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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연구원이라도 괜찮습니다] 원심분리기 _ 거짓말도 들려요.
Bio통신원(세균맨)
마요네즈를 거의 다 먹었는데 용기에 들러붙은 잔량을 버리기 아까운 경우 양말을 이용하면 깔끔하게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양말 안에 마요네즈 튜브를 뚜껑 쪽부터 밀어 넣고 양말 주둥이를 손으로 단단히 움켜 잡습니다. 그리고 양말을 잡은 팔을 세차게 풍차 돌리듯 돌립니다. 한참을 돌리고 나서 병을 꺼내보면 튜브 벽에 더덕더덕 들러붙어있던 마요네즈들이 입구에 한 덩어리로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한번 쭉 짜서 쓰면 용기 안에 있는 마요네즈를 최대한 남기지 않고 다 먹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실제로 해 봤는데 정말 됩니다. 양말에서 병을 꺼냈을 때 깔끔하게 모여있는 마요네즈를 보고 쾌감까지 느꼈습니다.
원심분리의 원리이지요.
우리 가정에서 사용하는 세탁기의 탈수 모드 라든가 스웨덴에서 온 그 유명한 채소 탈수기 같은 도구들도 원심분리의 원리가 적용된 편리한 장치들입니다.
Microcentrifuge tube를 넣고 돌리는 스핀 다운용 미니 원심분리기는 뚜껑이 투명해서 동작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는데요. 돌아가는 튜브를 보고 있자면 그 양말과 마요네즈가 생각납니다.
가끔 실험장비들을 보며 어떻게 이런 것들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감탄하곤 하는데 원심분리기가 그중 하나입니다. 원심력을 이용해서 액체를 한곳으로 모으고, 혼합물을 밀도에 따라 분리해 내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한 천재가 있었겠지요?
원심분리기는 사소한 실수가 가장 빨리 들통나는 장비입니다.
고속 회전을 일으키는 장비이니 원래도 약간의 소음이 있지만 회전축을 중심으로 밸런스가 맞지 않으면 이상 소음이 추가됩니다.
홀이 많은 로터를 사용할 때 대칭되는 자리를 착각하여 한편으로 쏠리게 넣고는 스타트 버튼을 누르자마자 자동차 시동 걸리는 소리가 나서 허겁지겁 중지 버튼을 눌렀던 적 없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또 이럴 때도 있습니다.
밸런스를 맞추려고 각 튜브에 같은 양의 액체를 배분했는데 마지막에 약간 부족할 때가 있죠. 그럼 그 양을 다시 정량하기 귀찮아서 대충 눈대중으로 맞춰서 넣을 때가 있어요. 혹은 거품이 생기는 액체라서 마지막에 싹싹 모아 넣은 거품양이 순수한 액체로 얼마나 될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라던가요.
나의 눈대중이 많이 부정확했다면 원심분리기의 시작 버튼을 누르자마자 회전속도가 높아지면서 소음이 점점 커질 것입니다. 대부분은 즉시 꺼버리고 다시 세팅하지만, 1분쯤 짧게 돌리는 경우에는 모른 척하고 중지 버튼을 안 누르고 두기도 하는데 그때 누가 듣고 장비 고장 난다고 타박할까 봐 1분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며 눈치를 봅니다.
아무래도 자주 사용하는 장비다 보니 연구원들 각자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있더군요.
제 동료 중 한 명은 학교에 있을 때 원심분리기를 하도 대충 써서 어떤 날은 원심분리기가 작동되는 도중에 다리가 달린 것처럼 퉁퉁퉁 걸어 나왔다고 합니다. 균형이 맞지 않으니 회선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장비의 몸통 자체가 튀어나온 거예요.
웃긴 얘기지만 사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안전사고 발생이 생길 수도 있는 장비라고 해요. 장비가 고장 나서 책임을 묻는 정도가 아니라 사고로도 발전할 수 있으니 늘 밸런스를 잘 맞추도록 하고, 소음이 커지면 캘리브레이션을 해야겠지요. 기본 준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도 원심분리기에 대한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학원에 있을 때 저희 실험실은 Metagenome library를 만드는 것이 주요 과제 중 하나였어요. 그래서 다양한 사이즈의 DNA가 포함된 미지의 시료 분류를 위해 Sucrose Gradient 실험을 했습니다. 농도별로 적층한 Sucrose 용액 위에 분리하려는 시료를 넣고 원심분리하여, Sucrose 용액보다 비중이 큰 DNA를 침강시키는 작업입니다.
저희 실험실에는 UltraCentrifuge가 없었기 때문에 그 실험을 위해서 공동기기실에 있는 장비를 이용해야 했습니다.
2003년 어느 날의 실험일지
Sucrose Gradient를 위해서는 각기 농도가 다른 용액을 층층으로 쌓아야 한다.
매우 정교한 작업이라 사수로부터 주의를 수도 없이 들었다.
Sucrose 용액을 40%부터 10%까지 단계별로 쌓고 맨 위에 DNA가 포함된 샘플을 넣는 것이 미션이다.
길고 좁은 튜브 안에 고농도부터 저농도까지 용액을 한 층씩 쌓아가는 작업을 흔들림 없이 하기 위해서는 피펫 대신 가느다란 유리관으로 된 스포이트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튜브에 용액을 다 넣고 이동하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에 UltraCentrifuge가 있는 공동기기실까지 농도별 용액을 따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튜브에 넣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장비를 돌리기 직전에 장비와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서 작업을 했다. 샘플이 두 종류라서 사수와 내가 각각 하나씩 맡아서 로딩을 했다.
손떨림을 최소화하기 위해 튜브 벽에 스포이트를 살짝 대고 농도가 다른 액체가 서로 층을 유지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진동을 줄이며 손가락의 힘을 조절하여 액체를 다른 농도의 액체 위로 천천히 올렸다. 4개 농도의 Sucrose 용액을 끝까지 다 올리고 나니 어렴풋이 농도별 경계가 보였다. 작업이 꽤 잘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위층에 샘플을 올리는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왔다. 샘플을 담은 스포이트를 튜브 벽에 대고 마지막 숨을 고르고 손가락에 힘을 주려는 순간이었다.
“똑” 소리와 함께 유리 스포이트의 끝부분이 깨져버렸다.
흔들림 없이 로딩하기 위해 스포이트 끝을 튜브 벽에 너무 세게 눌렀나 보다.
깨알의 1/3보다도 작은 사이즈였지만, 깨진 유리 조각이 이제까지 정성껏 쌓아놓은 Sucrose gradient를 한층 한층 뚫으며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이 훤히 보였다. 천천히 가라앉는 유리 조각의 움직임 말고는 온 세상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내 심장도 잠깐 멈췄던 것 같다. 그 작은 유리 파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정말 들렸다.
정확히 “똑”하고 들렸다.
그때 내가 거칠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사수도 들었다.
“허헉!”
“왜 그래?”
“유리 깨졌어. 어떡해?”
사수도 어찌할 바를 몰라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Sucrose 용액을 투입할 때 실수를 했다면 Gradient를 다시 쌓으면 될 일인데 몇 시간 공들여 만들 샘플을 로딩하다가 그랬으니 난감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낙관적인 사람이 되었다.
“근데 완전 작아. 거의 안 보일 정도야. 그래디언트 경계면도 그대로 있어.”
“그럼...... 그냥 해도 될까?”
사수의 애원하는 듯한 눈빛은 제발 그냥 해도 되는 상황이어야 한다는 강한 에너지를 쏘아내는 것 같았다. 더구나 주변에 공동기기실 담당자와 다른 연구원들이 있어 소란을 피우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어...... 그래도 될 것 같아.”
영화에서 보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다 결국 더 큰 낭패를 보는 일이 있죠? 그럴 때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지 왜 저걸 거짓말을 해서 일을 키우나 답답하시죠?
그게 그 상황이 되면 거짓말이 절로 나오더라고요. 아마 사수도 이 상황을 그냥 낙관적으로 보고 싶어서 달려와 제 샘플을 확인하지 않고 제 말을 믿고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저도 자꾸 보니 조각이 정말 작아서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아무튼 저 스스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조각이라고 거짓인지 진실인지 헷갈리는 변명을 하며 샘플을 Ultracentrifuge에 넣고 장비를 돌렸습니다. 회전 속도가 올라가면서 발생하는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아서 일단 안심을 했습니다.
장비는 수 시간을 돌려야 해서 다음날 찾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다음 날의 일지
내 평생 이렇게 불안해하며 불면의 밤을 보낸 날이 있었던가.
그런 고속 원심분리기는 밸런스가 조금만 안 맞아도 큰일 난다는 말을 누누이 들었다. 그냥 서버릴 수도 있고 아예 고장이 나버릴 수도 있다고 했다.
실험을 망칠까 봐 걱정될 때, 발표를 앞두고 긴장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 비싼 장비를, 더구나 공동기기실에 있는 장비를 망쳐 놓아서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실험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을 수십 번 상상했다.
제발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앞으로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실험도 열심히 하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일찍 초조한 마음을 안고 공동기기실로 향했다. 기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담당자가 장비 고장 통보를 하며 뭘 잘못했는지 추궁해오는 장면도 이미 여러 번 상상한 후였다.
걱정과 각오를 반복하며 들어간 공동기기실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고요했다. 거대한 UltraCentrifuge는 밤새 고기를 잡고 들어와 새벽에 잠든 어선처럼 차갑고 듬직하게 서 있었다.
어제 장비 일지를 쓰라던 담당자가 다가와 어제와 비슷한 무표정으로 시료를 빼가라는 안내만 하고 사라졌다.
다시 세상이 아름다워졌다.
정말 그 유리 조각이 너무 작아서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장비가 조금은 손상을 입었을 수도 있지만, 그 후에도 장비는 오래도록 잘 가동되었으니 제가 치명적인 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지금까지 그 일들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사수는 제가 그때 그렇게까지 걱정한 것은 모를 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인생 다 끝난 것처럼 걱정하는 제 모습이 좀 한심스럽기는 했거든요. 돌이켜보면 샘플을 망가뜨렸으면 실험을 다시 하거나, 두 개의 샘플 중에 하나만 걸어도 됐을 일인데 그때는 그런 옵션은 아예 선택지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샘플은 워낙 양이 적어서 혹시 문제가 생겼더라도 장비 고장 정도로 끝났을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UltraCentrifuge는 상황에 따라 축이 틀어지면 폭발에 버금가는 엄청난 사고를 낼 수도 있다고 하네요.
안전사고는 늘 방심할 때 일어나니까 좀 과하다 싶을 만큼 조심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거짓말하면 다리 뻗고 잠 못 잡니다. 삽질했을 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상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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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황량하고 지루한 곳 같지만 역동적인 매일이 담겨있는 곳이다. 모든 연구원들에게는 실험실에서의 추억이 있다. 즐거웠던 기억, 지긋지긋했던 기억, 성취감에 기뻤던 기억, 그리고 가장 많은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는 삽질의 기억. 그런 나와 내 주변의 얘기들을 나눠보려고 한다. 모두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니까, 과학도들도 잠시 바쁜 손을 놓고, 조금 감성적인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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