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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R 돌려놓고 한 장] 테드 창 - 숨
Bio통신원(이지아)
이번에 소개할 책은 테드 창의 <숨>입니다. 테드 창은 뛰어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그리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 현시대 SF 작가 중 손에 꼽히는 작가입니다. 해마다 세계 SF 작품 중 최고를 선정하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각각 네 번 수상했습니다 1. 2016년에는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영화 <컨택트>(실제 제목은 arrival이나 국내에서는 이렇게 개봉했죠)가 나오며 휴고상이 하나 더 늘었죠.
하드 SF 작가이다 보니 네이처에 단편 소설을 싣기도 했습니다 2.
테드 창은 SF 장르에 입문하기에도 좋은 작가입니다. 작품 수가 많지 않은데 모두 중·단편이라 읽는 데 부담이 없습니다. 테드 창의 작품집은 세상에 딱 두 권 있습니다. <숨>은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이어 두 번째로 나온 작품집입니다. <숨>에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브릭 여러분들께는 <숨>의 마지막 이야기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연구를 한참 하는 분들, 또는 연구자라는 진로를 고민하는 분들께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이후에도 맞는 선택이었는지 번민하고, 뛰어난 동료를 보며 실력과 자격을 끊임없이 묻는 모든 이들에 게요.
표지 출처 알라딘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는 ‘프리즘’이라는 기계가 나옵니다. 프리즘은 가지 않은 길을 간 자신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프리즘은 양자역학적 원리로 작동합니다. 테드 창은 하드 SF 작가라서, 작품에 나오는 양자역학은 SF영화에서 쓰이는 ‘이해할 수 없는 초능력’의 비밀 원리가 아니라 의미 그대로의 양자역학입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생각하면 쉽습니다. 상자 속 고양이는 50%의 확률에 따라 죽거나 살아있는데, 관측 전에는 두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을 통해 우주가 갈라진다고 하죠. 프리즘은 갈라진 우주와의 통신 장치입니다.
프리즘은 '고양이가 살아있는 우주'와 '고양이가 죽은 우주'를 연결하는 통신 매체입니다 3.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석박통합 3년차. 랩에서 다 같이 맞춘 티셔츠는 목이 늘어난 지 오래입니다. 학과에서 40시간 유연근무제를 한댔지만, 수요일 저녁이면 40시간을 다 채우니 의미가 없습니다. 실험이 늦게 끝난 밤 자취방에 들어와 프리즘을 켜봅니다. 프리즘 화면에는 평행 우주의 3년차 대리인 된 ‘나’가 있습니다. ‘나’는 성과급으로 차를 샀다고 자랑하면서도, 인생의 즐거움을 소비에서 찾는 자신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연구자 나를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고 부러워했습니다. 특히 비슷한 처지였다가 서로 다른 길로 갈라진 친구들의 이야기는 감정의 깊은 곳을 건드립니다. 삶의 어느 순간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눈앞에 보이는 친구의 모습이 내가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프리즘이 발명된 세상에서는 비교 대상이 다른 우주의 ‘나’가 됩니다. '나'를 보며 흔들리는 감정은 가장 가까운 친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연구를 택하지 않은 내가 지금의 나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행복이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현실에서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요.
©Eva Bee 20154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는 그 어떤 우주에서도 연구를 하고 있을 사람도 계실 겁니다. 연구만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에게 삶에서 가지 않은 길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삶에는 의지로 선택할 수 없는 갈래도 존재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간발의 차이가 눈덩이처럼 굴러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망하고 접었던 프로젝트가 성공한 우주’에서 노벨상 수상을 앞둔 자신을 만날 수도 있고, ‘하는 실험마다 망한 우주’에서 우울해하는 자신을 위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마다 나의 모습을 부러워하거나 안도하는 일은 무용할뿐더러 무의미합니다. 나는 내 우주를 벗어날 수 없고, 이 우주에서 나의 삶은 한 번뿐이기 때문입니다.
‘갈라진 우주를 살아가는 나를 만날 수 있다면?’라는 질문은 수많은 세상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신과, 그럼에도 나이기에 변하지 않을 요소를 상상하게 합니다. 상상의 끝에서 우리는 과거로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고, 앞으로도 정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선택과 세상의 운명에 의해 수없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로 남을 거예요.
작품에 나오는 프리즘은 우주 사이의 정보를 교환하는 장치입니다. 프리즘 너머 세상이 아무리 부러워도 그 세계로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품 속 세계와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머릿속 상상만으로 프리즘을 작동시킬 수 있거든요. 실험에 실패했을 때 생각해보세요. 이 우주에서는 실패했지만, 수많은 다른 우주에서는 성공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이번 실패는 우연이며 실수입니다. 우리가 무능한 것이 아닙니다.
줄거리를 말하고 싶지 않아 소재에 대해서만 글을 썼지만, 작품은 제가 어설프게 쓴 사고 실험보다 훨씬 재미있고 실감 나고 따뜻합니다. ‘변수에 따라 달라지는 삶과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라는 주제는 <숨>의 첫 수록작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도 그렇고, 전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이야기에서도 다양하게 반복되었습니다. 한국어판 <숨>의 뒷장에는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쓰여 있습니다. 테드 창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그리하여 수요일 저녁에 문득, 내가 왜 40시간 넘게 일을 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면, 목요일에는 연구실을 잠깐 나와 테드 창의 소설을 읽어보세요. 소설이 답을 주지는 않겠지만, 상상 너머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한다는 사실은 알게 되니까요.
각주
1. 휴고 상은 세계 SF 대회(http://www.worldcon.org/)의 회원 수천 명이 선정하고, 네뷸러 상은 미국 SFF 작가 협회 (https://www.sfwa.org/)의 전문가 집단이 선정하는 상입니다. 둘 다 SF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지만 성격이 다릅니다. 말하자면 테드 창은 대중과 평론가를 한 번에 사로잡은 셈입니다.
2. 책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단편만이라도 읽어보세요. https://www.nature.com/articles/43615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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