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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봤니? - 서평
랩걸 Lab Girl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호프 자런 (지은이), 김희정 (옮긴이) | 알마 | 2017-02-17
회원작성글 BRIC
  (2019-01-08 15:05)

막 동이 트기 전 새벽녘의 학교 앞 버스 정류장, 실험 결과가 궁금해 밤새 실험을 하고 집으로 가던 그 시간. 현미경으로 보았던 선명한 녹색의 형광 점들은 선선한 새벽 공기를 다 들이마시고 싶을 만큼 뿌듯함을 남겨주곤 했었다. 학부, 대학원, 포닥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인생의 청춘을 다 바친 실험실.

[랩걸]을 쓴 호프 자런은 그 청춘의 시간을 나무의 성장에 빗대어 그녀의 과학자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의 삶을 풀어놓는다.

그녀는 식물학자이다. 동위원소 분석을 통한 화석 삼림 연구를 하고, 내로라하는 과학상을 다수 수상했다. [랩걸]은 그녀의 화려한 연구 성과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무에 대한 과학적 고찰과 더불어 “한 과학자로서 다른 과학자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싶다” 그녀의 말처럼,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키워왔던 한 소녀의 꿈이 자신의 실험실을 만들고 성장시켜 나가는 자전적 이야기와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담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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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와 이파리]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아버지의 실험실에서 시작되었던 과학의 씨앗이 그녀의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은 경제적 사회적 여건상 과학의 길을 포기해야 했던 그녀 어머니의 삶이 토양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숲을 걸으며 울창한 나무 사이에서 오랜 시간 세월을 이겨내며 자란 나무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녀는 숲을 걸으며 나무 한 그루당 땅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열망하고 기다리고 있는 100그루 이상의 씨앗이 살아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과학자가 되어보겠다고 큰 포부를 안고 시작했던 나의 대학원 생활이 그랬다. 하루하루 실행하는 모든 실험이 그럴듯한 논문으로 뚝딱 만들어질 줄 알았다. 처음 파이펫이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행복했고, 냄새나는 동물실도 좋았고, 매일 내가 할 수 있는 실험이 있는 것이 설레고, 내 손으로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 없이 반복되는 실험들, 한 발자국도 진전이 안 돼서 두려웠던 랩 미팅, 하루에 한 문장도 쓰지 못했던 논문, 좁디좁은 실험실에서 서로 잘났다고 얼굴 붉히던 인간관계들. 나는 씨앗이었다. 호프 자런이 그랬듯, 내 손에 “이파리” 하나를 쥐기까지 땅속에서 꿈틀거리던 씨앗이었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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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by Matt Ching

[나무와 옹이]

그녀는 땅을 팠다. 깊고 또 깊게 파 내려가 각 퇴적층의 경계를 나누고 각 퇴적층의 동위원소를 분석해 각 퇴적층이 각각의 다른 식물화석임을 밝혀내는 연구를 한다. ‘식물’이라는 과학계의 비인기 종목인 그녀의 연구는 교수가 되어도 연구비를 지원받기 쉽지 않았다.

“미국은 과학을 중시한다고 말은 할지 모르지만, 대가는 치르려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리라 기대했건만, 현실은 연구비를 받기 위해 원치 않은 연구도 해야 했고,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를 썼고, 불안함과 좌절감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인 아픔을 견뎌 내야 했다. 나무가 만들어내는 대다수의 가지는 바람, 천둥 혹은 중력 때문에 완전히 크기 전에 잘려 나간다. 잘려나간 부위는 겉에서는 단단한 껍질에 싸여 상처가 드러나지 않은 “옹이”가 된다.

과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걸어가는 길은 학위를 하나씩 받을 때마다 현실과의 괴리감이 느껴진다. 주변 사람들은 한창 사회에서 경제활동을 시작할 때에 실험실에 박혀 학비, 생활비 걱정을 하고, 박사 졸업 가운의 세 줄이 잊혀지기 전에 포닥 자리를 찾아야 하고, 값싼 임금에 큰 기대치를 요구하는 포닥이란 지위는 ‘정규직’을 찾기 위해 숨 고를 틈 없이 미친 듯이 달려 가야 한다. 주위의 교수들을 보니 대학원생, 포닥의 인건비와 실험비를 벌기 위해 또 달려 나간다. 조교수에서 부교수, 정교수가 되는 길도 쉽지 않을뿐더러, 정교수가 되어도 연구비가 없으면 실험실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마 이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나무에는 그렇게 감추어진 “옹이”가 수십 개씩은 있을 것이다. 비주류에 대한 설움은 나에게도 ‘옹이’가 되었다. 연구비를 받기 위한 수많은 용역연구들이 내 손을 거쳐 갔고, 경험이라는 껍질이 되어 옹이를 덮어버렸다. 하고 싶던 연구와 경제적 잠재력 사이의 간극이 ‘옹이’가 되었고, 그것을 덮고 가지를 뻗을 수 있는 환경을 찾아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나무가 죽기 전까지 속도만 느려지지 계속 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도 내 인생의 수많은 가지가 자라고 옹이가 생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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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by Hope Jahren

[꽃과 열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식물은 꽃이 피고 수정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녀는 과학과 삶에 있어서의 꽃을 피웠고 열매를 맺었다. 노(老) 과학자가 던진 돌을 딛고 서서 다음 세대의 징검다리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남편을 만나면서 아들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과학은 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다. 비슷한 길을 걷는 사람들과는 경쟁과 협력을 반복하면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누군가 그 촘촘한 그물망을 트램펄린 삼아 뛰어넘을 수 있는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비주류 연구, 여성이라는 악재에 엄마라는 하나의 짐을 더 얻게 된 그녀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며 스스로 의심을 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엄마라는 직업이 주는 두려움과 그녀의 문체처럼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달려온 과학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어쩌면 대부분의 기혼 여성 과학자들은 그녀보다 더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자아실현을 위한 과학의 길은 때로는 헌신하고 포기해야 하는 상황과 삶의 열매인 아이들을 잘 여물게 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서야 알았다. 호프 자런은 자신은 자라면서 한번도 ‘살아있는 여성 과학자’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없다고 했다. 지금은 그녀 자신이 ‘살아있는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간다. 이제는 더 이상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들처럼 전설 속의 이야기로 남는 여성 과학자의 이야기가 아닌, 과학의 각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수많은 옹이를 품고 당당하게 자라나가는 현실의 여성 과학자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다.

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수년 동안 밤낮없이 매달린 일을 고작 4-5페이지의 저널에 투고한다. 논문 하나가 삶의 한 줄이 되고, 그 논문 하나가 세상과 과학자를 연결하는 끈이 되기도 하고, 그 논문 하나가 앞으로 나가기 위한 방향키가 되거나 동력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씨앗부터 시작해 나무로 성장시키고 열매 맺는 모든 과정들을 표현해 남길 수 있는 기회는 극히 드물다. 평범하지만 평탄하지 않은, 위대하지만 요란하지 않은 과학의 길을 걷는 [랩 순이] [랩 돌이] 들의 찬란했던 청춘기가 계속해서 쓰일 수 있길 기대한다. 유명한 저널의 논문이 없으면 어떤가? 주류 연구가 아니라 사람들이 몰라주면 좀 어떤가? 남들과 좀 더디 걸어가면 어떤가? 과학자라면 누구나 심어왔고, 누구나 키우고 있을 씨앗의 성장기는 열매의 모양, 종류, 숫자보다 더 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We still have challenges but science is great and the key for study. (Dr. Roger Glass)"


작성자: LabSooni Mom (필명)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이 책 봤니?"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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