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글은 정확한 지식이나 권고를 드리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연구실에서 경험한 것을 여러분과 글로 나누고, 일에 매진하시는 우리 연구자들에게 잠깐의 피식~하는 웃음 혹은 잠깐의 생각, 그 이상은 바라지 않습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시면(3초 이상) 안 그래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여러분의 뇌세포가 안 좋아지니, 가볍게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BRIC에 들어와 보니 연구실 화재에 대한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나도 실험실에서 불구경(?)을 한 적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억의 금고에 봉인했던 두 번의 화재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었고, 다행히 저의 좋지 않은? 기억력 덕분에 잘 감춰져 있었는데, 위의 제목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 기억의 위치가 소환되고, 영상 단백질들이 출동해서, 원치 않는 이미지가 재생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전자과에서 납땜하다 기화된 납을 너무 많이 마셔서 납중독 된 것 같다더라는 이야기’와 더불어 ‘화학과에서 실험하다 불이 났는데, 소방차가 출동만 했지 물을 못 쏜다, 물 쏘면 난리 난다’는 이야기는 교육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산업재해 이야기입니다(물론 반 우스갯소리입니다.). 달가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2008년 UCLA 화학과 화재 사망 사건은 젊은 학생이 사망했다는 좋지 않은 결과와 더불어 지루한 소송이 계속되었다가 결국은 마무리되었습니다. 학교마다 실험실에서 문제가 된 이야기, 한 두 개쯤은 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 대학원생이 있었습니다. 태도가 별로였습니다. 실험 관련, 연구실 생활 및 여러 가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해도 듣지 않길래 그냥 포기했습니다.(예를 들면, 그의 책임인 폐화합물 처리를 하지 않아, 연구실의 모든 실험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이건 빙산의 일각이고, 여러 면에서 책임감의 부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저는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로 자료를 분석하는데, 학생들이 저를 급하게 부릅니다. 돌아보니, 후드 안에서 화재가 발생해서 불길이 치솟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저를 부르고는 저만 쳐다봅니다. 저는, 그냥 시크하게, '뭐야?'라고 뱉고는, 평소에 외워 둔 소화기의 위치로 성큼성큼 가서 소화기를 들고, '비켜'라고 말하고는 그냥 껐습니다. 소화기 분말로 후드는 엉망이 되었지만 불은 껐습니다. 하지만 화재 진압보다 중요한 것은 뒤처리입니다. 화재 원인에 따라서, 운이 나쁘면 파면, 감옥, 벌금 등 다양한 결과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일단 과사무실에 연락하라고 했고, 화재는 진압되었으니, 과사무실에서 소방당국으로 연락할지 말지를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 불성실한 학생이 말하길, '점심시간이네, 밥 먹고 와서 할게.' 하고는 연구실을 나갑니다. 기가 차고, 황당했지만, 뭐, 그러려니 했습니다. 학생들이 나가고 조금 후에 학과장님과 단과대학, 그리고 소방 관련 스태프들이 와서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고, 아마도 실험을 하다가 hot plate의 불량으로 불이 난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 친구가 실험을 걸어 놓고, 핫 플레이트의 온도 조절기를 세팅할 때, 보지도 않고 습관적으로 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용매마다 각각의 끓는점이 달라서, 핫플레이트의 온도 세팅을 달리하는데, 오래 일하다 보면, 온도 세팅 위치를 대략 외우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그 플레이트만 온도 조절의 방향이 반대로 설계된 것이어서(보통은 시계방향인데, 이 제품만 반시계 방향이었습니다.), 낮게 설정하다고 한 것이, 실제로는 너무 높게 설정이 되어 용매에 불이 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운이 없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기본도 안 된 행동이었습니다(원래는 온도를 세팅하고 난 후, 실제로 온도를 측정해서 그 온도를 유지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이 알려지면 생각보다 피곤한 일들이 발생하기에 그렇게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도, 또 그 학생입니다. tert-butyl lithium이라는 화합물은 공기 중에 노출되면 바로 화재로 이어집니다. UCLA 화재 사건의 발단도 이 물질이었습니다. 연구실에 오래된 tert-butyl lithium이 있었는데, 이 시약을 버리려면 드라이아이스와 THF라는 시약을 사용해서, 아주 소량씩 첨가하면서 저어 주어, 안정한 형태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위험한 일이라서 교수님은 그 학생에게 신신당부를 했고(이때 그 학생은 시니어였기 때문에 교수님은 그 일을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잘하는 듯했습니다. 저도 실험실 구석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다급하게 저를 외칩니다. (위의 사건보다 몇 배는 높은 데시벨의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불길이 후드를 뚫고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고 있고, 불길의 강도를 보니, 잘하면, 화학과와 물리학과가 동시에 폐업을 맞을 정도였습니다(같은 건물에 있습니다.).
원래 미국은 모든 일에 대한 적절한 프로토콜이 있습니다. 학기가 시작할 때면 매년마다 교육을 받고, 시험을 쳐서 통과해야만 실험을 할 수 있는 자격증(certificate)을 줍니다. 웃긴 이야기인데, 화재 프로토콜에는 소화기를 들고 끄라는 말이 없습니다. 불이 나면, 화재 경보를 울리고, 냅다 뛰어나가라고 배웠습니다(소화기 사용법에 대한 프로토콜이 따로 있지만 화재 프로토콜과 별도입니다.). 하지만, 저는 초등학교 시절, 어린이 소방관 교육에서 소화기 사용법을 배웠었고, 군대에서 안전교육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서, 위에서 언급한 화재는 그냥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고맙습니다, 국방부와 소방방재청). 그런데 이번 불은 규모가 다릅니다. 딱 보니, 조금 버겁습니다. 불길의 정도가 달라서, 불길이, 마치 악마의 혓바닥이 후드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학생들도 대략 3-4 미터 떨어져서 서 있었습니다.). 지난번 화재에서 소화기 사용법을 그렇게 가르쳐 주었건만, 답답한 학생들은 그냥 얼어붙어서, 자리에 서 있기만 합니다. 짧은 1-2초의 순간에 고민했습니다. 프로토콜을 따라, 비상벨 울리고 짐 챙겨서 도망갈까? 아니면.. 하..
이미 제 손에는 소화기가 있었고, 발사를 했습니다. 제 예상은 맞았습니다. 이 악마의 혓바닥은 도무지 수그러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화학약품 화재는 일반화재와 달라서 유독가스가 대단합니다(후드 안에서 불이 나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가스가 밖으로 나와서 난리가 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계속 쏘면서, 다급하게 옆의 아이에게, '야, 소화기 더 가져와 봐.'라고 말하고 계속 화재를 진압했습니다. 두 번째 소화기가 분사되었고, 불이 꺼지는 듯했습니다. 악마의 혓바닥이 뽑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뿔싸, 그것은 페이크였습니다. 저는 소방관이 아니기에 화재에 대한 경험이 없었는데, 화학물질의 연소는 죽은 체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을 그날 배웠습니다. 결국 그렇게 몇 통의 소화기를 이용해서 악마의 혓바닥을 뽑았습니다. 불을 끄고 나니, 화재가 문제가 아니라, '저 shake를, 그냥...' (마음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절대로 바깥으로 이런 마음을 내비치면 안 됩니다.) 나중에 제 모습을 보니, 분말을 뒤집에 써서 거의 눈사람이 되어 있더군요.
혹시 소화기가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십니까? 지금 당장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시고, 소화기 눈금이 녹색에 있는지 확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안전은 아무리 강조해도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이상한 사람들은 멀리하십시요. 이게 핵심입니다.
오늘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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