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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노트] 이렇게 늦게 집에 가도 괜찮아?
Bio통신원(곽민준)
‘이렇게 늦게 집에 가도 괜찮아?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니?’
전화 통화할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걱정이 많으시다. 내가 연구실에서 너무 열심히 일하느라 힘들어 보여서 그렇다. 하긴,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집에 가는 날이 대부분이니 걱정하실 만도 하다. 물론 우리 랩은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어 야행성인 나는 매일 늦은 아침에 랩에 간다. 그리고 퇴근 시간도 자율이라 원하면 언제든지 일찍 갈 수 있다. 저녁만 먹고 6시에 칼퇴근하는 날도 꽤 있다. 그러나 보통은 밤늦게까지 랩에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나만 이렇게 하는 건 아니다. 우리 랩 사람들은 대부분 집에 늦게 간다. 특히 냉동고 문도 하나 제대로 못 닫는 그 사람은 모든 일에 항상 열심이라, 보통 나보다 더 늦은 시간에 집으로 향한다.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던 내가 그 사람 전화를 받고 냉장고 문을 닫아주러 간 것도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1).
이렇게 들으면 우리 랩 사람들이 너무 혹사당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문이 약간 잘못 나서 며칠 전에는 다른 연구실 사람 중 어떤 이가 우리 랩 사람들은 다들 일 중독이라고 말하는 걸 듣기도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뭔가를 엄청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우리 랩의 다른 사람들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아무리 연구가 재미있어도 모든 걸 바쳐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 한밤중 퇴근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사실 밤늦은 귀가에는 숨겨진 비밀이 하나 있다.
우리 랩 사람들은 보통 오후 6시쯤 저녁을 먹으러 간다. 메뉴는 대부분 학식이다. 아, 이번 학기부터는 박사 과정으로 새로 입학한 나이순 첫째 형이 차가 있어 밖에 나가 먹는 횟수가 늘긴 했다. 그러나 다들 가난한 대학원생이다 보니 멀리 맛있는 걸 사 먹으러 갈 여유는 없다. 그래서 밖에 나간다 해도 근처에 나가 간단히 먹고 돌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학식을 먹거나 간단히 외식하고 오면 보통 7시쯤에 다시 랩으로 돌아오는데, 바로 이 저녁 이후 시간이 우리의 퇴근을 늦추는 함정이다.
배를 든든히 채운 우리는 이제 열심히 오늘 할 일을 마무리하고 얼른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랩에 다시 도착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몸은 머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하다. 당최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각자 자리에 앉아 3~4분 정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나면, 하나둘 몸을 의자에서 떼기 시작한다. 이제 드디어 저녁 실험을 시작하는 거냐고? 그럴 리가! 다들 조그만 랩의 한가운데에 모여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어이없는 실수로 망해버린 오늘의 실험, 옆 랩 친구의 짝사랑 썰, 비대면 수업 도중 벌어진 재미난 에피소드 등 그날 있었던 일과 생각나는 이야기를 모조리 쓸어 담아 최선을 다해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물론 이야기가 아주 길게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온종일 붙어 있고 매일 만나다 보니, 사실 새로 할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10분, 20분이 흐르고 나면 이야기의 주제는 희한하게 항상 우리의 연구로 돌아간다. 오늘 하루 동안 한 일이라고는 새로운 실험을 실패한 것뿐이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레 대화가 실험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보통은 푸념으로 시작한다. ‘실험 결과가 너무 이상하다.’, ‘오늘도 망했다.’, ‘열심히 하는데 왜 이렇게 진전이 없는지 모르겠다.’ 등등 다양한 표현으로 비슷한 상황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듣던 사람들은 의미 없는 위로와 격려를 한두 마디 던지고, 자기들끼리 ‘너는 잘 하고 있어.’, ‘그 정도면 열심히 했지.’ 같은 입에 발린 말을 주고받으며 억지로 힘을 낸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실험이나 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조금 구체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와 모니터에 이 그림은 무슨 결과에요?’
‘어떤 실험이 잘 안 됐는데?’
‘내일은 뭐 해야 해?’
‘이 실험은 왜 하는 거예요?’
질문을 들은 사람이 귀찮아하며 짧게 답하면 대화가 끝나고 다시 각자 할 일을 찾아 떠난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연구 이야기를 생각보다 자세히 풀 때도 있고, 그러면 옆에 있던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보태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대화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흘러간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생긴 고민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결과를 해석하기 위해 한 사람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 신기한 그림이 도대체 무슨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 걸지 말도 안 되는 예상을 한마디씩 툭툭 던지기도 한다. 어떨 때는 오늘 읽은 흥미로운 논문 내용을 알려주기도 하며, 다른 연구실 대학원생의 연구 발표를 듣고 알게 된 새로운 정보도 주고받는다. 낮에 교수님과 디스커션한 내용도 공유하고, 그날 깨달은 실험 꿀팁도 전해준다. 또 친절한 선배님들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자기 시간을 써가며 실험 계획 세우기가 막막한 후배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렇게 저녁 이후 휴식시간, 혹은 디스커션 시간이 끝나면 벌써 밤이다. 가끔은 이야기가 너무 길게 이어져서 저녁 먹은 후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모여서 떠들다가 집에 간 적도 있을 정도다. 근데 그럴 거면 그냥 저녁 먹고 일찍 집에 들어가 편하게 쉬는 게 낫지 않냐고? 전혀! 나는 잡담 때문에 늦어지는 퇴근 시간이 아깝지 않다. 그 시간에 다른 대학원생들과 디스커션하며 느끼는 감정과 얻게 되는 지식이 나의 연구에 정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하지 못했던 생각을 다른 이에게 배우기도 하고, 내가 했던 생각을 다른 이를 통해 확신하기도 한다. 과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리고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때로는 혼자 실험하는 3시간보다 동료와 떠드는 30분이 내 연구에 훨씬 많은 도움이 된다. 그래서 연구실에 들어온 지 열 달 정도 흐른 지금,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대학원 1년 차를 보내며 가장 값졌던 시간이 뭐냐고 묻는다면, 매번 창의적인 실수를 할 때마다 이를 헤쳐나갈 논리적인 방법과 현명한 태도를 배울 수 있었던 교수님과의 디스커션 시간과 함께, 영양가 없는 소리 대부분과 짧은 알찬 디스커션으로 진행된 매일 저녁 이후 휴식시간이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내일도 저녁 이후 시간을 잘 활용해 많은 배움을 얻어야 할 텐데, 아쉽게도 내일은 나이순 첫째 형의 생일이다. 수다도 좋고 디스커션도 좋지만, 그래도 생일은 성대하게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만큼은 디스커션 시간을 빼고 다 같이 신나게 형의 생일을 즐길 예정이다.
이렇게 대학원 생활의 힘듦을 함께 나누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디스커션을 함께 주고받고, 또 서로 생일도 함께 축하할 수 있는 동료들이 있어서 참 좋다. 가끔은 새벽에 냉동고 문을 닫아달라는 전화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일을 제대로 시작하려고만 하면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냐고 귀찮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있어 쉽지 않은 연구실 생활과 늦은 퇴근도 즐겁다.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낯간지럽지만, 이런 사람들과 과학자로서의 첫 여정을 시작할 수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착하고 똑똑한 동료들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오늘도 남들보다 조금 늦은 귀가를 한 평범한 대학원생의 하루를 즐겁게 마무리해본다.
지난 9월, 옆 자리 형의 생일 파티
1) 새벽 1시에 냉동고 문을 닫아주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랩으로 향했던 일화.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320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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