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스토리를 담고 있는 연재를 만나보세요.
[감성적인 연구원이라도 괜찮습니다] 클로스트리듐 퍼프린젠스의 추억 _ 처음 맡은 실험은 정말 부담스럽죠.
Bio통신원(세균맨)
[출처 : Photo by Brett Jordan on Unsplash]
대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실험실에 간단한 용역 업무가 들어왔습니다. 클로스트리듐 퍼프린젠스 (Clostridium perfringens) 타이핑을 하는 일이었는데요. 클로스트리듐 퍼프린젠스는 타입이 여러 가지라 유전자를 분석하여 타이핑을 하는 작업이 식중독 판별에 중요합니다.
당시 저는 클로닝을 배우는 중이었고, 어느 정도 PCR에 능숙해지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용역 업무는 저의 첫 번째 단독 미션이 되었습니다. 실험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미 분리 배양되어 플레이트로 받은 시료로부터 콜로니만 따서 PCR을 돌리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단지, 저 혼자 실험하고, 보고서까지 써야 한다는 생각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자료를 찾아볼 만큼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2002년 어느 날 실험실 일지
용역을 주는 OO기관에서 균주가 배양된 패트리 디쉬를 잔뜩 보내왔다.
수령한 균주는 현장에서 검출된 것들이라 구하기 어려우니, 실험하고 나서 배양하여 보관해 놓으라는 교수님의 지시가 있었다.
포지티브 컨트롤도 준비해 놨고, 패트리 디쉬에서 균주를 따서 PCR을 돌리고, 배양해서 냉동보관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가슴속에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다.
PCR 망하면 어떡하지? 균주 안 자라면 어떡하지? 보고서 거지같이 쓰면 어떡하지? 레퍼런스 찾은 거 욕먹으면 어떡하지?
하루 종일 고민했더니 밥맛도 없다.
“Cooked meat medium을 써.”
교수님이 말씀하셔서 바로 배지를 구해서 균주를 키웠다.
우리 실험실에 현재 클로스트리듐 연구를 하는 학생은 없었지만 시약장에 보니 배지가 있었다. DIFCO 매뉴얼을 보고 배지를 만들면 되니까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잘게 다져놓은 고기 덩어리처럼 생긴 Cooked meat medium을 15 mL짜리 스크류 튜브에 나누어 담고 정량의 물을 넣어 200개의 배지를 만들었다. 이것만 하는데도 반나절이 넘게 걸렸다. 어차피 단순노동이 마음은 편하다.
이제 멸균된 배지를 식혀서 배지에 접종만 하면 된다.
시험법에는 백금이로 찔러 넣기만 하면 된다는데 정말 그렇게 하면 되는 걸까, 깊고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동기 한 명이 옆에 와서 아는 척을 해주었다.
“아, 나 이거 해봤어. 전에 교수님이 잠깐 시키셨어. 그거 그냥 백금이로 따서 배지에 깊이 넣고 풀면 돼.”
“아, 진짜? 이걸 해봤어? 아, 다행이다. 완전 고마워.”
통성혐기성 균이라 배양하기 까다롭지 않을까 겁을 먹었는데 생각보다 배양 방법이 쉬워서 한시름 덜었다 생각했다.
200개의 플레이트를 모두 까서 백금이로 균을 찍어내어 튜브마다 들어있는 고깃덩어리 깊숙이 찔러 넣고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새벽
9시에 출근하면 되지만 나는 6시에 일어나 7시 전에 실험실에 도착했다. 얘들이 잘 자랐는지 궁금해서 잠을 더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각각의 튜브에서 물속에 가라앉아있던 고깃덩어리가 모두 튜브 중간까지 올라와 공중 부양해 있는 것이었다.
바닥에 고여있는 물이 탁한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봐서는 균이 자란 것 같기는 한데 고깃 덩어리들이 물속에 담겨있지 않고 튜브 중앙에 끼어있는 모습이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바로 동기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봤다.
“이거 왜 이래? 얘네 왜 공중부양했어? 니가 할 때도 이랬어?”
“아~ 그거. 그게 그렇더라. 그래서 나는 그거 백금이로 다 눌러서 물에 박아 넣었어.”
“어? 2백 개가 거의 다 올라와 있는데 이걸 다 쑤셔 넣는다고?”
“어... 많긴 많네... 아무튼 잘 자랄걸?
잘 자랄걸? 잘 자랄걸? 어제 그 당당하던 놈이 이제 와서 이게 할 소리야?
그걸 튜브마다 다 쑤셔 넣을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도 했고, 솔직히 얘를 믿는 게 맞는 것인가 싶었다.
만약 이것들이 다 잘못 키워진 거라면 기관에서 받은 임상균을 모두 날려 먹은 건데, 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속을 바짝 태우고 있자니 9시가 넘었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교수님 방문을 두드렸다.
“교수님, 어제 접종한 클로스트리듐이요. 오늘 보니까 배지 덩어리들이 다 튜브 중간까지 올라와 있던데요. 어떡하죠?”
“어, 그거 원래 그런 거야. 개스가 생성돼서 그래. 잘 자란 거야.”
“아... 정말요? 그런데 안 올라오고 그냥 가라앉아 있는 것도 있긴 있는데요.”
“가라앉아 있어도 혼탁하면 자란 거야. 안 자란 건 할 수 없지뭐.”
“네, 네. 안 자란 거 몇 개 안돼요. 그냥 실험하겠습니다.
곧바로 동기에게 달려가 등짝을 한 대 때렸다.
“원래 이런 거래! 원래 이런 거!”
“그으~래? 흐흐흐흐. 나는 그거 교수님 몰래 다 쑤셔 넣었는데. 그래도 뭐 다 자라서 실험 잘 되더라.”
그때 교수님과 조금만 더 친했더라면 안달복달했던 마음을 웃으며 털어놓았을 텐데요. 1년 차 나부랭이는 안도의 한숨을 최대한 작게 쉬면서, 애써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며, 교수님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매뉴얼과 문헌만 보고 실험을 잘 해냈다면 좋았겠지만 실험 경험이 많지 않던 저는 그런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그때도 BRIC 사이트가 발달해 있었다면 선배들에게 조언도 얻었을 텐데 지금처럼 풍성한 실험 Q&A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한 두 개 키워서 잘 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날 전부 해보면 될 것을 왜 한 번에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마음고생을 했는지 참 꽉 막힌 학생이었다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 실험은 요리와 같습니다.
정밀한 조작을 하지 않으면 결과가 틀어질 때도 있고, 가끔은 대강 해치워도 정답이 나와버려서 자신이 잘못한 것인지를 무덤까지도 모른 채로 가지고 가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아주 작은 오차범위 안에서 임계점을 넘나들어, 분명히 동일하게 했는데 매번 다른 결과물이 나와 울화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요. 더구나 처음 하는 실험은 긴장감도 높고 잔뜩 위축되어 더 많은 삽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본의 아니게 실험의 정밀도와 정확도도 높아지고, 의외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얻게 되고, 어쩌다 삽질 끝에 대 발견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실험실 생활을 시작하시는 분들, 처음 하는 실험 때문에 마음고생하시는 분들, 매번 하는 일인데도 잘 안 풀려서 골머리를 썩고 계시는 분들,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닐 것을 알고 계시죠?
오늘도 용기를 가지고 건승하십시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오류 신고하기]
실험실은 황량하고 지루한 곳 같지만 역동적인 매일이 담겨있는 곳이다. 모든 연구원들에게는 실험실에서의 추억이 있다. 즐거웠던 기억, 지긋지긋했던 기억, 성취감에 기뻤던 기억, 그리고 가장 많은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는 삽질의 기억. 그런 나와 내 주변의 얘기들을 나눠보려고 한다. 모두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니까, 과학도들도 잠시 바쁜 손을 놓고, 조금 감성적인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다른 연재기사 보기
전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