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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과학자 창업 도전기] 14화. 과학자의 언어를 버려라
회원작성글 BRIC
  (2021-12-21 14:09)

과학자의 언어를 버려라


한숨 돌리는 기간을 갖기로 결정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둘 다 맡아서 하고 있던 일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다. 우리에겐 다음 목표가 있었다.

급여가 해결되고 난 뒤 우리의 목표는 연구소를 구축하기 위해 투자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투자 관련 교육을 신청하고 내가 방학을 하고 있던 시기에 투자 교육을 받았다.  사실 정부에서는 스타트업의 생존을 돕기 위한 한 가지 전략으로 투자 관련 교육을 시켜주곤 한다. IR 장표란 대체 무엇인지, ppt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혹은 어떻게 발표를 해야 하는지 등 다양한 것들을 알려주고 연습시켜주는 과제인데, 뭐든 일단 공부를 하고 다음 일을 도모하는 우리 팀 스타일에 딱 맞는 과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또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 우리가 투자를 위한 IR 장표를 만들면서 깨닫게 된 것은, 과거 내가 연구개발을 위해 작성해온 제안서 혹은 발표를 위해 준비한 PT와는 완전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교육을 받기 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의 사업에 대한 설명을 담은 여러 장표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나마 여기저기 발표를 해본 경력도 있고, 연구 개발 관련된 장표를 만들어본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나마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잘 되지 않았다.

우리의 연구기술은 고도의 전문화된 분야인 덕택에 사실 뼛속까지 문과인 우리 동료도 이해하기 버거워했기 때문이었다.  동료도 이해하기 힘든 언어일진데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리 없지 않겠는가.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 사업의 가장 큰 허들은 결국 과학자만 아는 이 언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거 멘토를 이해시키기 어려웠던 우리의 언어가 투자장표를 만드는 데에서도 문제가 된 셈이다. 그렇게 우리에겐 새로운 미션이 생기게 된 것이다.

쉬운 작업은 사실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바꿔야 했던 이유는, 바꾸지 못하면 시장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업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그를 추구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왜 그 기술이 중요한지, 그리고 그 기술을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왜 필요한지를 어필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시장에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우선 나는 동료를 다시 이해시켜보기로 했다. 동료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동료를 설득하고, 경영자인 동료가 본인 눈높이에서 기본 틀이 되는 장표를 만들기로 했다.

두 번째로 과학자의 언어를 내려놓기로 했다. 화학자의 언어를 중학생에게 설명할 수 있게 바꾸는 작업을 했다. 정확한 언어가 아니라고 분노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되도록 본래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 단어로 바꾸었다. 어려웠다. 수시로 다시 원래 단어로 바꾸고픈 충동을 느꼈지만, 간신히 참아내는 중이다.

이 전략은 나름 성공적인 상황이다. 동료는 예전보다 우리가 하려는 일을 이해하는 것이 쉬워졌다. 이전에 IR 장표와 지금의 장표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 수준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과거엔 알 수 없는 전문용어로 가득하던 장표가 지금은 간단하면서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바뀌어 가고 있다. 쉬운 언어가 쓰이기 때문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늘었고, 질문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오고 있다.

여전히 과학자의 언어를 버리는 것은 어렵다. 말을 하나하나 바꿀 때마다 흠칫 거리기도 일수고, 돈을 벌기 위해 과제를 수주하고 발표를 하며 불확실한 미래 가치를 설명할 때마다, 뭔가 찜찜하기도 하다. 확실한 것만 말하고, 불확실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연구 신조와 어긋난다는 생각에 내가 점점 타락하는 것인가라는 자괴감도 간혹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업을 쉬지 않는 이유는 나름의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고, 그래서 의약품을 개발하는 연구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의약품이 어느 누군가에게 편안한 삶을 선사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화학은 사람들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어려운 언어로 화학이 사람들에게서 멀어져 간다면, 그래서 no chemi를 외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면, 화학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정말 필요한 시점에 사람들을 도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연구가 중요한지를 설득할 수 없다면, 그래서 연구로만 남아야 한다면,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는 약을 만든다는 의약화학 연구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실행할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오늘도 현실과 적당한 타협을 하며,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선으로 전문용어를 번역하고 있다.


작성자: 윤정인 (엄마 과학자, 유기화학자, 칼럼니스트, 창업가)

* 본 글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피펫잡는 언니들"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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