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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위해 남용한 ‘화학’…화려한 효과와 부작용 남겨
Bio통신원(김재호 기자)
‘기근·질병’과 전쟁. 인류가 헤어나지 못하는 이 세 가지 굴레에서 화학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예상할 수 없었던 부작용이 발생했다. 아마도 대부분의 과학이 그런 게 아닐까.
인류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진균제를 개발했다. 반면 흑사병과 말라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농약과 DDT를 사용했다. 그 원인인 쥐벼룩을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인류는 스스로와 자연을 파괴했다. 최근 출판사 까치에서 번역돼 출간된 『화려한 화학의 시대』(프랭크 A 폰 히펠 지음, 이덕환 옮김)는 화학으로 인해 변화된 자연을 얘기한다.
“새로운 화학물질의 합성에 꼭 필요했던 과학은 대부분 19세기와 20세기의 제국주의적 야망이라는 문화적 맥락에서 등장했다.”(13쪽)
『화려한 화학의 시대』 저자 프랭크 A. 폰 히펠은 노던애리조나대 환경독성학과 교수로 전 세계에서 환경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화학자들의 이야기를 여러 관점과 사실들에 기반해 종합적으로 엮어냈다. 이 책을 번역한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이론화학과 과학커뮤니케이션 국내 대표적 전문가이다. 번역 역시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다.
좋은 화학자의 의도, 나쁜 결과로 종종 이어져
서문에 나오는 토머스 미즐리 주니어(1889~1944) 이야기는 화학자의 노력과 결과가 얼마나 상충되는지 보여준다. 유연 휘발유는 납을 첨가제로 쓴 휘발유로 미즐리가 개발했다. 하지만 그 자신 납에 중독됐고, 생산 현장에 있던 작업자들은 죽거나 정신병에 걸렸다. 그런데 화학회사들은 효율성 때문에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전 세계 운전자들은 25조 리터의 유연 휘발유를 사용했다. 배기구에서 나오는 납 오염 물질로 인해 신경학적 부작용이 심각했다.
미즐리는 유연 휘발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레온’을 발명했다. 프레온은 탄화수소에 플루오린을 결합시킨 최초의 CFC(클로로플루오로탄소)인 CCI2F2(다이클로로다이플루오로메테인)이었다. 프레온 가스는 성층권의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현재는 생산이 중단돼 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화학자 미즐리가 1920년대 쓰던 냉매가 독성이 강하고 폭발을 일으켜 새로운 냉매를 개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그의 순수한 의도가 끔찍한 결과를 낳기도 한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1868∼1934)가 폭약의 원료를 만들기 위해 개발했던 암모니아 생산기술은 화학 비료를 제조하는 데 핵심기술이며, 녹색 혁명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었다.
『화려한 화학의 시대』는 기원전 2700년 일, 1845년부터 1964년까지의 기간을 살펴본다. 좀 더 정확히는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에서부터 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 출간으로 엄청난 논란이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이다.
『화려한 화학의 시대』의 저자인 프랭크 A. 폰 히펠은 노던애리조나대 환경독성학과 교수다. 그는 기근, 감염병, 전쟁에서 화학의 역할과 부작용을 지적했다. 사진=노던애리조나대
미신과 사실 사이에 화학이 있었다
이 책의 제1부는 ‘기근’이다. 1840년대부터 시작된 기근과 감자 잎마름병으로 인해 아일랜드 주민 10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또 다른 100만 명은 이민을 선택했다. 감자 잎마름병은 ‘감자 역병’으로도 불리며, 감자의 줄기와 잎이 모두 썩으면서 말라죽게 만드는 병이다. 하지만 그 당시 전문가들은 기체에 의해서 감자 잎마름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매개체를 고민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덕환 명예교수는 책에서 자연발생설과 생물속생설로 그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부족한 과학적 상식으로 인해 그때 사람들은 생물이 무기물로부터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비롯됐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루이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은 생물속생설로 대체된다. 생물속생설은 생물이 탄생하기 위해선 부모가 존재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을 ‘키메라(서로 다른 유전자형이 한 개체에 존재하는 현상)’라고 치부했다. 파스퇴르(1822~1895)와 비슷한 연구를 했던 로베르트 코흐(1843∼1910)에 의해 “감염성 질병의 미생물 유래설”이 정립됐다. 1905년, 코흐는 미생물 유래설의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 두 명의 화학자들은 걸출한 제자들을 길렀다. 그들은 제2부에 등장하는 기타사토 시바사부로(1853~1931)와 알렉상드르 예르생(1863~1943)이다.
결국 1853년 독일의 안톤 데 바리(1831~1888)가 “곰팡이는 질병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걸 밝혀낸다. 20여 년이 흘러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균류학자인 피에르 마리 알렉시 밀라르데에 의해 최초의 효과적인 항진균제가 개발됐다. 이처럼 화학은 기근과 감염성을 극복하는 데 일조했다.
20세기 들어서 밝혀낸 흑사병의 원인
제2부는 ‘감염성 열병’이다. 『화려한 화학의 시대』에는 △습지열(기원전 2700∼기원후 1902) △흑색 구토열(1793∼1953) △감옥열(1489∼1958) △흑사병(541∼1922)이 등장한다.
흑사병(黑死病)은 유스티니아누스의 6세기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를 초래할 만큼 무서운 질병이었다. 흑사병은 쥐에 기생하고 있는 벼룩이 전파시키는 흑사병 균으로 나타나는 급성 열병 감염병이다. 그 종류에는 림프절 흑사병, 패혈성 흑사병, 폐렴성 흑사병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흑사병을 하느님의 분노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원인을 제대로 모르니 처방이 잘 될 리 없었다. 흑사병은 14세기 유럽에서만 7천500만~2억 명의 사망자를 냈다.
“1890년대의 흑사병 대유행은 현대적 도로를 따라서 빠르게 확산되면서 1,500만 명의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세기가 바뀌면서 대유행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어 아프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남북 아메리카를 포함한 인간이 거주하는 모든 대륙을 덮쳤다.”(161쪽)
흑사병의 병원체인 예르시니아 페티스. 이미지=위키피디아
흑사병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1894년, 기타사토(로베르트 코흐의 제자)와 예르생(파스퇴르의 제자)이 홍콩에 도착했다. 1860년대 중국 원난성에 흑사병이 발생했다. 그 후 홍콩으로까지 흑사병이 전염됐다. 이 둘은 흑사병의 원인을 서로 먼저 알아내기 위해 경쟁했다. 그 사이 있었던 여러 의사들과 관계자들 간 암투, 심지어 학술지들의 편견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과학적 발견을 위한 경쟁은 제국주의적 속내가 깔려 있던 셈이다. 하지만 결국, 흑사병 병원체(예르시니아 페티스, Yesrsinia pestis)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예르생이 발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병원체를 발견한 건 다행이었지만, 과연 감염 매개체가 무엇인지는 골치 덩어리였다. 여러 가설들이 난무한 가운데, 프랑스의 의사 폴-루이 시몽드(1858~1947)가 쥐벼룩이 그 대상임을 우여곡절 끝에 밝혀냈다. “시몽드는 쥐가 벼룩이 문 상처를 긁는 과정에서 간균이 들어 있는 벼룩 배설물에 의해서 림프절 흑사병에 감염된다는 가설을 내놓았다.” 특히 흑사병의 병원체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는 팬데믹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이 세균은 쥐벼룩의 배설물 속에서 5주일 동안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쥐가 된다. 이 때문에 농약이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시몬드는 예방을 위해 “쥐, 사람, 기생충의 세 요소를 목표로 해야만 한다”라고 강조했다. 쥐약이라고 불리는 ‘살서제(rodenticide)’와 ‘살충제(insecticide)’의 등장이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합성살충제 DDT, 결국 살생제가 되다
제3부 ‘전쟁’, 제4부 ‘생태계’에서 주목되는 건 바로 DDT(다이클로로다이페닐트라이콜로로에테인)다. 1940년∼1941년 미군과 일본군이 사이판에서 싸우는 가운데, 적군만큼 무서운 건 말라리아 같은 열대병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남태평양에서 미국 병사 50만 명이 말라리아에 감염됐다. 말라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키니네(신코나 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키니알칼로이드)나 아타브린(합성치료제의 상품명) 등을 사용했다. 하지만 말라리아에는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다른 곤충들에는 효과가 없었다.
1943년, 연합군은 남태평양, 유럽, 북아프리카 대부분에 DDT를 사용했다. DDT는 합성살충제로 강력한 효과를 나타냈다. 파울 밀러(1899~1965)가 바로 DDT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물론 그전에 DDT를 합성해낸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오트마 자이들러(1850~1911)가 있었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1948년, 밀러는 DDT의 살충효과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뮐러는 이상적인 살충제에 필요한 7가지 조건 중 세 번째로 “포유류나 식물에 대한 저독성 또는 무독성”을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DDT는 급속도로 확산됐다. “1943년 12월 26일부터 2개월 동안 나폴리의 40개 이(louse) 퇴치소의 부대원들은 하루 5만 명의 속도로 거의 200만 명에게 DDT 분말을 뿌렸다.” 전쟁에서 입증된 효과로 인해 DDT는 이제 가정과 골목에까지 뿌려지기 시작했다. DDT의 대량생산으로 인해 경제적 호황이 이어졌고 일자리가 늘어났다. 모든 게 좋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DDT로 인한 부작용과 내성이 점점 늘어났다. 민간에서 DDT 사용 후 2년 만에 사망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살충제에 대한 곤충의 내성 문제는 1914년부터 이미 제시된 바 있다. 집파리, 모기, 벼룩, 빈대, 바퀴벌레가 DDT에 내성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학회사들은 더욱 다양한 살충제를 계속 만들어야 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실제로 DDT에 대한 내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유기인산제인 ‘말라티온’을, 곤충들이 유기인산제에 내성을 갖자 이번엔 새로운 살충제인 ‘카바메이트’ 같은 걸 만들었다.
“화학 전쟁은 결코 이길 수 없고, 모든 생명이 격렬한 십자포화에 갇혀버릴 뿐이다.”_레이철 카슨, 『침묵의 봄』(1962년)
미국만 보더라도, 1962년 시장에 5만 4,000종의 농약 제조에 쓰이는 500여 종의 화합물을 상품으로 내놓았다. 이 해에만 3억 5,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살충제가 사용됐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철 카슨(1907∼1964)이 쓴 『침묵의 봄』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현재까지 환경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래 이 책의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건 ‘지구에 저항하는 인간’이었다. 레이철 카슨의 글들은 책으로 나오기 전에 <뉴요커>에 미리 실리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침묵의 봄』의 초판 표지. 이 책은 지금도 환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적 태도와 검증이 이 책의 묘미다. 이미지=위키피디아
『침묵의 봄』은 각주가 600개나 달렸을 정도로 철저한 과학적 검증을 해냈다. 거대 화학회사와 로비그룹에 맞서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레이철 카슨은 DDT의 오남용을 지적했지 전면 금지를 주장한 게 아니다. 레이철 카슨은 살충제가 살생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려하고 고발했다. 결국, 레이철 카슨의 고발로 DDT 사용은 1970년대 사용 중지된다.
『화려한 화학의 시대』 번역자인 이덕환 명예교수는 역자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현대 과학으로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던 시절의 병충해와 감염병은 인간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였다. 농경과 목축에 의한 환경 파괴의 결과로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고대 문명도 있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화학’을 핵심으로 한 산업혁명이 발생했다. 20세기에 이르러 화학과 농기계는 식량 생산성을 10배 이상 개선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을 우리가 현재 겪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다. 이덕환 명예교수는 “현대 사회의 문제는 ‘기술’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책임은 위험하고 더러울 수 있는 기술을 함부로 사용한 ‘인간’에게 물어야 한다”라며 “기술이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포기해야 한다는 인식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화려한 화학의 시대』는 저자 폰 히펠이 8년 만에 탈고한 책이다. 책 자체가 과학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정도로 충실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니, 현 코로나19 상황이 겹쳐진다. 그 안에서 어떠한 화학적 발견과 대응 그리고 부작용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화학자들이 오늘도 병원체와 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사실만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참고문헌>
1. 『화려한 화학의 시대』(프랭크 A 폰 히펠 지음, 이덕환 옮김, 까치, 2021.11.17)
2. https://ko.wikipedia.org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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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지금은 과학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환경과 생태의 차원에서 과학철학에 대한 고민이 많고, 영화와 연극, 음악을 좋아한다. <동아일보>에 '과학에세이', <포스코투데이>에 '과학의 발견'을 연재한 바 있으며, '학술문화연구소(http://blog.naver.com/acacullab)'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자유롭게 김광석 이야기》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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