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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책 편지] 대항해시대 연구편 (극지연구소 제작)
Bio통신원(예린)
갖춰진 실험실과 구축된 장비를 이용해서 대부분의 실험을 진행하는 분야를 전공했기에, 현장을 찾아다니며 실험하는 분야는 제게 동경과 흥미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위 ‘필드 트립’을 간다고 하는 분야 이야기지요. 실험실 밖에서 채집하는 시료들, 자연으로 떠나는 출장, 뭔가 소풍을 나가는 듯한 느낌이잖아요. (해당 분야 종사자들은 매 출장마다 피가 마르는 느낌이겠지만…….) 분자생물학을 기반으로 한 연구를 해서 미시적인 세계에 익숙한 제게, 거시적인 세상을 탐구하는 이들의 관점도 흥미롭고요. 그래서인지 현장 연구진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에 관심이 가곤 했습니다.
배에 타서 바다를 바라본 적 있으신가요? 가까운 섬으로 건너갈 때에도 망망대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바다는 넓고 넓었습니다. 정말 육지와 보이지 않는 대양의 풍경은 어떨까, 그 곳에서의 수평선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남극이 부른다’ 는 이런 망망대해를 연구하는 해양학자인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25년 간 총 25회의 해양 탐사에 참여하며 동태평양, 서태평양, 남태평양, 대서양을 거쳐 남극해까지도 탐사했다는 저자의 바다와 연구 이야기는 어떤 맛일까요?
작가의 첫 탐사지는 태평양입니다. 첫 탐사를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도 특별한데, 작가가 탐사 주관 기관이던 해양연 소속이 아니라 타교 전일제 대학원생이었다는 점도 특별합니다. 용감한 대학원생이었던 작가는 전일제 대학원을 파트타임으로 바꾸고 해양연구소에 비정규직으로 출근, 해양에 있는 암석이나 광물 분석을 수행하러 모험을 떠납니다. 광물학 전공을 살려 태평양에 있는 망간 단괴를 채취하는 것이 첫 임무였는데요.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바다에 던져 넣은 Free Fall Grap (FFG) 장치가 해저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바닥에 닿으면, 그물 달린 집게가 작동해 망간단괴를 잡고 표층으로 다시 올라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위에서 조종할 수 없는 인형뽑기 집게같은 느낌일까요? 위에 연결된 장치가 없음에도 추와 부표를 이용해 바닥에 닿으면 장치가자동으로 추를 분리하고 다시 해상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원리 또한 기발합니다. 이렇게 채취한 망간단괴를 곱게 빻아 분석하는 것에서 작가의 해양 연구 인생이 시작됩니다.
작가가 소개하는 연구 얘기들은 제가 하는 연구와는 스케일도, 방식도, 연구 환경도 달라서 따져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위 소개한 FFG 말고도 심해 퇴적물을 채취할 수 있는 박스 코어, 해저 암석을 그물로 끌어 채취하는 드레지, 해령의 유리질 표면을 강하게 때려 파편을 왁스에 묻혀서 올리는 록 코어……. 랩에서 개발되고 특허가 걸려 있어 따로 구입이나 제작도 불가능한 실험 장비를 대여해 이용한 이야기는 플랫폼 개발 및 구축 역시 지식 축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줍니다.
Various sampling equipments1)
연구를 위해 전세계의 바다를 누벼야 한다면, 그 이동 수단 역시 연구장비로 쳐줘야 하지 않을까요? 많이들 들어보셨을 쇄빙선 아라온호, 전투비행기, 고무 보트, 일반 비행기나 여객선 (이지만 자연의 섭리에 일정을 맞춰야 하는) 까지 타고 박 박사는 전세계를 누빕니다. 가히 80일간의 세계일주 연구 버전이라 할 만 하죠. 그 여정 속에서 만나는 다른 나라의 연구자들과, 연구와 관련된 에피소드 역시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다른 나라의 탐사선을 타고 연구를 수행하며 느끼는 문화적 차이와 각국 장비 및 연구 방식의 차이, 우리가 배워야 될 부분들과 우리가 잘 하고 있는 부분들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비교군이 없으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죠.), 문화적인 차이 (선내 생활에서의 격식이나 실험 중간중간의 간단한 의식들……. 우리 나라로 치면 큰일을 치르기 전 고사를 지내는 느낌일까요?), 그리운 음식까지도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이들 역시 귀한 친구입니다. 좋은 연구자들과 같이 일하고, 때로는 내 분야의 전설과 같은 대가들을 만나 충고를 듣고, 마음을 다질 기회가 있다는 건 연구직이어서 얻을 수 있는 감사한 기회라고 생각하는데요. 함께 배 위에서 먹고 자며 같이 일을 한다면 그 유대감은 오죽할까요. 작가가 만났던 해당 분야 대가들과의 과학적 교감이나 “Science is action!”, “나쁜 문제들이란 없다네, 나쁜 과학자들이 있을 뿐” 같은 말을 들었을 상황을 떠올려보면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연구를 하다 지칠 때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도록 마음 속에 갈무리 해 두고픈 말들입니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는 연구자의 삶에는 미지의 대륙으로 남아있는 남극 얘기 역시 빠질 수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 눈으로 뒤덮인 세계를 생각하며, 남극 탐사를 가기 위해 극지연구소에 취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지 고민해보기도 했었는데요. 많은 이들이 남극에서의 생활을 궁금해했기 때문인지, 책의 제목 역시 ‘남극이 부른다’ 입니다. 아마 저 같은 막연한 감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까요? 작가는 챕터 시작부터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남극에 대해 신기해하며 물을 때마다 늘 답변하기가 궁색하다’고 말합니다. 남극은 탐험이나 연구 대상이라기보다는 일을 해나가는데 있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조건이기에, 질문 뒤에 있는 부러움에 부응하는 것도, 남극에 화제가 집중되는 거도 꺼려진다는 답은 현실에서 남극으로 탐사를 떠나야 하는 과학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일 테지요. 이 불편함은 내가 부딪혔던 현실과 일반인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상상 세계 속에 존재하는 괴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작가의 가설이 명쾌합니다. 남극에 닿기 위한 지난한 여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더욱더요. 남극 대륙 하면 펭귄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만, 해양학자인 작가는 심해의 생물들을 채취하고 동정해 바다 속 세상을 넓혀 나갑니다. 해저에 박스를 내려 신종 심해 생물을 채취한다는 과정 역시 분자생물학자인 제게는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책 중간에 삽입된, 신종 생물들을 기록한 사진에 자 대신 놓인 모나미 네임펜이 눈에 익어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각종enzyme이나 DNA도 이런 탐사 과정들을 거쳐서 우리 곁에 온 것이겠지요.
모든 연구가 선행 연구 결과와 지금 얻는 결과를 조합해서 유연하게 써 내려가야 하는 이야기지만, 작가가 들려주는 해저 탐사기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절대적 변인인 ‘날씨’ 와 ‘해황’ 이 포함되어 있어 더 역동적으로 보입니다. 바다 위에서 한정된 시간 동안 어떻게든 필요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해황에 맞춰 그때그때 경로와 실험 계획을 바꿔야 하는 것도 힘든데, 바다 밖에서의 일도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현지 대리점 직원들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인생관 덕에 선적이 위태로웠던 실험 장비, 7일간의 탐사를 위한 지구 반 바퀴 여정, 뉴질랜드 대지진 때문에 출항조차 하지 못할 뻔 한 중앙 해령으로의 첫 탐사 등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아, 연구는 원래 역동적이고 연구자는 매일 가슴 떨어지는 일들을 겪게 되는 것이 숙명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를 실제로 만나 연구 이야기를 들어보면 쌓인 내공이 보통이 아니실 것 같지요. 이 여정의 대부분에 아라온호가 함께 합니다. 아라온호는 현재 한국 유일의 쇄빙선으로, 연구 수행, 물자 조달 뿐 아니라 극지 좌초 어선 구조 임무까지 수행하는 다목적 쇄빙선입니다 (2021년 현재 제 2호 쇄빙선 건조 예정). 조선 가격도 유지도 큰 비용이 드는 부담스러운 과제였지만, 이 쇄빙선으로 작가 박숭현 박사는 남극 중앙 해령을 개척해 빙하기-간빙기 순환 증거에 대한 논문을 2015년 Science에 게재하고2), ‘질란디아-남극’맨틀로 명명된 새로운 기원의 맨틀을 발견해 발표합니다. 작가의 말마따나, 해양 연구도, 남극 연구도 늘 후발 주자였던 대한민국이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발걸음이겠지요. (사이언스라는 이름을 그냥 넘길 수 없는 저는 과학계의 속물입니다.)
조금 색다른 세계 여행기를 읽고 싶거나, 깊이 있는 연구 내용을 편안히 접해 보고 싶다면, 혹은 다른 사람의 연구 인생에 흥미가 있지만 지루한 건 싫다면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내용이 역동적이어서인지, 작가가 좋은 이야기 실력을 갖춰서인지 술술 읽히고, 그러면서도 전문가의 향기가 느껴지는데, 중간중간 끊어 읽어도 무리가 없어 자투리 시간에 머리를 식히기에도 좋으니까요. 무엇보다, 내가 앉아 있는 실험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역동적인 이야기일 거란 생각에 다시 자극받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도 언젠가 이렇게 읽힐 날이 올까요?
Ps1. 아라온호는 고 전재규 대원의 순직 후 남극 연구 환경의 열악한 상황이 널리 알려지고 여론이 조성되어 건조 시기가 예정보다 훨씬 앞당겨진 배이기도 합니다. 고 전재규 대원은 2003년 동료 대원을 구출하려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세종 기지 앞에는 현재 전 대원의 흉상이 남아 연구자들을 숙연하게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Prasad, M.S. (2007). Indian exploration for polymetallic nodules in the Central Indian Ocean.
2) Crowley, J. W., Katz, R. F., Huybers, P., Langmuir, C. H., & Park, S. H. (2015). Glacial cycles drive variations in the production of oceanic crust. Science (New York, N.Y.), 347(6227), 1237–1240. https://doi.org/10.1126/science.126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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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힘을 믿는 연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몸속 도구들이 생명을 만들어내고 삶을 조절하는 것에 매료되어 생명과학 연구의 길을 걷게 됐고,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어 과학커뮤니케이션에 발을 디딘 사람. 우리가 하는 연구의 본질도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이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는, 갓 박사를 단 새내기 연구자가 전하는 연구 활동 중 마음에 울림을 준 이야기와 책에 대해 나누는 감상들. 여러분의 곁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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