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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리의 육아일기] 연구실의 첫 임산부
회원작성글 BRIC
  (2020-07-29 15:28)

연구실의 첫 임산부

© Pixabay

“교수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 임신했어요.”

“뭐라구?”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라이터를 누르려던 교수님은 황급히 담배를 책상에 내려놓으셨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교수님께 축하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고 그냥 나의 신변의 중요한 일을 그저 보고하고 나오는 형식이었다.

나는 10여년 된 우리 연구실에서 처음으로 임신한 학생이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연구실에서 결혼도 내가 첫 번째였다. 박사학위 3년차 시절, 가장 실험을 버벅거리고, 랩미팅 때마다 깨지던 시절 불쑥 결혼한다고 말씀 드렸을 때에도 교수님께서는 그다지 탐탁치 않은 반응이셨다. 아마도 지금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고 헉헉대는데 결혼까지 하면 연구실 일에 소홀해지고 제대로 학위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을 하셨던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박사 마무리 단계로 바쁜 박사 5년차인 지금 아이가 생겼다니 교수님께서는 아마도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상상이 안 되셨을 것 같기도 하다.

입덧이 시작되고 (다행히 TV에서 보는 것처럼 욱~~! 하고 토하고 그러는 일은 없었다) 한 달간은 늘 멀미하는 느낌으로 지냈다. 남들은 임신하면 밥 냄새를 힘들어한다고 하던데, 나는 밥과 김치만 먹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입덧하는 동안 깍두기, 겉절이, 무생채, 열무김치, 총각김치, 동치미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김치를 만들어 가져오셨다. 그리고 난 너무나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빵은 먹을 수 없었다. 빵을 한 조각이라도 먹는 날은 속이 쓰려서 잠을 못 잘 정도라 임신 내내 빵을 거의 못 먹었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의 삶은 임신 전후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나 스스로가 달라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구실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미혼이었고 교수님도 남자분이셨기에 괜히 내 일을 잘 못하면 임신을 핑계 삼아 맡은 일을 제대로 안 한다는 말을 듣지 않을까 싶어 더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려고 했나보다.

방장이었던 나는 연구실 전반적인 시약, 샘플 관리를 비롯해서 랩의 전반적인 일들을 처리했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대학원 졸업을 위한 영어시험,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영어 성적표를 제출한 사람들만 졸업시험을 볼 수 있었고, 졸업시험 합격한 후 논문심사를 신청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졸업 요건은 제1저자로 된 SCI 논문 1편이었다. 하지만 우리 연구실 내부적으로는 impact factor 5점 이상 되는 제1저자 SCI 논문 2편이었다.

당시 나는 두 번째 논문을 마무리하기 위한 실험을 하고 있었고, 영어 성적은 아직 준비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박사과정 입학하자마자 영어시험 성적을 빨리 만들었어야 했는데, 실험이 바쁘다고, 과제가 많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새 코앞에 닥쳐버린 것이다. 당초 교수님과 계획했던 졸업 플랜은 6월에 졸업시험을 보고, 2학기에 논문심사를 받은 후 내년 2월에 졸업하는 스케줄이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졸업시험을 보기 위해서 영어 성적을 내는 것이었다.

‘지금이 2월이니까 3, 4, 5월 3번의 토익시험 기회가 있으니 그 안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처음에 나는 영어시험을 가볍게 생각했다. 하지만.... 수년간 논문 영어만 보던 사람이 토익시험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정답은 택도 없는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석사때 토플시험 2-3번 본 적이 있었을 뿐 6-7년동안 영어 시험은 본 적도 없고, 특히 토익은 처음 접했다. 토익을 보겠다고 정한 이유는 값이 싸고, 자주 볼 수 있고, 점수도 빨리 나오기 때문이었다. 입덧으로 인해 몸이 으슬으슬 추웠던 3월, 어느 중학교 교실에 앉아 토익 시험을 치렀는데, 시험보면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서 깜짝 놀랐다. 나중에 뒷장은 문제도 못 읽어보고 찍고 나왔다.

‘헐...! 이러다가 영어점수 못 만들겠는데?’

당황한 나는 인터넷 강의 수강권을 결제하고, 교재를 새로 사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랩에서 보내는 일과시간 동안에는 전혀 영어 공부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밤에 집에 가면 그때부터 영어공부 모드에 열을 올렸다. 임신 초기 3개월이 지나면 어느 정도 가벼운 운동을 해 줘야 한다고 하던데 하는 생각에 귀에 이어폰을 꼽고 리스닝 수업을 들으면서 5 km를 걸어 집에 가기도 했다. 주말에도 임산부 요가 스트레칭을 비디오 따라하면서 모니터에서는 선생님의 토익 강의를 들었다. 4월에 시험을 봤다. 3월에 비해 점수가 많이 오르긴 했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과사무실에 우선 6월에 시험 보겠다고 신청을 했다. 조교 선생님께서 시험보기 전날까지만 영어점수를 주면 되다며 우선 접수시켜 놓을테니 시험 점수 잘 만들어보라고 하셨다. 5월에 보는 시험에서는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데.... 토익 문제집을 펼치고 시험 전략을 짰다. 나는 문법은 완전 꽝이라 풀어도 찍어도 점수가 비슷했다. 하지만 리딩은 지문 읽을 시간만 확보되면 문제 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좋아, 우선 문법은 문제를 보지 말고 찍고 넘어가자. 그리고 그 시간에 리딩을 더 풀어서 최대한 못 읽는 지문이 없도록 하자!’ 이렇게 시간 배분을 짜고 실전 문제집을 사서 한달간 매일 타이머를 맞추고 실전문제 한 세트씩 풀었다. 그리고 5월 토익 시험을 치렀다. 토익시험 발표되는 날 점수를 확인한 나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를 훨씬 웃도는 점수가 나온 것이다. 오마이갓! 이 날은 내 생애 가장 기쁘고 가슴 벅차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난 지금도 후배들에게 영어점수는 미리미리 만들으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해준다. 나처럼 이렇게 심장 쫄리면서 박사과정 말년에 고생하지 말라고.....

영어 시험에 비해서 전공시험 공부는 훨씬 수월하게 넘어갔고, 박사과정 졸업요건 마지막 리스트인 논문 게재를 위해 열심히 논문을 썼다.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논문심사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출산하고 싶은 마음에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뱃속에 있는 우리 아기는 6개월이 넘어갔다. 실험복 단추를 잠그기 어려울 만큼 배도 제법 나오고, 태동도 느껴졌다. 특히 동물 수술하느라 집중할 때 아기도 긴장을 하는지 뱃속에서 쓰윽~ 하고 꿈틀거린다. 그러다가 한동안 움직임이 없으면 ‘얘가 어떻게 된 거 아냐?’ 하고 불안한 맘이 불쑥 든다. 아이의 움직임을 느끼는 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참 신기한 경험이다.

안타깝게도 내 논문은 생각했던 저널에서 reject를 당하고, 조금 낮은 저널로 내려왔는데 또 reject를 당했다. 논문 한번 투고하면 한 달이 지나야 decision letter가 오는데, reject 되면 또 다른 저널 양식으로 바꾸어 투고를 해야하니 reject 될 때마다 약 두 달은 공중에 날아간다. 벌써 3번을 reject 당했으니 아무래도 출산 전에 논문 심사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아기를 낳고 쉬는 기간 동안 내가 하던 일들을 후배에게 맡겨야 할 부분들도 있고, 내 샘플도 정리해야 하고, 지금 실험하던 것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참 분주했다. 난 임신 기간 동안 9시 전에 집에 가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임신 30주가 넘어가면서 갑자기 몸이 많이 붓기 시작했다. 내가 식사조절을 잘 안해서 그런가 보다 싶어 간식과 식사량을 줄였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은 집에도 걸어가는 것으로 운동을 대체했다. 그런데 아이 몸무게가 증가하는 것에 비해 몸무게 증가 폭이 너무 컸다. 다리가 너무 부어서 240 운동화를 신는 내가 250짜리 운동화를 새로 샀다. 발이 너무 부어서 그마저 끈을 제대로 묶지 못했다. 아기 낳기 전에 쥐 수술과 샘플링을 마무리 해야겠다는 생각에 동물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계속 앉아서 수술하는 것이 무리였을까? 나중에는 연구실까지 걸어오는게 힘이 들어 친정 아빠가 출퇴근 때 차로 데려다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임신으로 인해 연구실에서 내가 해야 하는 일들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아기를 낳고 3개월을 쉬게 되는데 박사과정 학생이 졸업을 앞두고 쉰다는 것이 너무 눈치가 보여 필사적으로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무리했던 것도 있었을 것 같다.

35주가 되니 누웠다가 혼자 일어나는게 너무 힘들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다리는 너무 부어서 밤에 늘 소파에 앉아서 잠을 잤다. 자다 깨다가를 반복하다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몇 개월간의 나의 부재로 인해 연구실 운영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시약과 샘플 정리를 싹 끝내놓고, 나의 랩노트도 잘 정리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원래는 아기 낳은 이후로 3개월을 쉬고 싶었는데, 이제는 도저히 걸어오기가 너무 힘들어서 예정일을 3주 남긴 시점에서 미리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출산휴가 첫날인 월요일, 몇 년만에 평일에 이렇게 여유를 부려보나 싶어 설레었다. 이제 아기 물품들도 준비하고, 출산 준비물도 챙겨야지 생각하며 산책을 했다.

출산휴가 이튿날 화요일 아침, 산부인과 정기검사일이라 남편이 차로 병원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남편은 이따가 집에 갈 때는 꼭 택시 타고 가라고 당부하며 출근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여느 때처럼 혈압을 재고, 소변검사를 하고, 의사선생님을 만나러 들어갔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얼굴이 좀 굳어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속 몸이 많이 부었었죠? 오늘 최저 혈압이 90이 넘었어요. 그리고 단백뇨도 나왔고요. 산모분 임신 중독증이네요”

"네?? 선생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아기 낳으셔야 해요.”

 

작성자: 닥터리 (필명)

* 본 서평은 "BRIC Bio통신원의 연재"에 올려진 내용을 "피펫잡는 언니들"에서도 소개하기 위해 동일한 내용으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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