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배가 아닙니다. 동료입니다.”
지난 학기 우리 연구실 최고의 유행어였다. 사실 이 유행어는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억양과 악센트가 더해져야 맛이 제대로 사는데, 글로는 그 생동감을 전할 수 없어 참 안타깝다.
이 유행어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바로 정확한 주인을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원래 이 말을 처음 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우리 지도교수님이다. 그런데 우리 교수님은 충청도 출신이시다. 당연히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했을 리는 없다. 게다가 저 이야기를 전한 형은 모든 사람의 말투를 자기만의 스타일로 바꿔 표현하는 특이한 사람이다. 심지어 형의 말투는 일반적인 경상도 사투리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색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저 말이 정말 교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아니면 이야기를 전한 형이 맘대로 바꿔버린 표현인지는 알 수 없다.
이야기의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몇 달 전, 지난 학기에 새로 입학한 두 사람과 나까지 셋이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식사하며 연구실에 온 지 한두 달밖에 안 되었던 둘과 한창 연구실 사람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던 중, 형이 오늘 교수님께 재미있는 말씀을 하나 들었다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교수님과 형은 앞으로 진행될 실험 계획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교수님께서 혹시 이런 실험을 진행할 수 있겠냐고 형에게 물어보셨고, 형은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진행해보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교수님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선배가 아닙니다. 동료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내용과 상관없이 정말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경상도 사투리로 교수님 흉내를 내는 형이 너무 어이없어서 그냥 빵 터지고 말았다. 형은 랩에 있던 기존 인원들을 선배가 아니라 동료로 여기라는 교수님의 말씀이 인상 깊어 이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원래 알던 교수님 말투와는 너무 다른 형의 표현에 형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냥 깔깔대고 웃기만 했다.
그렇게 실컷 웃고 랩으로 돌아오는 차 안, 성대모사에는 재능이 없다고 형을 실컷 놀리며 진을 다 빼고 나서야 드디어 교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천천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1년도 더 전에 있었던 사소한 에피소드 하나가 생각났다.
그때가 아마 학부생으로 연구 참여를 시작하고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처음으로 랩 회식에 참여한 때였을 거다. 당시 우리 랩에는 나와 학부 동기인, 그러나 칼같이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해 나보다 먼저 대학원에 입학한, 동기도 아니고 선배도 아닌 사람이 한 명 신입생으로 있었다. 냉장고 문은 제대로 못 닫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똑똑한 이 사람은 나와 4년 동안 동기로 지냈으므로 당연히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여기까지는 아주 괜찮았는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우리 교수님이었다.
우리 지도 교수님은 모든 학생에게 존댓말을 쓰신다. 입학 전 첫 면담에서 존댓말로 대화를 나눴을 때는 오늘이 첫 만남이니 그랬을 거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입학하고서도 교수님의 존댓말은 계속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입학한 지 1년이 지난 나에게도, 2년이 지난 학부 동기 그 사람에게도 교수님은 항상 존대하신다. 그러다 보니 랩 사람들 여럿이 교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굉장히 재미난 광경이 펼쳐진다. 나와 동기 그 사람은 서로 반말을 주고받는데, 정작 교수님은 우리에게 모두 존댓말을 하시는 조금은 애매한 상황이 생기는 거다.
첫 랩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이 이야기를 꺼냈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교수님은 존댓말을 하시는데, 우리는 그 앞에서 서로 편하게 반말을 주고받는 모습이 웃긴다는 이야기였다. 교수님께서도 ‘네, 저도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높임말을 하는데, 여러분은 반말을 주고받으실 때면, 어? 뭔가 이상한데? 내가 가장 아래인가? 싶기도 합니다.’라고 하셨고, 우리는 재미있어하며 웃었다.
‘선배가 아닙니다. 동료입니다’라는 한 마디를 곱씹다가 갑자기 이때의 사소한 대화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교수님의 존댓말이 우리를 ‘동료’로 존중해주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교수님은 ‘다른 연구자에게 과학자로 인정받는 것이 참 좋았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대학원생 때 지도교수님과 연구 디스커션을 하면 본인이 단순히 지도를 받는 학생이 아니라 한 명의 과학자로 존중받는 듯해 참 기뻤다고 하셨고, 교수로 부임하기 전 인터뷰 과정에서 우리 학과 교수님들이 본인을 한 사람의 연구자로 존중해주는 모습을 보며 이런 곳에서 연구하면 참 즐겁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본인이 이런 경험을 해서인지 교수님은 평소 우리를 한 명의 학생일 뿐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한 사람의 연구자 동료로 존중해주시려 노력한다. 가끔은 이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지난 학기까지는 이런 배려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온 저년차 학생인데 자꾸 내 생각을 이야기하라고 하니 처음에는 어떻게 할지 몰라 어리벙벙할 때도 많았다. 실험이 잘되지 않아 교수님을 찾아가도 교수님은 답을 안 해주시고 나를 쳐다보기만 하시니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이라도, 최고의 방법은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바를 하나둘 이야기하고 교수님과 함께 실험과 연구 방향을 맞춰가기 시작하며 생각이 바뀌었다. 똑같은 실험을 하더라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결정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더 책임감을 느끼고 더 즐겁게 열심히 하게 되었다. 아직 제대로 해낸 실험은 거의 없지만,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래도 뭔가 한 사람의 과학자로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 괜히 뿌듯하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내 생각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실험 결과는 예상대로 나오지 않고, 디스커션 도중 교수님께 내 생각을 말씀드리면, ‘네. 좋은 생각입니다만, 이렇게 하는 게 조금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라는 답을 들을 때가 많다. 교수님께서는 나를 한 사람의 연구자로 존중해주려 하시지만, 정작 나 스스로가 인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 내가 나를 잘 알아야 하고,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고들 말하던데, 내가 나를 한 사람의 연구자로 인정할 수 있어야 진짜 과학자가 되지 않을까 싶다. 역시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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