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를 하겠다고 결심한 계기는 책에 있었는데, 연구를 하면서부터는 책이 읽히지 않았습니다.
연구실에서 일할 때는 모든 여유 시간을 논문 읽는 시간의 기회비용으로 느꼈습니다. 친구를 만나는 시간도 줄이는 마당에 책을 읽을 엄두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바이오 대학원생이라, 플레이트를 기계에 넣고 나면 잠깐씩은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런 시간에 논문을 읽었겠어요? 죄책감만 안고서 동료들과 매점을 가고 핸드폰을 했습니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점점 지쳐갔습니다.
졸업 후, 학계에 비켜서고 나서야 다시 책 읽을 생각이 났습니다. 과학 책을 읽으며 느끼건대, 저는 여전히 과학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덧붙여 대학원생 시절 마음의 여유가 얼마나 없었던지도 깨달았습니다. 먼 곳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달려야 했습니다. 적어도 저녁에 PCR 돌리고 잠깐 쉴 때마저 죄책감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었어요.
함께 입학했던 연구실 동료들은 한창 연구 중입니다. 똑똑한 선배들은 벌써 학교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이 들리고요. 저는 운 좋게도 연구하는 사람들 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벤치 앞에 있는 분들을 보면 여전히 동료 같습니다. 이제 그분들께 해줄 수 있는 일은 함께 연구하거나 실험 기법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분 전환용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지만요. 그래서 PCR 돌려놓고 여유가 나면 잠깐 읽을 책 소개글을 준비했습니다. 책이 재미있어 보인다면 주말에 시간 내서 직접 읽어도 좋을 거예요.

이왕 하는 딴짓이라면 건전하게!
첫 책은, 스반테 페보의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원제: Neanderthal man: in search of lost genomes)>입니다.
책은 스웨덴 진화유전학자 스반테 페보의 연구 자서전입니다. 거창한 아이디어가 어떻게 실현 가능한 형태로 빚어지는지, 사이에 무슨 어려움이 겪었고 어떤 아이디어로 해결하는지 이야기합니다.

학생 시절,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꿀 때 우리의 목표는 거창하고 추상적이었어요. ‘의식의 비밀을 풀겠다!’든지, ‘모든 암의 공통점을 찾아 치료하는 약을 만들겠다!’ 따위로요. 그러다 연구를 시작하며 목표가 바뀝니다. 좋게 말하면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하고, 나쁘게 말하면 규모가 줄어든 채로요. 두루뭉술하던 꿈이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과학자가 태어나는 여정입니다. 하지만 꿈은 꿈대로,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대로 갈라지는 삶에 회의를 느낄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 분들께 책을 추천합니다. 책의 저자인 스반테 페보는 어릴 적 이집트 미라에 매료되었다가 박사 과정 때 분자생물학 기법을 고고학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30여 년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길을 개척한 끝에, 페보는 ‘고유전학 (paleogenetics)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네안데르탈인의 게놈 분석에 성공합니다.

Svante Pääbo - Wikipedia
책은 네안데르탈인의 미토콘드리아 DNA 서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분자생물학 전공자라면 페보가 설명하는 실험을 바로 옆 벤치에서도 해볼 수 있을 거예요. 네안데르탈인 뼛조각에 적당한 프라이머를 붙여 PCR에 돌리고 클로닝 하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고인류 분자생물학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화에도 그렸듯 유전체가 진짜 화석의 유전체인지, 현대의 다른 유전체로 오염된 것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대장균이 증식하고 내놓은 DNA 절편이 네안데르탈인의 뼈에서 나왔는지, 뼈를 발굴한 고고학자의 땀에서 나왔는지, 실험하는 대학원생의 침방울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페보의 연구 일대기는 곧 현대인 DNA에 오염되지 않은 고대 DNA를 찾는 여정입니다. 실험실에서 오염 문제로 골머리를 썩여보았다면 페보의 어려움이 남의 이야기처럼 읽히지는 않을 거예요.
현대 분자생물학 실험 기법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아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저자가 처음으로 이집트 미라의 DNA로 논문을 출판한 시점은 1984년, 네안데르탈인 유전체 논문을 사이언스에 게재한 시점은 2010년이거든요. 그동안 플레이트를 뜨거운 물에서 미지근한 물로 옮겨가며 했던 PCR은 버튼 몇 번 누르고 한두 시간 기다리면 끝나는 실험이 되었습니다. 2000년대 초반 페보가 몇 안 되는 네안데르탈인 화석에서 DNA를 조금이라도 더 모을 아이디어를 찾으며 알게 된 ‘피로시퀀싱’은 이제는 NGS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은 과학에 있어 연구 바깥의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려줍니다. 훌륭한 과학자라고 하면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거나 데이터를 보며 동료와 열띤 디스커션을 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하지만 좋은 과학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연구를 팔 줄 알아야 합니다. 연구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설득해야 연구비를 얻을 수 있으니까요. 특히나 페보의 연구는 고인류 유전체 분석, 돈만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 박물관을 다니며 고고학자들이 조심스럽게 발굴한 뼈를 훼손해야만 하는 연구였습니다. 페보는 기자회견을 열어 2년 안에 네안데르탈인 핵 게놈을 알아내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하기도 하고, 자신이 가입한 한림원의 이름을 빌려 한 국가의 여론을 뒤집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며, 자신의 연구 일대기를 자서전으로 낸 것조차 그의 연구 마케팅의 일부라고 느꼈습니다. 논문을 읽지 않은 저조차 이제는 스반테 페보라는 이름과 그의 네안데르탈인 게놈 연구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요.

A Draft Sequence of the Neandertal Genome | Science (sciencemag.org)
잘 모르던 분야의 대가의 자서전은 재밌었습니다. 유전체 서열로부터 고인류 집단의 이동이나 이종교배의 단서를 찾는 부분은 익숙하지 않아 어려웠지만, 나머지 실험 내용은 현장감 있게 읽었습니다. 무엇보다 생물학 전공자로서 분자생물학으로 고고학에 접근하는 그의 관점이 신선했습니다. 생물학 실험실과 선사시대 유적지는 제 머릿속에서 전혀 다른 범주에 있었으니까요. 페보와 비슷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제 글을 읽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라도 연구는 익숙할망정 스반테 페보라는 과학자 개인의 삶을 읽는 재미를 느낄 겁니다. 저야 페보 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었지만, 학계 내부를 잘 아는 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아실지도요. 그걸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겠지요.
참고문헌
Green, R. E., Krause, J., Briggs, A. W., Maricic, T., Stenzel, U., Kircher, M., ... & Pääbo, S. (2010). A draft sequence of the Neandertal genome. science, 328(5979), 7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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