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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책 편지] 공학 박사의 드립력으로 들려주는 육아일기 (보다 중요한 그 이외의 것들)
Bio통신원(예린)
한창 앞이 보이지 않는 실험과 프로젝트의 향방에 지쳐 반쯤 좀비처럼 랩을 배회하며 삶에 대한 깊은 고찰에 빠져 있던 즈음, 친구가 짤을 보내주었습니다. “난 대학원은 가본 적 없지만 이게 지금의 너와 같은 상황일까…? 힘내렴 ^_^...”
전 확신했습니다. 이 짤을 그린 사람은 랩에서 적어도 수 년 이상 구르며 학위과정을 맛본 사람이라는걸요. 그리고 이 기막힌 짤이 대학원생 만화가 아니라 육아 만화에서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들 웹툰 많이 보시지요. 개인적으로 웹툰을 잘 보지는 않지만, 간혹 하나씩은 챙겨보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닥터베르 작가의 ‘닥터앤닥터 육아일기’ 는 꽤 긴 시간 동안, 중간에 끊지 않고 챙겨 보고 있는 작품입니다. 현재 연재 중인 작품이지만, 앞 에피소드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기에 조심스레 또 한 편의 책 편지를 써 봅니다.
도베르만을 닮은 닥터 베르 (Ph.D), 파(안)다를 닮은 닥터 안다 (M.D), 그리고 장두형 아빠와 단두형 엄마를 고루 닮아 대두형인 아기 레서 (판다), 셋의 이야기를 아빠 베르가 ‘닥터앤닥터 육아일기’ 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들려주고 있습니다. 산부인과 보드를 딴 엄마와 공대 박사인 아빠 밑에서 크는 자식은……. 과연 어떤 드립을 치게 될까요……. 평소 우리가 실험실에서, 실험실 밖에서 친구들과 얘기하는 것들을 생각하며 약간의 애도를 표해 봅니다. 작가가 구석구석 숨겨놓은 밈들과 각종 드립의 향연들을 읽다 보면, 이 아이가 커서 드립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하며, 이걸 알아보는 나에 대한 묘한 죄책감도 함께 듭니다.
원작을 알면 재미있는 것은 패러디, 원작을 알리고 싶은 것은 오마주, 원작을 감추고 싶은 것은 표절이라고 하던가요. 이 웹툰의 드립들, 누가 봐도 알아봐 주길 바라는 패러디입니다. 공대 감성에 젖은 각종 패러디와 더불어 레퍼런스가 필요한 부분은 칼처럼 레퍼런스를 달아놓는 센스는 진정 연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 아니라면 발휘하기 힘든 감성이지요. 비록 그것이 웹툰이라고 하더라도요.
네이버에 몇몇 임신출산육아 웹툰이 있었지만, 아빠가 주인공인 웹툰은 비율이 낮았습니다. 그 아빠가 주 양육자인 경우는 더 그렇죠. 웹툰 중 일부 에피소드는 주 양육자가 아빠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데, 미혼부의 단독 출생신고 인용의 법적 어려움은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놀랐습니다. 주 양육자 대부분이 엄마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들이나 육아하는 아빠들이 겪는 외로움은 아직 크게 드러나지 않아 보이지만, 육아빠들이 늘어날수록 문제의식이 생기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목소리도 생겨나겠지요. 아이를 키우는 건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인데, 눈에 띄는 어려움, 띄지 않는 어려움이 산재하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별과 상관없이 주양육자이기에 겪는 부양육자와의 마찰은 메인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아기가 엄마보다 아빠를 더 많이 찾는걸, 아기가 싫다는데 어떻게 하라고? 문장의 엄마와 아빠를 바꿔놓으면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야기죠. 이 에피소드는 우선 해당 문제가 엄마와 아이의 본능, 그리고 모성애 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주 양육자와 아기 사이의 애착 관계 및 출생 후 익숙해진 육아 정도 때문이라는 걸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평하게 하기로 했는데 결국 공평한 분담을 못 (안) 하게 된 이 상황’은 사실 참기 힘듭니다. 내가 이 일을 더 맡아서 하는 것보다, 함께 공평하게 해야 할 일을 나 혼자만 떠맡고 있는데 그게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게 더 울화가 치밀게 하죠. 베르와 안다가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모두에게 정답은 아니겠지만 따스했습니다.
‘레서는 엄마가 싫은 게 아니라, 아빠가 필요했던 거구나.’라는 베르의 깨달음에서 시작된 양보와 둘 사이의 조율이 중요한 시작이 되었고, 한 쪽이 불공평하거나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함께 육아를 시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육아에서 공평한 분담은 쉽지 않았고 누군가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려면 기차에 타 있는 사람이 손을 내밀어 주는 배려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함께하기 위해서.’라는 카툰으로 마무리되는 이 에피소드는 (‘공동육아’, 단행본 2권 수록) 육아뿐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고, 공동의 문제를 대해야 했는지에 대해 큰 깨달음을 던지는, 억지 신파 없이도 가슴을 울리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런가 하면 본격적으로 레서가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중 친구와의 다툼을 다룬 회차는, 아이의 잘못을 바로잡아주기 위해 우리가 어디서부터 대처해야 하는지 짚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 가슴을 아리게 하는 건, 중반부부터 등장하는 포니 엄마의 모습 아닐까요. 그냥 참고 버티는 게 최고라고 배웠기 때문에 밥을 먹이고 유치원에 보낼 수는 있지만 그 너머 정답은 알려줄 수 없는 포니 엄마의 모습. 이 모습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숱한 지침들과 조언을 성실하게 따르며 자식들에게 최선을 다한 부모님의 모습이죠.
그런데 왜 그다음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걸까요, 눈에 보이고 남들이 평가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그토록 많은 조언과 정답들이 쏟아지다가요. 울음을 참는 포니 엄마의 모습에 제 부모님의 모습이 겹치며 서로에게 상처 준 기억들이 떠올라 가슴이 문득 아픕니다. 엄마 아빠도 처음이라서 잘 몰랐을 텐데, 누군가 가르쳐줘서 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 텐데 하고요. 그래도 포니 엄마의 마지막 대사에서, 정답을 배운 적은 없지만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부모 자식 간이기에 무엇보다도 더 좋은 기억들을 쌓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다짐을 해 봅니다. “엄마의 엄마도 그다음은 안 가르쳐줬어. 그래서 엄마도 몰라. 지금부터라도… 같이 알아가자.”
브릭의 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학위 과정 이야기겠지요. 책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인물 소개에서부터 여러분은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아 이 사람은 진짜야, 한국 실험실에서 수 년 간 학위과정을 보낸 사람이야, 그것도 실험을 하는 웻 랩에서 … “박사 아빠는 뭐가 좋은가요?”에 “기본적으론 그냥 고학력자죠.”라는 시작부터 학위 과정에 대한 통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흔한 Ph.D Candidate 중 한 명은 우리가 흔히 겪어내는 학위 과정 중간에 매우 독특한 이벤트를 선택합니다. 바로 육아 휴학이죠. 왜 독특하냐면, 앞서 계속 보셨던 대로 닥터 베르는 남자 대학원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여자 대학원생들의 경우 출산 및 육아 관련 휴학을 하는 빈도가 남자 대학원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겠지요.) 게다가 논문 사이클이 더 빠른 분야 특성……. 저는 다시 돌아가더라도 학위 중간에 휴학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늘 겁이 많았기 때문에, 휴학도, 복학도, 그 사이의 일도 무엇 하나 자신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닥터 베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 역시 정답을 확신했기 때문에 옳은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그때 할 수 있는 선택을 하되 환경이나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좀 더 가깝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웹툰에서 엿볼 수 있는 베르의 행동이 그랬듯이, 제가 대학원 생활에서 얻은 교훈 또한 그랬듯이요. 확신할 수 있는 정답은 없고, 내가 선택해야 할 길만이 앞에 펼쳐져 있는데, 아무리 촘촘하게 계획할지라도 그 계획은 이뤄지지 않을 수 있지요. 그렇다면 계획을 달성하는 게 아니라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발맞추어 걸어가는 과정 또한 중요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들이요. 사실 이 육아일기의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육아 웹툰이라기보다는 닥터앤닥터의 인생 퀘스트 정도로 제목을 바꿔도 될 것 같습니다.
방영 중인 TV 프로그램 중 정신과 의사와 함께 아이들의 상담 및 행동 교정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가 있는 부모들뿐 아니라 육아와 당장 관련이 없는 2, 30대 시청자층이 의외로 많다고 하는데요. ‘우리 부모님이 그래서 내게 그랬구나’, 혹은 ‘내 문제가 이래서 생긴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선생님이 주는 솔루션을 들으며 간접적인 위로를 얻기도 하기 때문에 젊은 층의 지지가 꽤 높다는 설이 인터넷 게시판에서 많은 공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종류의 위로와, 나를 힘들게 하던 문제들에 이렇게 접근하면 좋겠구나 하는 조언들을 이 웹툰에서 얻었습니다.
저는 결혼도, 육아도 아직 경험이 없습니다만, 육아일기라는 제목을 단 이 웹툰에서 육아가 아닌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대처법도 볼 수 있었고, 그게 위로가 되어 주었거든요. (그리고 저를 포함해 주변에 넘쳐나는 이과적 논리 전개 방식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다정함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 퀘스트에 결혼, 출산, 육아가 만약 추가된다면, 이 책을 다시 읽어보며 주변 사람들과 나에게 모두 다정한 방식으로 이 퀘스트를 해결하고 싶다고. 그리고 그걸 함께 할 사람 역시 이 책을 읽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요.
ps1. 현재 웹툰은 연재 중이고, 단행본 출간분 역시 아직 네이버에서 감상이 가능합니다.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732955&no=7&weekday=) 1권에 임신에서 출산까지, 2권에 아기 레서 육아 과정, 3권에 유아 레서와의 생활이 담겨 있습니다. 웹툰 현재 시점에서 레서는 어린이에 가까워진 유아로, 레서의 이과 감성 충만한 말들을 보는 소소한 재미도 추가되었습니다. 작가는 현재 인생의 중대한 변곡점에 또다시 서 있는데요,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구체적 서술은 생략합니다만 깊은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껏 그래오셨던 것처럼 따스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시리라 믿습니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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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의 힘을 믿는 연구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몸속 도구들이 생명을 만들어내고 삶을 조절하는 것에 매료되어 생명과학 연구의 길을 걷게 됐고,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어 과학커뮤니케이션에 발을 디딘 사람. 우리가 하는 연구의 본질도 결국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고 이를 전달하는 데 있다고 믿는, 갓 박사를 단 새내기 연구자가 전하는 연구 활동 중 마음에 울림을 준 이야기와 책에 대해 나누는 감상들. 여러분의 곁에는 어떤 책들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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