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글은 정확한 지식이나 권고를 드리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연구실에서 경험한 것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일에 매진하시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잠깐의 피식~하는 웃음 혹은 잠깐의 생각,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면(3초 이상) 안 그래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여러분의 뇌세포가 안 좋아지니, 가볍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해마다 대학생들이 연구를 하겠다고 연구실에 옵니다. 솔직히 말하면, 연구가 좋아서라기 보다는, 의대에 가기 위해, 경력을 쌓으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우리 연구실 출신 대학생들이 매년마다 원하는 의과대학에 진학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의과대학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작년 여름방학에 연구실을 찾았던 학생이 있었는데, 의대를 가겠다며 학사 후(Post-Baccalaureate) 연구원으로 연구실을 찾았습니다. 이 학생은 우리 학교 아니어서 학기 중에 연구와 수업을 동시에 진행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졸업 후 찾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서, 국립보건원(NIH)에 이 친구를 위한 연구비를 신청했는데, 잘 되어서, 이 학생의 입장에서는 이력서에 날개를 달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친구와 다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1년 동안 있을 연구원이라면서, 저에게 학생을 잘 지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이전에 같이 일한 경험이 있어서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학생에게 주어진 프로젝트는, 우리 연구실의 박사과정 학생들도 하지 못한 복잡한 화학 합성입니다. 사실 우리 연구실에서는 제가 유일한 경험자인데, 이 학생에게 이런 프로젝트를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학 합성에서 말하는 커플링이라는 반응입니다. 화학을 아시는 분이라면, 이 부분에서 웃으실 텐데, 커플링 반응은 매우 보편적인 일입니다. 이미 많은 화학의 거인(?)들이 만들어 놓으신 가이드라인이 있어서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유기화학이 아닌 무기화학이라서 사실 그 가이드라인이 잘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렵습니다. 우리 연구실에서 유기화학을 담당하며, 매일 커플링 반응을 하는 학생들도, 금속이 첨가된 반응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화학반응은 다단계 반응이라 일단 기본적인 1단계, 2단계 반응을 통해 3단계로 갈 반응물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3단계 반응을 하기 위해서 실험을 설계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저도 해 본 적이 없는 반응입니다. 뭐, 시간을 들여서 한 2-3일 바짝 쪼이면 되겠지만, 저도 지금 하는 일들이 많아, 제 코가 석자라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일단은 학생에게 '이러이러한 주제로 논문을 찾아보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학부를 마친 학생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나 봅니다.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최고의 동료, 구글에게 물어보고 빨리 찾아서 그 내용을 이 학생과 공유했습니다.
'빨리 읽고 화학반응을 설계하자.' 저는 외국인이고, 이 학생은 미국인인데, 왜 이렇게 늦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상전이 따로 없습니다. '아무개야, 그건 불필요한 내용이야, 여기가 핵심이야.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화학반응 조건을 어떻게 잡을 건지 생각해 보자.' 저는 옆에서 계속해서 컴퓨터로 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숨소리도 안 내고 정독을 하는데, 벌써 10분은 지난 것 같습니다. '뭐, 좀 찾았니?' 이 학생이 대답을 하는데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만 합니다. '너의 설명은 좋았는데, 포인트를 살짝 빗나간 것 같아. 여기에서는 이러이러한 부분을 고려해야 해.' 살짝은 무슨, 그냥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헛발질의 대답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협력 연구가 달빛 없는 밤하늘처럼 깜깜하기만 합니다.

'이 부분이 핵심인 듯 하니, 이 부분을 읽고 정리해서 화학반응 조건을 설정하자.' 또다시 시간이 지나고, '잘 되어가니?'라는 저의 질문에 대해, 이번에는 뭔가 성과가 있는 것 같은 대답을 합니다. '좋았어. 그럼 이 부분은 이렇게, 저렇게 수정해서 설계하자.' 그랬더니, 갑자기 이 학생 왈, '논문에서는 그게 아닌데.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 오~ 논문을 잘 읽은 것 같습니다. '그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건 유기화학반응일 때나 되는 거야. 금속 원자를 포함하는 반응에서는 분자의 성질이 변해서 그게 적용이 안될 거야.' 이 학생이 대답합니다. '어? 논문에서 된다고 하는데?', 제가 다시 대답합니다. '이건 유기화학반응이잖아. 우리가 하는 일과는 달라. 네가 원하면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만, 실패하면 1, 2단계에서 얻은 화합물을 낭비하게 될 거야.' 수긍하기는 하지만, 이 학생,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 별로 내키지 않나 봅니다.
아무튼, 그렇게 실험 설계를 마치고, 실험에 돌입합니다. 습기가 없어야 하는 실험이라 진공펌프와 질소 기체를 사용합니다. 처음 하는 실험이라, 제가 시범을 보여줍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잠시만!,' 학생은 제게 말합니다. '그게 반응물 A가 맞아?', '응. 네가 확인해봐.' 실험하는 내내 저는 실험을 설명하고, 그 친구는 그 설명을 들으며, 하나하나 확인을 합니다. 가만 보니, 예전에 제가 대학생 때, 실험 수업에서 조교 형에게 검사를 받던 생각이 났습니다. '형, 여기 이렇게 저렇게 준비했어요.', '잠깐만, 내가 확인해 볼게...' 사실, 확인은 시범이 끝난 후에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바쁜 시간 쪼개서 일을 도와주는데, 계속 '잠깐만'을 외치며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개야, 처음 하는 실험이니까 모든 실험 과정과 관찰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해야, 나중에 이 실험을 최적화할 때 도움이 될 거야.', 학생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노트를 보니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아무개야, 웬만하면, 기록은 빨리 하는 게 좋아. 시간이 지나면 기억하기가 쉽지 않거든.' (실험노트에 대한 잔소리는 5년째 하고 있는데, 제대로 노트를 기재한 학생은 그동안 단 한 명이었습니다.)
우리 연구실에는 위계질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교수님이 공표한 사실이고, 그래서 대학생, 대학원생, 연구원은 모두 평등합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온 저는 처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아무튼,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지냈는데, 이번에 아주 상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It is what it is. 현실은 현실입니다. 사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이 글을 읽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요즘 연구실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신이 경험이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냥 뭔가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에 연구실에 합류한 1년 차 대학원생과 교수님, 그리고 제가 미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개야, 네가 대학생 때, 연구 경력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여기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게 될 거야. 네가 하는 일은 무기화학 합성이라 일반 유기합성과는 조금 달라. 여기 있는 김박사가 도와줄 거야.", 그 말을 마치자마자 학생이 대답합니다. "나도 금속 복합물의 합성을 해 봤어요.", "그래? 그럼 조금 더 수월할 수 있겠구나." 교수님은 대답을 마치시고, 제게 그 학생에게 기본적인 합성을 설명해 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학생은 그날로부터 실험을 시작했는데, 도무지 그 친구의 방법은 너무나 독특해서 제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냥 모른 척하겠는데, 계속해서 질문을 합니다. 이미 실험은 궤도를 이탈해서, 무한의 나락으로 가고 있는데,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좋게 말하면, 자신감이 있고, 대범하고, 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아는 것도 없고, 겸손함도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할 줄 모릅니다.
5년 전, 물리화학, 그것도 분광학에서 지금의 일로 업종 변경을 할 때, 저는 매우 조심스러웠습니다. 말이 박사지, 제가 받은 박사학위는 이 분야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업무는 합성화학, 생화학, 동물실험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이 일을 모른다. 그러므로, 열심히 배워서 일하자.'였습니다. 명색이 포닥이었고, 당시는 신생 랩이어서, 구성원이라고는 1, 2년 차 학생들이 전부였습니다. 누구도 저를 지도하거나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읽고, 묻고, 조심스럽게 시도하고, 꼼꼼하게 기록하고, 복기하고, 반성하고. 이게 제가 했던 일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요즘 학생들은 너무 당당합니다. 실험에 실패해도 당당합니다. 왜 실패했는지는 모르면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합니다.
옆자리에 있는 실험실의 대장, 4년 차 학생을 보다가 웃음이 났습니다. '저 학생도 그때는 그랬지.'라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들 발전하고, 훌륭한 학자로 변모하겠지요. 그러길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오늘도 부족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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