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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노트] 몇 시까지 출근하면 돼?
Bio통신원(곽민준)
'몇 시까지 출근하면 돼?'
'딱히 정해진 규칙은 없는데, 우리끼리 활동 시간이 맞아야 연구 상황도 공유하고 디스커션도 편하게 할 수 있으니, 너무 늦게는 오지 않는 게 좋지'
잠이 많아 아침에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나에게는 참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출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 대학원 다니는 것도 출근인가?‘
역시나 재미없는 이 사람이 또 이상한 질문을 던진다.
'왜? 다 출근이라고 부르지 않나?'
'그래도 우리가 노동자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등교하는 건가? 그것도 조금 애매한데?'
'그러게.'
'대학원생은 학생인 거야, 아니면 노동자인 거야. 5월 1일에는 랩 나와야 하나?'
'5월 1일이 아니라 다른 공휴일에도 나오는데?'
'어휴…. 요새 52시간제도 생겼는데, 남들 다 쉬는 공식적인 휴일에 우린 왜 못 쉬는데?'
'아, 물론 아무도 쉬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 교수님도 쉬는 날에는 실험하지 말고 쉬라고 하셔. 근데 우리가 할 일이 많아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거지.'
출근 첫날? 아니, 등교 첫날? 뭐 어쨌든 1년 전 대학원에 온 첫날에 저 대화를 나누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어야 한다. 학부는 동기, 대학원은 랩 선배인 저 쓸데없이 성실한 양반처럼 나도 이제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동자도 아닌 참 애매한 존재가 될 처지였으니 말이다.
대학원생의 포지션이 참 애매하다는 사실은 첫 월급을 받는 날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받는 돈이 월급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장학금이었다. 나는 내가 일한 대가로 그에 상응하는 돈을 받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학업 동기 부여를 목적으로 학생에게 주는 그런 돈을 받는 것뿐이었다. 역시 대학원생은 노동자가 아닌가 보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를 보다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생명과학도의 길에 들어섰는데, 젠장,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오히려 하나 더 늘어나 버렸다. 대학원생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 보면, 그래도 학생의 한 종류이긴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냥 학생이라고 결론 내리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내가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주는 BK21 제도는 참여 대학원생을 ‘주 40시간 이상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는 전일제 대학원생으로 정의한다. 주 40시간?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기준인데? 근로기준법은 일 8시간, 주 40시간을 법정 근로 기준 시간으로 정의한다. 똑같네? 이쯤 되면 우리도 노동자로 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최근에는 근로 계약 의무화 제도라는 게 도입되어 정부 출연 연구소 소속 대학원생들은 확실히 노동자로의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예 최소 액수를 정해서 학생 인건비를 지급한다고 하는데, 음, 사실 이것도 엄청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노동자로 대우받는 순간, 여러 가지 권리를 누릴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여러 책임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지도 교수님께서 ‘그래도 학생일 때가 좋습니다.’라고 하신 적 있는데, 맞는 말이다.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밥 먹듯이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중이고, 교수님께서는 매번 ‘이런 건 저도 처음 봅니다.’라는 말씀으로 내 창의성을 칭찬해 주신다. 그래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니까, 이런 실수를 교훈 삼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고, 이번 건 트레이닝으로 생각하라고 격려해 주신다. 자원과 기회를 제공한 이가 그 기회를 날린 이를 격려해 주는 이 아름답지만 놀라운 광경은 내가 학생이니까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학생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내가 한 일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였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대학원생은 학생으로 대우받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노동자로 인정받기에는 또 조금 두려운 면이 있다. 과학이라는 어려운 일을 직접 수행하는 우리는 수업 시간에 의자에 몸을 붙이고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다른 학생들과는 다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수많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수습생이기에 다른 사회인들과 같은 압박과 책임을 느끼는 것도 무리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좋은 것만 다 하겠다는 얘기처럼 들리는데, 바로 그거다!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잠도 많이 못 자는 우리 불쌍한 대학원생들 좋은 것만 다 해줬으면 좋겠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가? 그럼 최소한 학생도 노동자도 아닌 애매한 위치가 아니라, 학생과 노동자 그 사이에 있는 대학원생이라는 당당한 하나의 신분으로는 인정해 줬으면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 대표로 나서서 우리 권익을 위해 싸워줘야 할 텐데, 다들 실험하느라 바빠서 아마 힘들 것 같긴 하다. 아무나 우리 대신 싸워주기 전까지는 단념하고 그냥 애매한 존재로 살아야 하려나? 그래도 운 좋게 괜찮은 연구실에 들어와 밥값 걱정은 안 하고 있으니까 일단은 그걸로 다행이라 생각해야지. 장학금이든 월급이든 어쨌든 곧 내 통장에 또 돈이 들어오니, 그 돈으로 일단 맛난 거나 사 먹어야겠다. 연구든 뭐든 결국엔 전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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