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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리의 육아일기] 시행착오
Bio통신원(닥터리)
출처: 픽사베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니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가 펼쳐졌다.
어린이집에서는 잘 먹고, 다치지 않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는데, 입학을 하고 나니 규칙을 잘 지키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단체 생활에서 집단에 폐를 끼치지 않는지, 과제를 성실히 하는지, 모둠 활동 때 친구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지 등이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하나하나 챙겨주던 어린이집의 분위기와는 달리 학교는 선생님이 이끄는 대로 알아서 자신의 상황을 추스르고 따라가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에 잘 적응하고, 학교 수업도 척척 따라가면 좋으련만 첫째의 경우에는 적응에 좀 시간이 걸렸다. 사실 나도 선생님들의 무뚝뚝함과 학습 능력으로 아이들의 인성까지 평가하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 것이 사실이다.
3월 말 학부모 상담주간에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자리에 앉자마자 선생님의 첫 마디는 “주은이가 예민한 아이죠?”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우리 아이가 예민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아니, 도리어 우리 아이는 상당히 무던하다고 생각해 왔었기에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선생님은 우리 아이가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책 읽는 모습이 많고, 모둠 활동 때 자기 의견을 잘 말하는 활발한 친구들이 함께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했다. 스스로 발표하는 경우가 없고, 중간놀이 시간에도 아이들 놀이에 끼지 못하고 걷 도는 것 같다고 하셨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내 마음은 상당히 불편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워왔는데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괜히 아이를 잘 못 키워온 것 같아 나의 8년간의 엄마로서의 자존감도 바닥을 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 딸이 학교에서 좀 제대로 (?) 생활할 수 있도록 엄마들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쓰고, 친구들과 매칭해서 놀게도 하고, 특히 받아쓰기나 단원평가 같은 부분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집에서 공부도 시켰다. 특히 학교 과제가 있을 때에는 신경을 많이 써서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낼 수 있도록, 솔직히 우리 딸의 과제가 다른 친구들 것보다 더욱 돋보이도록 해 주었다. 사실 과제 제안서 쓰기, PPT 발표 자료 만들기 등이 일상인 나에게 그런 부분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그 과제는 퀄리티는 높을지언정 우리 딸의 언어가 아니었고, 우리 딸의 생각이 반영된 것도 아니었기에 아이 입장에서는 그런 상황이 고맙기보다는 불편했던 것 같다. 내 딴에는 직장 다니면서도 엄마가 이 정도로 신경 써 주는데 대단한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우리 아이는 “누가 해달라고 했나? 물어보는 것만 알려주면 좋겠어.”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우리 딸은 이런 마음을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내가 깨닫게 되었고, 고학년이 된 지금에서야 표현하게 되었으니 그 당시에는 나 혼자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1학년을 보내고 2학년을 맞이했다. 학부모 공개 수업을 갔는데, 다른 친구들은 선생님이 질문하면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드는데 살짝 내성적인 우리 딸은 당연히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제비뽑기를 해서 걸린 친구들이 앞으로 나와 자기 꿈에 대한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 처음 이름을 불린 학생이 바로 우리 딸이었다. 우리 딸은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자기는 못 나가겠다고 버티고 앉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몇 번 채근하시더니 학부모 참관 수업인 부분도 있기에 “그럼 조금 마음이 준비되면 그 때 발표하자.”라고 하시며 다른 친구로 넘어가셨다. 결국 우리 딸은 끝까지 발표를 거부하고 하지 않았다. 그날 얼마나 실망스럽고 솔직히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게 뭐 별거라고 그걸 못하나 싶기도 하고 우리 아이가 한없이 뒤처져 보였다. 게다가 며칠 후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에서도 역시나 그다지 좋은 말을 듣지 못했다. “어머님, 주은이가 혼자서 그림만 그리거나 책을 읽고 친구들이랑 별로 놀지 않아요. 그리고 모둠 활동할 때 자기와 의견이 안 맞으면 삐져서 잘 참여도 안 하고요. 이러다가 고학년이 되면 왕따가 될 수도 있으니 아이의 사회성을 길러주세요.” 1학년 시절과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입에 발린 말이라도 칭찬은 한 마디도 없었다. 엄마는 맨날 밥 먹고 하는 게 PPT 발표인데 “우리 딸은 앞에 나가서 저는 서주은입니다. 제 꿈은 파티시에입니다.” 이 두 마디를 못 하다니...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학교만 다녀오면 자꾸만 내가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딸이 학교 방과후교실에서 하는 원어민 영어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학교에는 방과 후에 특별활동으로 원어민 영어, 종이접기, 드론, 한자, 미술, 바이올린 등 여러 가지 수업이 개설되어 있는데, 어차피 매일 오후 5시까지 돌봄교실에 있는 우리 딸은 주 5회 하루 한 시간씩 수업하는 원어민 영어 수업을 1학년 때부터 듣고 있었다. 원어민 영어와 요리 & 클레이 수업이 우리 딸이 듣고 있던 방과후 수업이었는데, 1학년 때에는 파닉스를 했고, 2학년이 들어와서는 갑자기 문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실 모든 영어수업은 레벨 테스트를 통해서 영어 1도 모르는 사람과 파닉스를 뗀 사람 등 유사한 수준의 아이들을 모아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데, 방과후 수업은 1학년은 모두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파닉스를 나가고, 2학년은 문법을 하고, 3학년은 글쓰기를 하고.. 이런 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니 유치원부터 영어를 접한 친구들과 우리 아이처럼 처음부터 시작하는 친구들 간의 학습 격차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것을 알지만 기초부터 한다는 생각으로 계속 참여하고 있었는데, 숙제의 양도 많았지만, 지식을 천천히 소화시켜야 하는 우리 딸의 경우에는 내용도 잘 이해 못 하고 숙제해 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수준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니 아예 작은 동화책을 통으로 외우도록 한다든지, 문법을 영어로 배우는 수준으로 점프해서 헉헉거리면서 따라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늘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여러분은 1학년에서 2학년으로는 그냥 올라왔지만, 3학년 원어민 수업을 들으려면 2학년 말에 테스트를 해서 시험 잘 본 60%만 올라가게 될 거예요.”
느리지만 성실한 우리 딸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시험을 봐서 상위 60% 안에 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비록 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이지만 사실 본인도 원어민 수업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꾸역꾸역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노력해서 따라가면 되겠지 생각을 했는데, 열심히 해도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하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현실에서 좌절을 느꼈다.
“엄마, 내가 열심히 해도 선생님이 받아주지 않는대. 잘 해야 받아준대. 어차피 열심히 해도 안 되는데 내가 계속 이 수업을 들을 필요가 있을까? 나 정말 이 수업 가기 싫어.”
우리 딸은 방울방울 눈물을 뚝뚝 떨구며 나에게 얘기했다.
아. 이게 뭔가 싶었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람마다 자기 속도가 있는데, 모든 아이들이 같은 속도로 따라오길 바라는 이게 맞는 교육인가 싶었다.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 전달이 되었다. 난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안다. 열심히 해도 해도 목표에 닿기에는 너무나 모자란 좌절의 시간을 연구자로 살면서 난 수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특히 내 에너지를 내 능력을 아무리 쥐어짜도 턱없이 부족한 것 중 하나가 영어로 논문 쓰는 일이다. 또한 논문 저널은 각각 점수가 매겨져 있어서 네이쳐, 사이언스 등 탑 저널이 아닌 이상 자꾸 비교당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리고 논문의 양과 질은 해마나 나의 실적에 반영되고, 그 실적은 국가 과제 수주에 반영되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더 잘 해내야만 된다는 강박과 거기서 낙오되는 순간 연구비도 없어서 전전긍긍해야 하는 내 현실이 투영되어 보였다. 내가 있는 사회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보다는 좋은 연구 실적을 내는 사람이 살아남는 사회인데, 이 어린 나이에도 이런 무거운 짐이 있구나 싶어 맘이 아팠다.
사실 3살부터 책을 술술 읽는 아이가 있는 반면 8살이 되어도 더듬더듬 책을 읽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극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3-4학년이 되면 다 읽고 쓸 수 있게 된다.
모든 사람의 재능이 다 다르기에 출발선이 다 같을 수는 없다. 교육을 통해 다양한 세계를 접하면서 자기 자신의 흥미와 재능을 찾아가고, 잘 하는 것을 더 발전시켜 그것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지 누가 정해놓은 시간표대로 이때 반드시 이것을 해 내야 하는 것은 맞는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쳤고, 나는 쿨하게 딸아이에게 대답했다.
“주은아, 원어민 영어 내일부터 나가지 말자. 엄마가 선생님한테 잘 말씀드릴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우리 딸은 대기만성 (大器晩成) 형이라고 엄마가 늘 말했지? 이 영어 수업이 주은이와 성향이 맞지 않았을 뿐이야. 너에게 맞는 공부 방식을 찾으면 되는 거야.”
그 이후부터 나는 학교 선생님의 코멘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에게 욕을 했다던가 싸웠다던가 피해를 입혔다던가 너무 예의 없게 행동했다던가 거짓말을 했다던가 하는 인성적인 부분에 대한 이슈가 아닌 이상 본인의 성향과 학습 능력에 대한 부분은 우리 아이의 속도에 맞추기로 했다. 단원평가도 함께 준비를 도와주긴 하지만 내가 쥐어짜서 엄마의 능력으로 시험을 치르기보다는 본인이 소화한 만큼 시험을 보고 그 결과를 받아보기로 했다.
“엄마 엄마, 나 어제 엄마한테 모른다고 물어봤던 문제 있잖아 그거랑 똑같은 문제가 시험에 나온 거 있지? 진짜 신기하더라구.”
가끔은 시험을 보고 와서 이런 말도 한다. 본인이 몰라서 물어본 부분이라 더 기억에 남았을 것 같다.
학교 과제도 마찬가지이다. 내 눈에 부족해 보여도 스스로 열심히 한 작품(?)에 절대 손 대지 않는다.
이제 내 맘도, 아이 맘도 상당히 편해졌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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