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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기성장 Self-Discovery Lab] 나는 오리보다 못한 카이스트 대학원생, 싱가포르 날다 (5부)
Bio통신원(닥터헬렌킴SG)
-프롤로그-
차가운 새벽길을 떠나는 이를 위한 노래
-닥터헬렌킴SG
그대 이제는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앞에 다가왔는데, 아직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두려워 마소.
목적지가 없다는 것은 그대 마음을 열고 세상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니,
따뜻한 방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폐부를 스미는 상쾌한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한발 한발 안갯속을 뚫고 당당히 걸어갈 지어니!
[사진 1] ©dominik @Unsplash
<제1 장> 실험실을 나와서 겪는 심리적 공황 상태에 대해
석사 시절부터 시작해서 무려 15년간에서 보냈던 실험실 문을 열고 나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실험실 밖에서 나는 얼마나 유용한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학위를 하고 5년간의 포스트닥 경력을 가진 내가 집에서 쉬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만큼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나를 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남편은 출근을 하고, 집안일을 돌보는 아주머니는 밥을 짓고 청소를 한다.
이 집에 나의 자리가 없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보지만, Ph.D.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을 위한 일자리는 내가 박차고 나온 아카데믹 연구직 또는 대학 및 연구소의 고객을 상대로 연구기자재를 테크니컬 세일즈 하는 일들이 주를 이룬다.
머리로는 내가 가진 배경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퇴직 후 두 달 동안 단 한 줄의 이력서를 쓰지 못했다.
항상 난관이 올 때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일을 해치우던 자신이 익숙했던 나는, 하기 싫은 숙제를 매일 미루는 아이처럼 매일 구직에 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백일 된 아이와 두 살 된 아이를 혼자 키우면서도 박사 공부를 해내고, 졸업이 부끄럽지 않게 논문도 출판하고, 학위를 받자마자 싱가포르로 바로 해외 취업을 했던 내가…
그랬던 나는 어디에 있는지?
매일 잠을 잘 때마다…아니 잠들지 못한 날이 많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서 남편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자기 지금까지 너무 열심히 살았고, 우리가 자기 월급이 없어서 당장 큰일 나는 상황도 아닌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라면 일해주는 아줌마 있겠다, 월급 가져오는 남편 있겠다, 기회는 이때다 하면서 그동안 못 누린 자유와 여유를 마음껏 누릴 것 같아. 난 자기가 좀 편해지면 좋겠어.”
그렇다. 그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일 잠자리에 누울 때마다 침대 속으로 빨려 들어가서 저 심해의 바다 밑바닥까지 닿는 꿈을 꾸었다.
나는 너무나 익숙했던 연구라는 이정표를 잃어버린 나와, 앞으로 다가올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심하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제2 장> 백화점 시식코너처럼 파트타임 일들을 시작하다
그때 당시의 나는 나의 작은 경험들이 훗날 가져올 시너지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실험실 밖의 경험에 배가 고팠던 나는 조금씩 용기를 내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세상이 내게 기회를 주는 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 2016년 4월, 싱가포르 주재원 문화 교육 통역
링크드인 (Linkedin)에 접속하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국 문화교육 (Cultural Training) 업체의 연락이었다.
급하게 트레이닝이 잡혔는데 유경험자인 내가 이번에도 B를 도와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2년 전 그들은 나의 링크드인 프로파일을 보고서, 싱가포르에 부임하는 다국적 기업의 한국인 주재원을 위한 싱가포르 비즈니스 문화 교육의 통역을 의뢰했다.
교육 강사는 호주 사람인데, 주재원의 부인이 영어에 자신이 없어서 한국어가 가능한 내가 통역을 도와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다국적 기업은 주재원을 내보낼 때 부임할 나라의 역사 및 문화 등 비즈니스 업무를 위한 ‘Cultural Training’을 제공하는 것, 또한 그들이 도착해서 집을 구할 때까지 호텔 같은 서비스 아파트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나는 강사보다 더 재미있게 내가 알고 있는 싱가포르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전했다.
B는 그 후에 한국인 주재원 교육이 있을 때면 내게 연락을 하였다.
[사진 2] © Amy Hirschi @Unsplash
나는 전문적으로 통역을 배운 적이 없지만 B와 일을 하면서 나의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꽤 쓸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2016년 5월, 헬스케어 컨설팅 리서치 업무
나의 마음이 심해의 바다에 닿을 듯 말 듯 감정의 기복을 경험하는 나날 중에서 나는 “Korean-Speaking”이 필요한 헬스케어 컨설팅 회사의 파트타임 직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인터뷰를 보러 오라는 사무실은 싱가포르 금융가 래플즈 플레이스 (Raffles Place)의 한가운데 있었다.
[사진 3] © Muhammad Faris @Unsplash
사무실은 4-5명의 컨설턴트와 한 명의 영국인 사무직 여성이 근무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보자고 한 분은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미국을 거쳐서 싱가포르에 진출한 한국 분이셨다.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일 한 내용에 대해서 5년간 발설하지 않는다는 비밀유지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한 달 동안 매일 래플즈 가를 출근하면서 나는 다국적 제약사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무엇을 조사하는지 경험할 수 있었다.
조사를 하는 동안에 한국 제약사에서 일하는 선배와, 대학병원의 교수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괴롭혀야 했다.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컨설턴트의 직함이 화려해도, 나는 내 양심을 그르치지 않고 한국의 것을 해외에 소개하는 것이 더 맞는다는 생각을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3) 2016년 6월, 초등학교 과외 선생님
가끔 들르던 싱가포르의 교민 사이트에서 두 주 정도 국제 학교에 다니는 꼬맹이들을 맡아서 수학과 과학을 가르쳐 줄 선생님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나는 평소에 나의 두 아이를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그 일은 내게 매우 쉬워 보였다.
이메일을 보내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의 어머님은 미국계 은행에 근무하는 세련된 여성이었다.
그때의 만남은 훗날 놀라운 재회로 이어질지 짐작도 못한 채.
싱가포르 중심부 리버벨리 (River Valley)라는 곳으로 나는 아침마다 아이들을 만나러 출근을 하게 되었다.
사정이 생긴 다른 교사를 대체해서 임시로 아이들과 만나는 것이기에 마음의 부담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무척 귀여웠다.
네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는 과학키트 실험도 하고, 수학 문제도 함께 풀었다.
아이들마다 개성도 실력도 다르지만 각자의 장점을 최대한 알아 봐주고, 적어도 나의 수업 동안만큼은 아이들이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기를 바랐다.
내게 주어진 두 주 동안, 나는 굳이 아이들을 데리고 싱가포르-말레이 문화의 결합인 ‘페라나칸’ 뮤지엄과, 수업 마지막 날은 아이들을 데리고 싱가포르 사이언스 센터에 갔다.
[사진 4] 아이들과 함께한 과학 실험과 페라나칸 뮤지엄 및 싱가포르 사이언스 센터 방문
전문과외 선생님과 하는 수업과는 다른 차별성 그리고 무엇보다 빡빡한 수업에 지친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꾸밈없고 밝은 웃음 속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한 어머님이 연락을 주셔서 나의 시간이 괜찮다면 자신의 아이를 조금 더 가르쳐 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 번 노비나(Novena)라는 곳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수업을 하면서 나는 아이가 수학에 대한 자신감 ( 또는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찾아가는 모습과 더불어 어머님께서 내려 주시는 맛있는 네스프레소 한 잔에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이 경험을 통해서 나는 내가 누군가를 용기를 북돋아주며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3 장> K 고속, 싱가포르 사업 입찰 Taskforce 팀에 합류하다.
그해 7월, 나는 교민 사이트에서 한국의 K 고속이 싱가포르 진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3개월 동안 풀타임으로 통역을 도와줄 사람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집에서 사무실 위치가 가깝고, 무엇보다 석사 졸업 후 대전으로 내려가 연구소 근무와 학위과정을 밟는 동안 줄곧 이용했던 고속 버스였기에, 싱가포르에 어떤 일로 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면접을 보고 나는 그 이튿날부터 바로 출근하게 되었다.
K고속에서 싱가포르 입찰사업을 반드시 따오라는 임무를 받고 정예의 부대를 꾸려서 내보낸 태스크포스 (Taskforce) 팀이었다.
중국 해외사업 운영경험의 L 부장님,
터미널 운영 베테랑 H 부장님,
경기권의 유명버스 회사 창업주의 아들이면서 K고속에서 경력을 쌓고 있는 배차의 달인 L 대리,
고졸 출신이지만 정비기술 하나로 차장까지 진급한 정비계의 신화 P 차장님,
그리고 그들을 보필하는 Y 대리님까지 전부 사나이들로만 이뤄진 정예부대와 나는 석 달 동안 동고동락하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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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서 Bio NMR을 전공하고 싱가포르 A*STAR 신약개발 연구소에 취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온 세상이 장미빛. 뷰리풀~그러나 5년의 포스트 닭(Post-Doc) 기간 동안 나는 랩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울면서 맞이한 38살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랩을 떠나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국 임상회사의 지사를 이끌며 매일 아침 일하고 싶어서 눈뜨는 한국 K-Biotech을 위한 전략적 글로벌 헬스케어 사업개발이라는 직무를 찾았다. 곡기를 끊고 싶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맞춤옷 같은 나의 천직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리고 내게 맞는 인더스트리 직업을 어떻게 찾았을까? 혹시 당신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연재가 한줄기 빛을 제시할 것이다. 운영 중인 수상한 랩실, Self-Discovery Lab (https://blog.naver.com/ttkkii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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