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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적인 연구원이라도 괜찮습니다] 내 손안의 피펫 _ 늘 처음은 있다.
Bio통신원(세균맨)
“누가 피펫 또 안 풀어놨네!”
누군가 피펫을 다 풀어놓지 않고 거치대에 걸어놨나 봅니다. 이 부분에 민감한 동료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피펫을 풀고 있습니다. 누가 그랬는지 본인도 잘 모를 겁니다. 습관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급하게 실험을 마무리하다가 깜빡했을 수도 있고요.
너무 익숙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사용하는 도구죠.
피펫,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시나요?
피펫 다루는 실험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피펫의 사용기간과 각자의 실험 경력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실험실에 첫 출근했던 날이 피펫을 사용해 본 첫날이었습니다.
2002년 1월 어느 날의 실험일지
대학원 실험실에 처음으로 출근한 날이다.
조그만 사무실에 내 자리를 배정받고, 실험을 가르쳐줄 사수도 지정받았다. 사수는 석사 2년 차 선배인데 나와 동갑내기이다. 내가 휴학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말은 놓기로 했다.
실험실을 둘러보며 다양한 실험장비들을 안내받았는데 뭐가 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내가 다뤄야 한다는 것이 조금 두렵다.
사수는 첫날이니 피펫이나 한번 잡아보자면서 피펫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팁을 꽂고, 푸쉬 버튼 (플런저 버튼)을 눌러 팁 안의 공기를 빼고, 팁 끝을 물에 담근 후에 버튼에서 손을 떼면 팁 안으로 물이 들어간다. 비어 있는 비커 쪽으로 피펫을 이동하여 다시 푸쉬 버튼을 누르면 팁 안의 물이 비커 안으로 들어간다.
사수가 시범을 한번 보이고, 피펫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피펫은 1mL 용량이었다.
팁을 쿵쿵 두드려 꽂고 나서 공기를 빼고 비커에 담긴 물 안으로 피펫팁 끝을 담갔다.
푸쉬 버튼에서 엄지손가락을 떼는 순간이었다. 팁 안의 물이 소용돌이쳤다. 너무 갑자기 손을 떼 버린 탓에 팁 속의 물이 피펫의 끝부분까지 튀어 올라왔다.
“어~ 손을 조금 살살 띠어야 돼. 작은 용량은 괜찮은데 1mL짜리는 너무 급하게 하면 물이 피펫 안으로 들어가. 그럼 피펫 고장 나.”
“아! 미안 미안..”
한 번 실수를 하고 보니 안 그래도 로봇 같던 움직임이 더 딱딱해졌다. 뭘 이런 걸 연습을 하나 싶었는데 연필을 처음 쥐는 유치원생처럼 어설펐다.
“오늘은 그냥 한번 해보는 거고, 매일 할 거니까 금방 익숙해질 거야.”
피펫을 잠깐 다뤄봤을 뿐인데 그나마 거의 없던 자신감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잘할 수 있을까?“
실험을 좀 하신 분들은 이제 피펫으로 섬세하게 액체량을 조절하는 정도는 안 보고도 가능하시죠? 저의 처음을 떠올려보면 익숙해진 지금은 ‘진화’에 가까운 발전입니다.
피펫팅, 생각보다 까다롭죠?
피펫을 다룰 때는 액체의 물리, 화학적 성질, 담는 용기의 특성, 실험의 목적 등이 고려되어야 하죠.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보면 매번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002년 3월 어느 날의 실험일지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액체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시약이나 시료마다 점도, 농도, 위험도가 모두 다르다. 매일 쓰는 숟가락 같은 도구지만 만만한 게 아니다. 액체가 어떤 용기에 담겨있는지에 따라 피펫 팁을 담그는 깊이와 표면 각도를 달리해야 한다. 또 모든 액체가 용기의 벽을 타도록 분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옮겨 담으려는 용기 안에 이미 들어있는 용액과 피펫 팁 끝이 닿지 않도록 공중에서 분사해야 할 경우도 있고, 용액이 바닥을 치고 튀어 오르지 않도록 흘려 넣는 속도를 조절해야 할 때도 있다.
점도가 좀 높은 액체를 사용할 때는 더 주의해야 한다. 용액을 빨아들인 후 옮겨 담을 용기 벽에 잘 붙여넣지 않으면 끈적이는 용액이 팁의 외부에 들러붙어 버린다. 이럴 땐 팁의 바깥면에 붙은 용량이 안에 들어간 양보다 더 많아 보이는데, 이것 때문에 실험을 망칠까 봐 마음고생은 더해만 간다.
[초순수와 TWEEN80의 차이_ 같은 2마이크로리터를 취하여, 푸쉬 버튼을 눌렀다. 초순수는 동그란 방울을 유지한 채로 팁 끝에 붙어있고, TWEEN80은 팁의 외벽을 타고 올라간다.]
오늘은 TWEEN 80을 1mL 쓰려다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글리세롤이나 TWEEN 80과 같은 끈적이는 용액을 1mL 팁으로 취하려고 하면 점도 때문에 팁 입구에서 막혀버려 빨려 들어오지 않는다. 천천히 빨아들여 보려고 푸쉬 버튼을 누르는 엄지손가락의 힘을 최대한 느리게 풀어도 자기들끼리 강하게 뭉친 용액은 팁의 작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올 생각이 없다. 푸쉬 버튼에서 엄지손가락을 다 떼어냈는데도 버튼이 올라오지 않은 채 눌려있는 것이다.
분통이 터지려던 찰나에 사수가 귀여운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럴 땐 피펫팁 끝을 조금 잘라내면 된단다. 구멍 크기를 키워서 용액이 팁 안으로 원활히 들어오게 해주는 것이다. 어차피 압력으로 빨아들이는 것이니 정량은 된다. 잘라낸 팁 끝을 TWEEN80 시약에 넣고 푸쉬 버튼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빼주니 용액이 쑤욱 올라온다. 가슴속 체증도 쑤욱 내려갔다. 사수는 천재인 것 같다.
참 하찮지만 유용한 방법 아닌가요? 모든 실험실에서는 그들이 터득하여 대대로 물려주는 깨알 같은 요령들이 있습니다. 저도 실험을 배우기 시작할 때 배웠던 별것 아닌 그 자잘한 방법들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요긴하게 잘 쓰고 있습니다.
나날이 노련해지셨습니다.
아마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마이크로의 세계에서 눈알이 빠지게 튜브를 노려보다가 점점 삽질의 나락으로 빠지는 이 과정을 말입니다.
야구를 처음 배울 때는 주먹만 한 공을 어떻게 배트로 맞추나 싶은데, 훈련을 하다 보면 공이 점점 크게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 조작은커녕 잘 보이지도 않던 튜브 속의 물방울은 실험이 거듭될수록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멀찌감치서도 미세한 조작을 가능하게 합니다.
2002년 가을 어느 날의 실험일지
처음 프라이머 익스텐션 (Primer extention)이라는 실험을 배웠다.
샘플이 준비되자, 사수는 건물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구석진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프라이머 익스텐션 장비가 있는 미니 공동 기기실 같은 곳이었다.
동위원소를 사용할 때는 방사능에 노출될 수 있으니 주의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먼 미래에 암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발걸음이 무거웠다.
구석방에 도착하여 준비해 간 샘플과 시약 몇 가지, 그리고 방사성 동위원소를 PCR 튜브에 넣었다. 이때 방사능 노출을 막기 위한 프로텍션 쉴드 (Radiation protection shield)를 앞에 두고 작업을 해야 한다.
[출처] Carl Roth 社 홈페이지
Radiation protection shield SEKUROKA bent
https://www.carlroth.com/com/en/radiation-safety-shields/radiation-protection-shield-sekuroka-bent/p/9764.1?emcs0=12&emcs1=Produktdetailseite&emcs2=null&emcs3=334157
먼저, 실험대 앞에 앉아 가슴 앞에 둔 쉴드를 끌어안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양손을 쉴드 안쪽으로 넣고 방사성 물질과 내 몸 사이에 쉴드를 두고 실험을 한다.
이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최소용량 튜브에 2마이크로리터 정도의 반응 액체를 여러 종류 넣는 과정이다. 안 그래도 쉽지 않은데, 아크릴판을 사이에 두고 넣으려니 잘 보이지도 않고 손놀림도 둔했다.
“시약 2마이크로리터를 점 하나라고 생각하고 튜브에 점을 붙여. 그리고 두 번째 시약은 그 옆에 붙이고. 헷갈리지 않게 튜브마다 같은 위치에 붙여. 나중에 스핀다운하면 다 모여”
[사진] PCR 튜브의 같은 위치에 붙여놓은 시약 방울, 모든 시약을 다 넣은 후 스핀다운하여 모은다.
단순한데 명확하다. 튜브에 액체를 넣으려면 튜브를 바짝 눈앞에 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조금 떨어져서도 보일 수 있도록 넓은 벽면에 액체 방울을 붙여넣는 것이다. 포인트는 헷갈리지 않도록 시약 방울 순서를 꼭 지켜서 넣는 것이다.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피펫팅 정도는 이제 한쪽 눈을 감고 할 만큼 익숙하시죠? 매일 반복되는 일들이 그저 그런 일상 같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숙달된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실험의 품질을 좌우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이 쓰는 것이고, 어느 정도는 손을 타기도 하는 물건이다 보니 피펫 사용 습관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피펫을 잘 풀어놓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면 피펫이 망가진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고, 천성이 태평하여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습니다. 1mL짜리 피펫이 0.8mL로만 맞춰져 있어도 발끈하는 사람들은 이런 천하 태평한 사람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을 거고요. 어느 조직이나 그렇죠?
하지만 실험의 품질을 생각한다면 이런 것들은 꼭 지켜져야 하죠.
피펫을 잘 다루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실험 결과는 분명 차이가 있으니까요. vortexing을 얼마나 균일하게 하는지, 원심분리 후 튜브를 얼마나 조심스럽게 이동시키는지, 피펫의 버튼을 놓을 때 얼마나 진동 없이 힘을 빼는지, 사소한 습관들은 분명히 실험의 품질에 영향을 미칩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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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황량하고 지루한 곳 같지만 역동적인 매일이 담겨있는 곳이다. 모든 연구원들에게는 실험실에서의 추억이 있다. 즐거웠던 기억, 지긋지긋했던 기억, 성취감에 기뻤던 기억, 그리고 가장 많은 기억의 자리를 차지하는 삽질의 기억. 그런 나와 내 주변의 얘기들을 나눠보려고 한다. 모두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만 글을 읽는 것은 아니니까, 과학도들도 잠시 바쁜 손을 놓고, 조금 감성적인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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