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익숙한 바이오를 벗어나서 운송산업에서 일한 3개월이 내게 준 교훈은 무엇일까?
바이오인은 바이오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이오는 우리의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실제로 우리는 생활인이다.
대중교통은 우리 삶의 일부이다.
나 자신을 실험실에서 유용한 인력으로 한정하지 말고,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본다면 못할 일이 없다.
인식의 전환이 앞으로 우리가 여러 도전들을 가능하게 할 원동력이 될 것이다.
-닥터헬렌킴SG-
<제1 장> 대한민국의 아빠들과 함께, 그리고 끈끈한 정과 함께
싱가포르에 새로 막 올린 오피스-상가 복합건물의 작은 공유 사무실에 대한민국의 아빠들이 무려 일곱 분이나 서로 살갗이 닿을 듯 앉아 있었다.
K 고속 해외 사업 입찰 TF 팀 정예 부대들이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한국 특유의 그 후끈함이 사무실을 가득 채운다. K 고속은 친절한 고객서비스로 한국 제1의 고속버스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국 및 베트남에서 고속버스 및 통근버스 운영 서비스로 해외 사업의 경험이 있었기에, 저물어가는 중국 사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각오로 싱가포르 “공영버스 입찰”이라는 사업에 도전을 하러 왔다.
회사에서 내린 큰 미션을 비장한 각오로 해결해야 하는 대한민국 아빠, 아버지들의 긴장감과 “어유 부장님~, 이 막내 Y 대리~ 요즘 버르장머리가 없어~“ 한국 특유의 끈끈한 사나이 문화도 사무실에 가득했다.
나는 통역 및 현지 정보 리서치 부분에 도움을 주는 역할로 팀에 들어갔지만 마치 상자 밖에서 신기한 장면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재미있었고, 또 꼭 잘 되어야 한다는 묘한 동지애도 솟았다.

K 고속 싱가포르 사업 입찰 TF 팀원분들과
<제2 장> 해외 사업 입찰의 핵심, 다른 문화 배경의 JV 파트너와의 커뮤니케이션
K 고속이 참여한 싱가포르 시내버스 운영 사업은 현지 주민들의 교통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싱가포르 사업체와의 합자기업 설립이 필수였다.
싱가포르 로컬기업인 T 해운이라는 규모는 작지만 꽤 안정적으로 싱가포르 앞바다에 들어오는 해외 선박 서비스 제공 업체를 파트너로 삼았다.
입찰서 작성을 위해서 우리는 거의 매일 소통하였고, 해외근무 경력을 업고 영어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는 Y 대리님과, 또한 오랜 중국지사 경험으로 중국어가 매우 유창하셨던 L 부장님은 합자회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각자의 사업 영역에서 전문성을 띠고 있지만, 두 회사 모두에게 ‘시내버스 운영’은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우리는 싱가포르 최대 버스 운용업체 S사 부사장 출신의 컨설턴트를 고용해서 버스 터미널 운영 및 출퇴근 시간 및 주간시간의 효율적인 버스 배차 등에 대한 제안서 작성의 필수 내용들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코끼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코가 길고, 다리가 굵다는 설명만으로는 그 코끼리라는 녀석이 얼마만큼의 부피와 위용을 갖는지 짐작할 수 없듯이, 우리는 제안서 작성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주말을 반납하고 T 해운의 회의실, 그들이 골프회원권을 보유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고급 골프장 회의실, 그리고 싱가포르 금융가에 위치한 AXA 빌딩 50층 회의실을 옮겨 다니면서, 서로의 의견 간극을 메우고자 애썼다.
때로는 언성이 올라가고, 갈등이 고조되었지만 입찰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심경들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올해는 K 고속에게는 작년에 이은 두 번째 시도인지라 TF 팀에 차출되어 온 차-부장님들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양국의 문화 차이 내에서 소통을 지원했고, 젊은 CEO를 두고 있던 상대 측은 싱가포르 고급 접대문화의 장소로 우리를 초대해서 서로 응어리진 마음을 풀어주고는 했다.

(좌측 상단) T 해운 선착장에서 운반선을 가리키는 나 (좌측 하단) 50층 AXA 빌딩 꼭대기에서 심각하게 치렀던 회의 (우) 토요일도 없이 일하는 가운데, 골프 포즈를 흉내 내며 장난을 치시는 J 차장님
<제3 장> 입찰 홍보를 위해서 서울에서 대표님이 오시다
8월 어느 날, 출근을 했더니 사무실 안이 술렁인다. “본사에서 대표님이 오실 예정이에요.”라고 Y 대리가 알려준다. 우리 중 가장 고참인 L 부장님은 K 고속의 선대 회장님부터 모셔온 분이라 애사심이 각별하셨다.
특히 K 고속의 문화 재단을 지원하면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가 된 쇼팽콩쿠르 우승자 조성진을 초등학교 때부터 봐오셨다고 했다.
“내가 대표님하고 상무님 모시고 호텔에 오면, 이후 스케줄 및 동선 그리고 방 온도, 슬리퍼 준비까지 모두 완벽해야 해.”
나는 아카데믹에만 있어서 그런지 사장님이 격려차 싱가포르에 오는데 입찰서 작성보다 더 긴장감이 도는 그 한 주가 또 그 마지막 배웅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대표님의 방문 2박 3일 동안, K 고속의 입찰을 홍보하기 위한 미디어 인터뷰 및 싱가포르 경제개발청 (EDB)와의 만남, 그리고 NTUC 싱가포르 노동조합 담당 국회의원과의 오찬까지 빡빡한 일정이 잡혀 있었다.
특히 T 해운의 대표는 싱가포르의 주요 일간지 스트레이츠 타임스 (The Straits Times)와의 인터뷰를 대비하여, 나를 토요일 오후 싱가포르 아메리칸 클럽에 불러서 미디어 대응법에 관한 여러 지침도 알려주었다.
마침내 서울에서 대표님이 도착하셨고, 우리는 함께 전용 밴을 타고 여러 일정들을 소화했다.
그분과 함께한 일정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리나베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싱가포르 경재 개발청 (EDB)에서의 미팅이었다.
나는 두 명의 EDB 담당자와 K 고속 대표님 및 여러 부장님들이 양쪽에 앉은 가운데 앉아서 두 대담을 통역하는 영광을 안았다.
꽤나 부담스러운 자리였지만 나는 긴장감을 낮추고자 대표님을 나의 아버지로, 또 담당 공무원은 내가 매일 마주하는 이웃처럼 이미지화하고 최대한 편한 마음으로 통역을 했다.
싱가포르 기관에서 6년을 근무했기에, 이곳의 기저에 깔린 해외 고객에 대한 입장도 이해하고 있었고, K 고속 측의 강점과 절실함도 알았기에 최대한 진심이 반영되도록 한 문장, 한 문장을 전달해 나갔다.

(사진, 좌) 싱가포르 경제개발청 내부 (사진, 우) (좌) 싱가포르 EDB 공무원, (중) 통역 중인 본인, (우) 왼쪽부터 K 고속의 L 대표이사, T 해운 대표 그리고 K 고속 상무
<제4 장> 꿈은 이루어진다, 비전보드 그리고 아쉬운 이별
대표님의 방문이 기름을 부었는지 9월이 되자 사무실 분위기는 점점 날카로워져 갔다. 가장 큰 문제는 버스 운영시간 시간표를 만드는 것인데, 고속버스와는 다른 시내버스 운행간격을 K 고속 터미널 운영 및 버스 배차의 베테랑들이 붙들고 있어도 그 문제를 풀기가 쉽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을 내보내서 구간마다 시간을 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정보를 모아보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9개의 입찰 팀 중에서 이미 싱가포르가 시내버스 운영 모델을 본 따온 영국 및 호주의 경쟁팀들이 있었다.
한국인의 매운 불꽃 맛으로 달려들고는 있지만, 담당자 또한 부담이 커지고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는 여러 동료들의 마음도 타들어가기만 했다.
나는 힘들어하는 K 고속 팀원분들을 위해서 비전보드를 만들었다.

비전보드
정말 K 고속의 로고를 달고 다니는 싱가포르의 시내버스를 보기 바라면서.
11월 초로 잡힌 발표도 함께하자는 권유가 있었지만, 나는 그 시점에서 입찰서의 발표를 내가 맡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월 초 아쉬운 결정을 내렸고, L 부장님과 다른 차 부장님들도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조금은 먹먹한 식사를 했다. 맛있는 것을 사주신 기억이 있다. 사람을 대하는 ‘덕’에 대해서 알려주신 L 부장님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해 K 고속은 싱가포르 입찰을 따지 못했다. 열심히 한 것과 달리 결국 싱가포르 정부는 ‘운용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그 사업을 모험적으로 맡길 수 없음을 이해했다. 아직도 싱가포르 한인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그때 내가 보고 응모했던 구인공고, 함께 올렸던 교민 여론조사 자료가 남아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오랜만에 Y 대리님과 연락이 닿았다. 그 해 이후 과장으로 진급하셔서 Y 과장님이 되셨고, L 부장님은 퇴직을 하셨다고 한다. 한국에 오면 연락하라고 하신다. J 차장님 H 부장님 Y 과장님 뵌 지 어느덧 5년이 지났지만 그 특유의 끈끈한 문화와 한국에 돌아간다면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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