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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포닥 생존기: 늪에서 살아남기] 매너리즘의 늪에서 살아남기
Bio통신원(김또또 (필명))
많은 연구자분들은 처음 이 연구의 길에 들어설 때의 열정 가득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새로운 생물학적 현상을 밝혀 생명 과학 지식의 확장에 큰 기여를 한다거나, 질병 메커니즘을 풀어서 질병 치료에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나를 꿈꾸던 순간들 말이다. 그 가슴 두근거리던 첫사랑도 잠시뿐, 사실상 실험실에서 매일 하게 되는 일들은 아주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매일 세포를 체크하고 알맞게 컬쳐를 해주고, Western blot이나 RT-qPCR을 하기 위해 세포를 깔아서 약물을 처리해 샘플 프렙을 하고, 쥐에게 약물을 처리하고...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최신 테크닉이 필요한 재미있는 실험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매일 내 일상을 채우는 일들은 주로 동일하고 지루한 종류의 실험들로 가득 차 있다. 결과에 필요한 replicate을 채우거나 p-value의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똑같은 실험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어느 날 많은 조건의 약물을 세포에 처리한 후, 단백질을 뽑기 위해 마치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듯이 플레이트 한 well 한 well을 scraper로 긁어서 튜브에 담고 있는데, 10여 년 전 연구를 처음 시작하던 그때와 똑같은 일을 아직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일하기가 너무 싫어졌을 때가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소소한 실험을 직접 해야 할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한 땀 한 땀 손수 프렙 한 샘플이 내가 생각했던 가설에 부여하지 않는 결과를 보였을 때의 좌절감, 이렇게 고생해서 밝힌 결과가 뭐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결과가 될까 하는 의문과 의혹. 실험이 잘 진행되고 결과가 좋을 때는 신나는 기분을 느낄 때도 많지만 연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찾아오는 이 매너리즘의 늪에 한없이 몸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우연히 참석한 심포지엄에서 다시 찾은 동기 부여
팬데믹이 발생한 이후로 많은 세미나와 미팅들이 줌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작년 하반기부터는 서서히 대면 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기관에서도 창립 75주년을 맞이하여 심포지엄을 대면 방식으로 열었는데, 이 심포지엄은 연구 결과 발표를 위한 학회라기보다는 기관의 창립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였다.
연구의 매너리즘에 약간 빠져있던 시기였고, 너무나 많은 줌 미팅 때문에 대면 발표에 목이 말랐던 나는 하루 실험 일정을 거의 다 빼고 그 심포지엄에 참석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더 연구 결과 발표가 아닌 일반 청중들까지 포함한 심포지엄이라는 것을 당일 발표를 들으면서 깨닫게 되어 약간 당황하였지만, 아침으로 나온 빵과 커피가 맛있어서 계속 앉아서 듣게 되었다. (줌 미팅에는 없었던 refreshment의 달콤함...)
나는 현재 암 연구를 하고 있고, 내가 있는 기관은 암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병원 파트와 암 연구를 임상적 그리고 생명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파트가 둘 다 존재하는 상당히 큰 기관이다. 이 기관을 처음 설립한 의사 과학자인 분의 개인사부터, 그분이 왜 이 기관을 설립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되짚어보는 발표로 심포지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이 기관의 내로라하는 유명한 교수님들의 발표도 이어졌는데, 주로 학회에서 가장 최신 결과를 위주로 발표를 하는 것과는 달리, 이 심포지엄에서는 본인이 이 기관에 처음 오게 된 스토리부터 자신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어떤 연구 결과를 발견했으며 그것이 암 치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 전체적인 그림의 발표를 주로 하셨다.
그때 들었던 수많은 대단한 연구 결과 중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떤 교수님이 특정 암에 한해서이지만 그 생존율이 지난 75년간 80-90%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나게 증가한 것을 통계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기관 하나만의 성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기술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과거의 생명 과학적 연구로부터, 현재 최신 기술을 이용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그 암 발생 과정 기전과 그 암을 치료하기 위한 많은 약물들의 작용 기전들이 세세하게 밝혀진 덕분에 이룰 수 있는 대단한 성과였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이 기관의 한 직원분의 발표였다. 그분은 어렸을 때 소아암에 걸리게 되어 처음으로 이 기관과 인연을 맺었던 분인데, 여기서 치료를 잘 받고 완치를 받게 되어서 이제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갖게 되었다는 자신의 스토리를 전해주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이전에 암 치료를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기관에서 다른 암 환자들을 격려해 주고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직원으로 현재 일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발표를 마치면서 그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한 명 한 명의 연구자들의 크고 작은 연구들 덕분에 자신의 완치가 가능했고, 그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을 하자 그 학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립을 하여 박수를 보냈고, 어떤 분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하루 종일에 걸쳐 열렸던 심포지엄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이 기관의 원장이신 의사 과학자분께서 맺는 연설을 하셨는데, 거기서는 나도 진심으로 눈물을 흘릴 뻔했다. PPT 파일도 없이 마이크 하나 잡고 연설을 시작하신 그분은 이 기관의 연구를 통해 진보했던 여러 암 치료 기술들에 대해 하나하나씩 언급하시며 우리가 이러한 치료의 진보를 이루었고, 이러한 생존율을 이루어 냈다고 자랑스럽게 정리해 주셨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암마저도 생존율이 100프로가 아니다, 그리고 생존율이 정말 낮은 암 종류들도 많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하고,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앞으로 이 기관에서 중점적으로 연구해야 할 주제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역시 원장님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설 실력이 정말 탁월하셨는데, 그 연설을 눈앞에서 직접 들으면서 지금 다시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나는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연구에 대한 나의 마음이 다시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실험이 지겨우시다면 세미나나 심포지엄에 한 번 가보세요.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는 동기 부여를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사진출처: pexels)
물론 나의 연구 결과가 그 대단하시고 유명하신 교수님들의 연구 결과만큼이나 대단하지는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지루하고 반복되는 연구의 일상 가운데 스스로를 격려하고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내가 연구를 이어나가는 데 대단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구자 뿐 아닌 모든 인생은 다람쥐가 쳇바퀴를 굴리듯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지만, 그 쳇바퀴를 굴릴 수 있는 작은 원동력과 활력소를 통해 또 한 번 나아갈 힘을 얻게 된다. 이 심포지엄을 통해서 그 작은 원동력을 충전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앞으로 내 연구를 진행할 때에도 질병 치료나 아니면 내가 속한 과학 커뮤니티에 미세 소립자 만큼이나마 도움이 되는 방향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면서 연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일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주에 24시간 타임 포인트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가 잘 나오지 않았고, 6시간과 16시간 포인트도 확인해 보았지만 이제는 1-6시간 혹은 6-16시간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해야하는 상황이라 머리에 쥐가 나고 있다. (계획할 때는 머리에 쥐가 나고 샘플 프렙을 시작하면 손에 쥐가 날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 참여한 심포지엄에서 느꼈던 마음을 자꾸 상기시킨다. 나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 내가 밝힌 이 아주 작은 기전들이 쌓이고 쌓여 암 치료제를 활용하는 데 필요한 작은 지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세포를 깔기 위해 일어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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