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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편하게 오래살수록 결국 약 중독…‘텐 드럭스’
Bio통신원(김재호 기자)
영화 「아나키스트」(유영식 감독, 2000)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던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에서 세르게이 역을 맡은 배우 장동건은 아편에 중독된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 때문이었다. 의열단원들은 베이징의 한 아편 동굴에서 세르게이을 찾아내어 처단하려고 한다. 암울했던 그 당시를 상세히 묘사한 이 영화에서 아편과 독립투사는 처음엔 의아했다. 그러다 나중에 영화를 계속 보면서 조금씩 이해해보고자 했다.
최근 읽은 『텐 드럭스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에서 저자 토머스 헤이거는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약물을 거론하라면, 아편을 택하겠다고 적었다. 그는 아편을 ‘기쁨을 주는 식물’, ‘신이 내린 의약품’이지만 양날의 검처럼 이중성격을 갖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편은 효능이 엄청나고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텐 드럭스』는 ‘글빨’이 정말 좋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책이다. 과학기술이 과학기술로만 발전하지 않듯이, 의학과 약학이라는 과학기술은 사회(노동자), 문화(백인 여성), 역사(전쟁), 정치(의사집단), 경제(제약사) 등 모든 분야와 얽히고설켜 있다. 그런데 사실 머릿속으로만 이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는 대부분 잘 모른다. 이야기꾼 헤이거는 10여 가지 약들을 통해 그 지점들을 낱낱이 드러낸다. 책을 읽다 보면 푹 빠지게 돼 있다.
특히 서구 역사 속에서 나타난 제약사와 의사들의 비합리성과 비과학, 자본종속은 헤이거가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였던 것 같다. 과학과 합리성으로 대표되는 약들과 처방은 사실, 그렇지 않은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예를 들어, 항생제는 그동안 손쉬운 표적(세균의 세포벽이나 대사과정 등)들만 겨낭해 표적의 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세균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데 새로운 항생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새롭게 개발되는 약들이 드물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블록버스터급 약을 개발하기 위해 제약사들의 패러다임은 변하고 있다. 바로 ‘생명을 살리는 약’에서 ‘삶을 더욱 편안하게 해주는 약’으로 말이다. 초고노령화 사회에서 후자는 계속해서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수익을 거둬들일 수 있다.
제약사들의 자본 종속 우려돼
아편이 좀 더 보편화하고 과학화하는 데 여러 사람들이 기여했다. 『텐 드럭스』에는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가 등장한다. 처음에 읽으면 마치 돌팔이 떠돌이 의사 같은데, 아편으로 자가실험을 하는 등 좀더 현대의학적인 접근을 한 인물이다. 아편의 옹호자로 불린 파라켈수스는 본명이 ‘필리푸스 아우레올루스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헨하임’이라고 하니 정말 특이하다.
그는 특정 지역에 가면 의학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토론하고 학습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적은 문장 중에 인상적인 것은 “지식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34쪽)”이다. 특히 중세 이슬람 철학자이자 의사인 이븐 시나(980∼1037)의 책을 불태우고, 로마나 그리스의 정통의학을 극복하고자 했다. 저자 토머스 헤이거는 파라켈수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돌팔이가 아니라 약학의 아버지 중 하나로, 약물 연구를 고대 이론의 질곡에서 끌어내어 더욱 현대적인 토대 위에 우뚝 세우려고 노력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35∼36쪽)
아편을 사랑했던 이가 또 있었다. 바로 영국의 의사 토머스 시드넘(1624∼1689)이었다. 그는 액상 아편으로 조제 과정을 표준화했다. 저자 헤이거는 토머스 시드넘을 통해 "효능을 테스트하고 품질을 확인하는 새로운 방법이 발견됨에 따라, 아편은 의학이 기술에서 과학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기 시작했다."
아편이 보편화 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아편은 노동자 하층민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는 약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습에 따라 억압된 백인 중년 여성 등의 탈출구이기도 했다. 또한 나이팅게일도 가끔 아편을 사용할 정도로 사용량은 계속 증가했다. 『텐 드럭스』는 심지어 보채는 아기들을 달래기 위해 시럽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의 평균수명을 고려했을 때, 하루에 2개 정도의 약을 먹는다고 한다. 이미지 = 픽사베이
아편의 보편화와 중독
영국은 영국령인 인도를 통해 중국에 아편을 들이기 시작했다. 헤이거는 “1830년대 말 중국 인구의 약 1%인 400만 명이 아편 중독자였고, 밀무역항 근처에 사는 중국인들 중 중독자의 비율은 무려 90%였다”고 밝혔다. 중국 황실한테 아편은 골칫덩이였고, 결국 아편 전쟁으로 이어진다. 한편, 미국 역시 아편 수입량이 점점 늘어나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학과 약학에 의해, 아편은 모르핀과 헤로인으로 점점 좋아(?)졌다.
『불안한 승리』를 쓴 도널드 서순에 따르면,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영국에서조차 아편 무역의 위험을 경고했다. 하지만 자본과 무역의 논리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약 20여 년간 이어진 영국과 아편 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중국은 서구의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중국 군대와 농민들 사이로 아편은 점점 더 확산해갔다. 중국 황제는 100만 킬로그램이나 되는 아편을 바다에 던졌다. 이 작전은 6월 26일 종료되었다. 오늘날 유엔이 정한 세계 마약남용 방지의 날이 바로 이날이다.
중독은 무섭다.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늪과 같다. 헤이거에 따르면, 1860년 미국에서 발생한 모든 중독의 3분의 1이 아편과 모르핀 때문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제약사들은 돈을 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편 전쟁으로 망가졌던 중국
『텐 드럭스』는 코로나19 백신을 맞아야 하는 이유를 천연두를 빗대어 설명한다. 1977년 말라리아 환자가 마지막으로 보고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1978년 중년의 사진작가 재닛 파커가 과학자 헨리 베드슨의 연구실 바로 위에 있는 암실에서 사진을 현상하다가 천연두에 걸렸고, 사망했다. 이 때문에 천연두 연구는 철저하게 봉쇄된 곳에서만 하게끔 세계보건기구(WHO)가 조치했다.
현재는 미국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러시아 콜트소보에 있는 국립 바이러스 및 생명공학 연구센터(VECTOR)에만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은 공식적인 것이고, 비공식적으로 어딘가에 천연두 바이러스가 있을지 모른다고 헤이거는 경고한다. 그래서 비용/편익분석을 따져보더라도 백신의 접종이 중요하다. 헤이거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백신을 접종받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면역력 없는 사람'의 풀이 커지므로, 감염이 확산되는 속도는 빨라질 수밖에 없다.(104쪽)”
책은 또한 인두법으로 성차별적 의·약학사를 지적했다. 바로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1694∼1771)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오스만 제국에 갖다고 오늘날 인두법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서양식 기술을 알게 됐다. 피부에 상처를 내고, 천연두 환자에게서 채취한 고름을 묻히는 방법이었다.
레이디 메리는 자신의 남동생을 천연두로 잃었고, 그녀 자신 또한 천연두로 인해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레이디 메리는 이 방법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에게 적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녀의 제안(터키의 접붙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자 헤이거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영국의 의료계가 갖고 있던, 이슬람교 국가에 대한 기독교 국가의 우월성 편견. 둘째, 레이디 메리라는 여성이 주로 남자들로 구성된 의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라는 성차별적 편견. 셋째, 부분적으로 의학적인 측면 때문이었다.
의학사에서 나타난 편견들
『텐 드럭스』를 번역한 이는 약사 출신의 번역가인 양병찬 씨이다. 책은 전문가의 번역답게 매끄럽다. 옮긴이 양병찬 씨는 헤이거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약 권하는 사회 △유병장수시대 △삶의 의료화(뭐든 약으로 해결하는 사회). 헤이거는 미국인들의 평균 수명을 78.54년이라고 했을 때, 하루에 2개의 알약을 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최하 5만 개는 먹는다는 뜻이다. 비처방약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오늘 약을 몇 개나 먹었을까? 생각해보니 적어도 1개 이상은 먹은 것 같다. 약에 기대고 중독된 사회가 바로 현대사회라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참고 문헌>
1. 『텐 드럭스 (인류의 역사를 바꾼 가장 지적인 약 이야기)』(토머스 헤이거 지음, 양병찬 옮김, 동아시아, 2020.11)
2. 『불안한 승리』(도널드 서순 지음, 유강은 옮김, 뿌리와이파리,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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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에서 수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학술기자, 탐사보도 연구원 등으로 일했다. 지금은 과학커뮤니케이션 차원에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있다. 환경과 생태의 차원에서 과학철학에 대한 고민이 많고, 영화와 연극, 음악을 좋아한다. <동아일보>에 '과학에세이', <포스코투데이>에 '과학의 발견'을 연재한 바 있으며, '학술문화연구소(http://blog.naver.com/acacullab)'를 운영하고 있다. 《레이첼 카슨과 침묵의 봄》,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한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성공 방정식》, 《다시 과학을 생각한다》(공저), 《인공지능, 인간을 유혹하다》(공저), 《자유롭게 김광석 이야기》 등을 집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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