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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소설로 읽는 근미래 이야기] 58. 야간근무
Bio통신원(과학작가 박재용)
@ pixabay.com
사내는 모니터 열 대를 마주하고 있다. 한 대는 열 지어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율 트럭 여섯 대를 공중에서 찍은 영상이다. 드론이 트럭 위 20미터 지점에서 계속 찍고 있다. 옆 모니터는 제일 앞쪽 트럭 유리창 위쪽의 블랙박스가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두 대씩이 한 무리의 군집 운행 트럭을 보여준다. 열 대의 모니터는 밤새 다섯 무리의 트럭을 보여준다. 상황은 한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다. 그것도 대부분 갑자기 튀어나온 고라니나 오소리 멧돼지에 의한 것. 시속 100칼로의 트럭들이 전방의 이상신호에 반응해 멈추는 데는 불과 30센티미터도 필요하지 않다. 거진 다 동물이 도로를 가로 질러 가는 걸로 끝난다.
그가 밤 근무를 맡는 동안 고작 두 번의 심각한 상황이 있었다. 하나는 들어오면 안 되는 인간이 운전하는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와선 일으킨 사고였다. 운전자는 만취상태였다. 제 정신이었으면 톨게이트를 무단 통과해서 고속도로로 들어올 일도 없다. 그 차는 군집 운행하는 트럭들 앞에서 갈지자를 그으며 난리를 부리다 결국 중앙 분리대에 부딪쳤다. 나머지 하나는 우기에 일어난 산사태 때문이었다. 군집 운행하는 트럭들 전방 100미터에서 일어난 산사태로 흙무더기가 도로 절반을 덮어버렸던 일이다. 그 두 사건에서도 사내가 한 일은 별 게 없었다. 그저 모니터로 오랜만의 신기한 영상을 지켜보는 게 다였다. 사건에 대한 보고는 차의 인공지능이 이미 전달한 다음이었고, 지체된 시간만큼 알아서 속도를 올려 제 시간에 도착했다. 그는 그저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모니터링을 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모니터만 쳐다보는 모니터링이었다. 그는 자신이 모니터링을 했다는 증거를 낼 필요도 없었다. 상황실의 CCTV가 그 장면을 녹화해서 저장했고, 매달 알아서 제출했다. 다만 CCTV가 계속 지켜보니 졸거나 자리를 이탈할 수 없을 뿐이다.
상황실에서 그렇게 모니터 열 대씩을 책임지는 이들이 열 명이었다. 잠시 식사나 화장실을 가려 자리를 비울 때는 이웃 모니터링 직원 둘이 다섯 대씩을 맡아준다. 이것도 시행령으로 정해져 있어 다섯 대의 모니터링을 추가로 하는 것은 8시간 근무 동안 30분을 넘길 수 없었다.
밤 11시에 시작한 일은 새벽인지 아침인지 헛갈리는 7시에 끝난다. 동지가 가까워지면서 7시가 다가와도 날이 환히 밝진 않는다. 사내는 일을 마무리하며 몸을 울쑥불쑥 한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는데 목을 둘러싼 살인지 근육인지가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는다. 온 몸이 무겁다. 야간 근무는 하면 할수록 몸을 망친다고 선배가 말했는데 3년이 되어가는 지금 그 말을 실감하고 있다. 익숙해지면 괜찮겠거니 했는데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망가지고 있다. 속이 더부룩해서 라면 하나를 끓여서 다 먹질 못한다. 7시가 되자 뒷 근무자가 자리로 왔다. 인수인계도 별 것이 없는 상황 둘은 서로 눈인사를 했고, 사내가 자리를 비워줄 뿐이다.
인성 로지스틱스 본사 빌딩 1층 뒷문으로 나온 사내는 바로 옆 흡연 부스로 들어갔다. 8시간 만에 담배를 꺼내든다.
몇 년 전만 해도 매일 트럭을 몰던 내가 이렇게 본사근무를 하게 될지는 몰랐지, 담배를 피울 때면 매번 옛날 일을 떠올린다.
인성 로지스틱스에서 트럭을 몰던 직원 1000명 중 남은 건 상황실에 근무하는 30명을 비롯해서 총 100명 조금 넘는 인원뿐이다. 4년 전 1년 가까운 파업을 끝내고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연봉 2년 치의 일시금을 받고 정리해고에 동의했다. 맹렬히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물류연대노조 차원에서 10개 사 노조가 동맹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된 싸움은 쉽지 않았다. 민주노총 차원에서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기세를 올렸고 고속도로 봉쇄, 광화문 집회, 단식 투쟁 등 해볼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임금 좀 올리자는 것도 아니고 당장 2년 안에 1만 명이 해고 통지를 받게 되니 누구든 죽을 각오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율 주행차 도입을 영원히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1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완전 고용 승계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편으로는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면서 또 한편에서는 정부와 사측 그리고 노조의 삼자 협의가 이어졌지만 평행선을 달릴 뿐이었다.
그 사이 사측의 공작이 들어왔다. 먼저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일괄적으로 2년 연봉을 일시불로 주면서 희망퇴직을 종용했다. 버티는 이들도 있었지만 돈의 유혹은 컸다. 파업이 길어지면서 다들 돈이 말라가고 있던 시점이었다.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이들에겐 알음알음으로 아파트 경비원 등 비정규직이지만 취업 자리도 주선이 되었다. 일부가 빠져나갔다.
정부에서도 파업 5개월이 넘어가자 희망퇴직자에게 우선적으로 취업지원금을 1000만원씩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단 기한은 한 달로 정해졌다. 다시 일부가 빠져나갔다. 파업 인원이 줄어들면서 내부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희망퇴직을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집회에 나가는 대신 다른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 알게 모르게 늘어났다. 하지만 정년이 한참 남은 이들을 중심으로 조금 더 버티자는 쪽이 더 많았다. 조합원들이 술렁이는 사이 두 명이 분신을 하기까지에 이르자 흔들리던 분위기는 다시 절박함으로 바뀌었다.
파업 8개월 차 정부가 다시 제안을 내놨다. 총 2000명 규모로 정부가 책임지고 정부 일자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6개월간의 훈련 뒤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 주변 태양광 발전 설비 점검 및 수리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사측이 책임지고 10%의 인원을 군집운행 자율 주행 트럭 모니터링 요원 등으로 흡수하기로 했다. 나머지 5000명에 대해선 일시불로 연봉 2년 치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불하고 정부에서 취업 장려금으로 1000만원을 추가로 지급하겠다는 제안도 덧붙여졌다. 1년 동안 재취업을 위한 교육이 무료로 행해지고 그 기간 동안 실업 수당도 제공하겠다고 했다.
조합원들이 본격적으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한 달 이내에 타결이 되지 않으면 이런 조건은 모두 철회하겠다는 압박도 들어왔다. 기업 별로 노조 집행부가 어떤 성향을 가지냐에 따라 온도차도 컸다. 인성로지스틱스 노조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노조 하나가 백기를 들자 나머지 노조들도 차례로 조건을 수용했고 결국 물류연대노조 차원에서 결국 패배를 선언했다.
사내는 인성 로지스틱스가 처음으로 파업을 철회하게 만든 이 중 하나였다. 노조 대의원이었던 그는 몇몇 다른 대의원과 함께 파업 철회를 투표에 붙이게끔 집행부를 압박했고, 조합원들을 설득하는데도 한몫했다. 결국 그는 회사 내의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담배를 연거푸 두 대 피우고 사내는 종각역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271A 버스를 타고 성신종합병원 정류장에 내려서 10분을 걸어 올라가 황성빌라 201호에 도착하니 8시다. 아내는 출근했고 아이는 아직 자고 있다. 보일러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집은 서늘했다. 대충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아이 방문 앞에 섰다. 아내가 쓴 메모를 본다. 오늘은 아이가 등교하는 날이다.
준비물은 가방에 다 챙겨 넣었어. 아침은 식탁에 차려놨어.
아이 등교시키고 낮 시간에 세탁기에 빨아놓은 빨래 탈수시켜서 널어줘.
아이 방문을 여니 비로소 온기가 돈다. 깨워 씻기고 칭얼거리는 녀석을 달래 아침을 먹인 후 5분 거리의 학교로 향한다. 아직 1학년이니 내년까지는 등하교길을 같이 가야한다. 어떤 집은 홈케어로봇에게 맡기기도 한다지만 이 집은 계획이 없다. 학교 앞은 분주했다. 녹색 어머니회 어머니들이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는 학교 앞 이면도로며 주변 횡단보도에서 쿄통 정리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며 어머니들 사이에 사내들 몇몇과 홈케어로봇이 뒤섞여 아이들과 학교를 향하고 혹은 아이가 교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주변의 지인들과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사내는 아이가 교문을 들어서는 걸 보고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웠는데, 피곤은 한데 잠이 오질 않는다.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사내는 이렇게 침대에 낯설게 누울 때면 또 항상 옛 일을 떠올린다.
직장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집에서 살아남진 못했다. 12년 전 노조 일로 만나 연애를 하다 결혼한 지 10년. 아내는 비정규직노조에서 사무장을 했고, 해고당하고, 복직투쟁을 하던 중이었다. 연대투쟁을 하다 만난 아내에게 반해 1년을 쫓아다녔고, 결국 사귀고 결혼까지 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내 긴장도 풀렸다. 연애를 할 때야 조심조심했지만 그 긴장이 풀리자 본 모습이 드러났다. 집을 찾지 못해 동네가 떠나가라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한 시간 여를 동네를 헤매고, 문 닫은 술집 셔터 앞에서 쪼그려 자다 새벽에 깨어 집으로 들어가고, 조합원들과 술을 마시다 시비가 붙어 쌍방폭행으로 입건되고, 걸핏하면 휴대폰이며 지갑을 잃어버렸고, 길에서 넘어져 앞니가 깨지고, 얼굴을 갈고, 잊을만하면 사고를 치면서 아내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래도 사이가 벌어지긴 했지만 서로 이혼을 꺼낼 정돈 아니었다. 나도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내가 생각하는 한에서였고, 아내는 참을성이 꽤 있었다. 그 사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도 이전만큼은 주사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아니 주사를 부릴 만큼 술을 마시질 못했다. 우리 사이도 금이 간 채긴 했지만 더 벌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3년 전 파업이 끝날 때 우리 관계도 끝났다. 회사에서 한 일을 알게 된 그 날 아내는 한 동안 말을 잊었다. 놀라 커졌던 눈은 나를 노려보았고, 조금 뒤 체념으로 바뀌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포기하는 체념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하는 체념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항상 생각했어. 우리 오르막의 정점은 결혼이었어. 그 뒤론 계속 내리막이었지. 그래도 그냥 정으로 살자고 생각했어. 아이도 있고. 그런데 너와 난 서로 다른 내리막을 걸었나봐. 오늘에야 그걸 알았네. 내가 참 멍청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아이를 낳기 전에 헤어지는 건데.”
나는 호소했다. 모두 가정을 위한 일이라고. 그간 모은 돈은 모두 박박 긁어 월세를 전세로 돌리는데 썼고, 그나마 있던 적금도 깼다. 파업을 하는 동안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버틴 끝이었다. 마이너스 통장은 이미 한도가 찼고 내 인내심도 한도가 찼다. 이미 패배가 뻔히 보이는 싸움을 얼마나 더 끌고 가야 한단 말인가? 아내가 알바를 했지만 그 걸론 태부족이었다.
나도 최선을 다했다고. 나는 울부짖듯 아내에게 말했지만 이미 선을 넘어버린 나를 보는 아내의 표정은 변하질 않았다.
알잖아? 이미 끝난 일이야.
아이가 아직 어려서 이혼은 뒤로 넘겼다. 돈도 없었다. 내가 노조 일을 하면서 벌이가 줄었고, 아내는 아이가 2살이 되어서야 다시 알바를 시작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데이터 라벨링 검수가 고작이었다. 둘이 벌어 조금씩 모아두었던 돈도 8개월의 파업 기간 동안 생활비로 반은 써버렸다. 적금은 깨졌고 남은 건 월세에서 전세로 돌린 빌라뿐이었다. 당장 이혼을 하자면 아이는 아내가 데리고 살아야할 터이고, 집에서 나가야 할 건 나였다. 서로간의 관계는 정리해도 당장 서로 살림을 따로 살 여유가 없었다.
대신 내가 밤 근무를 하고 아내가 낮 근무를 하기로 했다. 지난 3년 동안 아내와 얼굴을 마주 한 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둘 사이의 일은 카톡으로 대부분 처리했고, 아주 가끔 카톡으로 처리하기 어려운 일만 통화를 했다. 처음에는 같이 한 집에서 살면 아내도 조금씩 풀리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는데 가망 없는 일이란 걸 제대로 느끼는 중이다. 아내는 참을성도 강했지만 이미 내린 결론에도 강했다.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온 걸까? 안대를 끼고 누워 사내는 오지 않는 잠에게도 신경질을 부리지 못한다.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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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으로 과학의 역사 곳곳에 드러난 혹은 숨은 여러 사건을 바라보고 이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씁니다. 소설이니 당연히 팩트가 아닌 점도 있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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