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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부터 10까지] 어디서든지 나를 돕는 사람들이 있다
Bio통신원(워킹맘닥터리)
5-1.
과거 랩실에는 라꾸라꾸가 하나 있었다.
실험 일정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날에는 실험실 가운데 가장 큰 공간에 라꾸라꾸를 펼쳐놓고 잠들었다.
모두 퇴근하고 난 뒤 덩그러니 혼자 남아 라꾸라꾸를 펼쳐 그 위에 누우면 쉐이커와 인큐베이터가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것이 들렸다. 랩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대학병원은 쉬지 않고 돌아가는 특성 때문인지 새벽에도 창문 밖으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진 몰라도 저곳에도 새벽까지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들은 타인을 위해 잠을 줄이며 깨어있는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깨어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기운이 났다.
추우면 가운 여러 겹을 이불 삼아 덮고, 쉐이커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으면 된다.
순찰 도시는 경비 아저씨는 불이 켜진 랩실에 노크하고 들어왔다가 초췌한 몰골로 마주하는 나를 확인하시면 눈인사를 하시고는 다시 나가셨다. 누구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시는 청소 아주머님은 아침에 잠들어 있는 나를 위해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를 억지로 구겨 베개를 만들어주시고 가셨다.
5-2.
항상 그렇듯, 계획은 거창하게, 결심은 단단하게 하여도 그 계획들은 항상 지켜질 수 없고, 에너지가 부족하면 결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연구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한 것을 나의 하루는 보고서 등의 서류를 작성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거나, 혹은 입시 홍보를 위해 고등학교에 방문하기도 하고, 산업체와의 산학협력을 하는 등에 대부분이 사용되었다.
이 일을 하는 도중, 저 일이 생각나고 저 일을 처리하다 보면, 그다음 일이 갑자기 떠오른다. 뒤돌아 생각해보면 많은 일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시곗바늘은 6을 지난지 한참이다.
퇴근하면 아기와 함께 목욕도 하고 밥도 먹이고 공놀이도 한다. 아기 띠로 아기를 안고 달래어 침대에 눕히면, 나도 모르게 아기 옆에 잠들어버린다.
나만의 연구를 해보자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5-3.
이번에도 연구계획서 제출을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낮 시간에 아기를 봐주시는 엄마에게 부탁을 드렸다. 계획서 작성해서 서류 제출할 때까지만 조금 늦더라도 양해해달라고 했다.
우리 엄마는 항상 OK다. 그런 우리 엄마에게 난 항상 미안하다. 미안한 만큼 기운 내서 연구계획서를 잘 써서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구실은 평생 있을지도 모를 곳인데, 소파 하나는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반으로 접으면 소파로, 길게 펴면 침대로 사용할 수 있는 푹신한 소파 하나를 샀다.
라꾸라꾸에서 가운 덮고 잤던 날도 있었는데, 히터도 켤 수 있고, 나 혼자 사용하는 깨끗한 소파도 있는 내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하는 것이 뭐 힘들까?
다행히 작년에 pilot study로 진행했던 작은 실험의 데이터가 유의한 결과를 보였던 것이 있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further study를 구상해나가며, 기존의 연구의 한계점을 없앨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고 계획서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분명 작성한 당시에는 논리정연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음날 다시 읽으면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띄었고 여러 번의 퇴고를 거쳐 글을 수정하고 띄어쓰기, 맞춤법, 오타 등을 확인해나가며 계획서 한 편을 완성했다.
계속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머무르면서도 이상한 설렘 덕택에 기운이 솟았다. 과거 랩실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편한 나만의 공간에서 작업하느라 그랬나 보다. 계획서 작성이 끝나고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며 서류를 업로드했다.
5-4.
출장지에서의 업무가 끝나고 연구실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다. 내비게이션을 키려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해 보니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들어와있었다.
'OO년도 O월 개시 생애첫연구에 선정되신 연구자를 대상으로...'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문자를 열어 내용을 자세히 확인했다.
'O월 O일까지 협약 체결을 완료하여 주시기 바라며...'
곧바로 산학협력단에 전화하여 문의했다. 개인 연구비 수혜를 축하드린다며, 협약 체결을 위한 안내를 자세하게 해주셨다. 문자를 받은 바로 다음날까지 기관 승인까지 완료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가능한 한 모든 일을 제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안내된 대로 협약 체결을 시작해야 했다. 그 길로 엑셀을 밟아 연구실까지 달려들어왔다.
이후 연구비 카드 신청까지의 모든 일을 연구책임자로서 직접 하는 것이 처음이라 산학협력단 담당 선생님과의 전화를 끊지 않고 재촉하며... 필요한 일들을 진행했다.
5-5.
내 곁엔 항상 구원투수가 있었다.
쉴 곳이 필요할 때, 푹신한 잠자리를 주었던 라꾸라꾸가 있었고 두루마리 휴지로 간이 베개를 만들어주시던 청소 아주머님이 계셨었다. 일이 꼬인 듯 불안할 때면 실마리를 풀어주시는 지도교수님이 계셨고, 일을 잠시 쉬고 싶다고 할 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남편이 있다. 억울한 감정이 들 때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동료 교수님이 계시고, 필요한 일들의 처리를 도와주시는 각 팀의 선생님들이 계신다. 언제든 OK를 외쳐주는 엄마가 있고, 지쳐 퇴근하면 오도도도 달려와 안아주는 귀여운 아기가 있다.
뛰어난 연구 성과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교수님들과 연구원 선생님들이 있겠지만, 그리고 그들에게는 연구비 수혜는 당연하거나,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을 바라보겠지만, 아무것도 없는 無의 장소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야 하는 새내기 전임교수에게는 이번 연구비 수혜가 구원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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