는다면, 당장은 재밌고 흥분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죄다 형광펜이 칠해진 책을 다시 펼쳤을 땐, 어디가 진짜 중요한 파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재밌는 부분도 오히려 형광펜에 가려져 재미를 느낄 수 없죠. 대마도 그렇습니다. 삶에서 의미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오던 장치가 망가지면서, 즐거움을 주었던 일이 더 이상 예전처럼 즐겁지 않습니다.

“대마는 지루한 삶을 견뎌낼 수단으로 세상 만물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들었고, 위협적이던 시공간을 유쾌하게 바꾸었다. (…) 마치 4인치 대형 붓으로 20리터에 달하는 페인트를 온갖 신경전달 과정에 처덕처덕 칠하는 것과 같다.” - 주디스 그리셀,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 중에서
알코올,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파괴적인
때로는 슬프고 우울한 기분을 줄이기 위해서 약물을 씁니다. 알코올이나 진정제가 대표적인 경우죠. 술은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중독성 물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술에 포함된 에탄올(알코올)은 그 분자 구조가 다른 약물에 비해서 매우 작고 단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코올이 뇌 어디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 효과도 다른 약물에 비해 그다지 특징적이지도 않아요.
그래도 알코올이 만드는 뇌의 모습을 그려보죠. 와인 한 잔을 들이켜면 불안했던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아마도 알코올이 신경전달물질인 가바(GABA)를 활성화했기 때문일 겁니다. 가바는 대표적인 억제 물질로 신경 활동 속도를 늦추는 역할을 합니다. 알코올이 가바의 활동을 촉진해 진정 작용을 끌어낸 것이죠. 반대로 알코올은 흥분성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 수용체의 기능을 떨어트립니다. 신경세포가 억제 물질인 가바는 주고받고 흥분 물질인 글루타메이트는 주고받을 수 없으니 엎친 데 덮친 격, 뇌가 뻗을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가바와 글루타메이트 모두 뇌 전역에 퍼져 있는 물질이다 보니, 알코올은 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전반적인 인지나 정서, 기억, 운동 기능까지 둔화시킵니다.

술 한두 잔이야 긴장이나 불안을 덜어주겠지만, 그 이상은 문제다. 평소에 잘 붙잡고 있던 생각이나 감정들이 풀어져 통제할 수 없게 되고, 말과 행동도 나른해진다. 더 마시면? ‘필름’이 끊긴다.
지치고 힘들 땐 내게 기대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은 모두 뇌의 작용으로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뇌를 움직이는 요인은 대부분 뇌 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뇌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진화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작동하죠.
그중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의 저자 주디스 그리셀은 ‘타인과의 연결’에 주목합니다.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생각과 감정, 행동들도 결국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을 테니까요. 따라서 중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외되었다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중독성 약물을 남용하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약물을 복용하면 할수록 더욱더 깊은 소외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 말이죠.

“결국 나를 변화시킨 것은 인간적인 사랑과 타인과의 연결이었다. 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에게 스스럼없이 보이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마음이 합리화와 정당화로 무장된 나의 방어막을 비틀어 열었다.” - 주디스 그리셀, 『중독에 빠진 뇌 과학자』 중에서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약물로 쾌락과 안정을 만끽했다면 중독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죠. 걱정과 불안을 단번에 날려버릴 명약(?)은 없기에, 나의 마음을 열어줄 사람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아니, 어쩌면 마음이 무너질 것만 같은 사람들의 외침을 먼저 들어야겠습니다. 우리에겐 누군가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요.
곁들이면 좋을 책
『중독에 빠진 뇌』. 마이클 쿠하 지음. 김정훈 옮김. 해나무
『도파민네이션』. 애나 렘키 지음. 김두완 옮김. 흐름출판
『마음을 바꾸는 방법』. 마이클 폴란 지음. 김지원 옮김. 강석기 감수. 소우주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오후 지음. 동아시아
작성자: 박현규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이 책 봤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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