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추위가 깊어갈 무렵, 정확히는 이맘때보다 보름 정도 후였네요.
포닥을 시작지 두 번째 해가 되는 겨울, 첫해와 달리 눈이 오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눈 대신 쌓여가고 있었고, 포닥 2년차의 연구에 대한 만족과 그와는 별개로 실적에 대한 불안감이 그 위에 방황하는 발자욱처럼 번갈아가며 찍혀가고 있었습니다.
늦은 밤 실험실에 남아 일을 하는 중에 플로리다에 있던 박사과정 동문에게서 뜬금없이 페북 메세지가 왔습니다.
Hey. Have you heard that?
Dr. X passed away yesterday.
(헤이...그 소식 들었어? 닥터 X가 어제 돌아가셨데...)
분명히 해석이 어렵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해석이 이해를 동반하는데 꽤나 시간이 걸리더군요. 난데 없는 박사학위 지도 교수의 부고였습니다. 그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때 그렇게 스스로 숨을 놓았습니다. 한 때 내가 나에게 상상했던 것과의 유사함으로...
나의 박사학위 기간은 지옥같았고, 인천공항을 떠나며 보란듯이 성공하겠다던 다짐의 이상과 괴리된 현실속에서 자존감을 잃어 갔습니다. 실험실 바닥에서 식어버린 몸을 전시하듯 그에게 남겨 놓는 것이 가장 강력한 시위가 아닐까 라고 상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실행의 의지가 없는 상상뿐이었지요.
디펜스를 마치자 마자 도망치듯 아팔란치아 산맥을 넘어 이곳으로 왔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와 버지니아의 장엄한 산맥을 이삿짐보다 빈공간이 더 많았던 적재함의 트럭으로 달리며 그 깊은 숲과 야음이 그곳에 두고온 시간도 가려주길 바랬던 것 같습니다.
프라이머 하나 시킬 돈이 없어서 거의 1년을 실험을 못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가난을 욕할 수는 없지만, 가난에서 기인한 방조는 아이에게는 전 인생이 걸린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지요. 부모는 선택이 불가능 하지만 지도교수는 내 선택 사항이라는 것과, 조악하나마 논문으로 나오기 충분한 데이터들이 이미 있었다는 점이 탈출과 리셋을 망설이게 했습니다. 인생의 순간에 기회비용과 매몰비용을 산출하는 것이 쉬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환경이 어렵더라도 구성원간의 유대가 있다면 나았을까요? 그런것이 없었기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부모의 가난은 구성원과 공유되지만, 실험실의 가난은 대학원생에게만 가혹합니다.
원망이 샘솟을 때, 펀딩을 못받는 다는 것이 꼭 그를 평가 절하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에도 시류가 있고 단지 그의 방향이 지금의 시류에 안맞는 것 뿐일 뿐, 그를 원망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실험실을 택하고 들어온 나를 탓하기에는 억울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남 탓 하기엔 부끄럽고 내 탓 하기엔 억울한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고,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심리학과에 재학중인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제공하는 무료 심리상담을 통해 간신히 나를 추스리며 꾸역꾸역 졸업으로 발걸음을 옮겨나갔고 정말 운 좋게 지금의 포닥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포닥 2년차가 되어가니 하나 둘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는 지인들은 박사 과정동안 했던 연구의 결과들이 제 1저자의 논문으로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거기에 포닥기간동안의 결과들이 합쳐져 적어도 어딘가에 지원은 할 수 있는 경력증명들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저는 제가 찍은 Confocal image 가 게재된 논문의 Acknowledgement에도 이름이 없는 상황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마냥 덤덤하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과 내가 선택한 일의 결과이니 감내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거인의 어깨에 서서 세상을 볼 수 있는 있는 일이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 뿐이다 그리 생각했습다.
더이상 박사 학위를 하던 실험실에 사람은 없고, 내가 남기고 온 구조체들과 데이터들은 후속 연구없이 그렇게 묵혀질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곳에서의 기억을 매몰시키듯이. 다만, 처한 환경이 내 능력으로 치환되어가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던 기억은 학대의 경험을 지닌 약한 존채처럼 이따금 발작처럼 서러움을 동반하더군요. 그러한 사고들이 중첩을 이루어갈 때 불현듯 전해진 그의 부고는 굉장히 기괴한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습다.
무서우리만큼의 덤덤함과 허무함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그 감정의 속내를 들여다 본 후의 죄책감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를 반복했습니다. 미묘한 해방감이 들었던 것 또한 사실인지라 그 놀라움이 또한 무서웠음을 고백합니다. 취업을 하건, 이민 조건을 바꾸는 서류를 작성하건 꼬리표처럼 붙어다녀야 하는 지도교수의 추천서, 혹은 인물평가...그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내가 그토록 불안정한 사람밑에서 버텨낸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안도감이 이내 양심의 가책이 되곤 했습니다.
그의 부고를 들은지 거의 1년이 다되어가는 가을의 막바지에 그 때의 기억이 계속 마음 저변을 밀고 올라옵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유언과 남겨진 그의 가족들에 대한 기억과 그의 학생으로서 악착같이 버티는게 전부였던 그 시절이 버무려져 그 시기가 앞으로의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남을것인가 가늠해 보지만.....사실은 알 길이 없을 뿐이네요.
과학인으로 사는 것도 결국은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라 뜻대로 되지 않는 일과 뜻하지 않은 일들에 둘러싸여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인것 같습니다. 계획한 방법과 시간으로 뜻하는 경력을 만들어 자리에 안착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길을 부평초처럼 흘러가는 상황에 있는 분들도 어찌 되었던 힘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어두운 글을 써보았지만....내일은 어찌되었던 또 힘내서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저처럼요. 그런게 삶 아닐런지요...
#포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