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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기성장 Self-Discovery Lab] 나는 오리보다 못한 카이스트 대학원생, 싱가포르 날다 (1부)
Bio통신원(닥터헬렌킴SG)
프롤로그
생명과학 박사과정 입학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다들 졸업과 향후 진로 고민을 하면서 4-5년의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투자한 노력과 시간이 아까워서 다시 '포닭(Post-Doc)'의 길로 들어선다.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을까?
일단 1-2년 포닭(Post-Doc)을 하면서 정하자...”
이 글은 우리 모두가 하는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지 모른 채 생애 가장 중요한 십 년을 보낸 나 자신에게 주는 글이다.
길을 떠나서 해답을 찾고 제 자리를 찾았을 때 나는 오래전 머물렀던 이곳에 접속을 했다.
여전히 이 공간을 떠돌고 있는 같은 고민들…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겠다고 연재 모집 기간이 아닌 때에 문을 두드린다…쾅! 쾅! 쾅!
다행히 10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날 때 입었던 BRIC의 기념 티셔츠를 보시고, 담당자님이 문을 열어 주셨다. “오셔서 하실 말씀을 하세요”라고…
[사진 1] 싱가포르 나갈 때 BRIC에 메일 보내서 받은 기념 티셔츠
<제1 장> 나의 요란했던 NAR 논문 Accept 아침
2010년 5월 어느 날 아침,
“앜~ 교수님!! 저 억셉(Accept) 되었어요!! NAR 억셉되었어요!! 엉엉엉~”
아침 8시 반에 교수님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고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전날 리비전 원고를 보내고 24시간이 안 돼서 날아온 논문게제 억셉트 메일이었다.
‘진작에 받아줄 것을 이러려고 사람을 고생시켰나? 드디어 졸업이다. 나는 드디어 남편이 있는 싱가포르로 아이들과 떠나게 되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아침이었다.
약 2년 전 남편이 100일 된 딸과 두 돌 된 아들을 내게 맡기고 홀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싱가포르 난양공대 (NTU)로 포닭을 떠난 후 나는 지옥 같은 생활을 버텨오고 있었다.
두 돌까지 큰아이를 봐 주시던 시댁에서 큰 아이를 데려오고, 나는 핏덩이 딸아이를 내가 키우고 싶어서 독박 육아와 박사과정을 마치기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마음씨 좋으신 경비 아저씨가 늘 돌봐 주셔도 말썽인 카이스트 아파트의 낡은 보일러를 뒤로하고, 월세는 부담되었지만 따뜻한 물이 나오고 1층에 어린이집이 있어서 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이다.
한 달에 40만 원 월세, 내 박사 월급은 80만 원…어린이집에 보내면 남는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남편이 말 설고, 음식이 안 맞아서 피부병을 앓으면서 보내오는 외화가 그나마 희망이 되었다.
결혼 후 내 직장과 공부 때문에 늘 주말부부였는데 이제는 반년 만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지만 우리는 두 아이를 키우고 어서 자리를 잡아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이들은 퍽 하면 열이 났고, 그나마 나를 살게 해주었던 것은 3년 동안 늘 말아먹기만 하던 실험이 날개 돋친 듯 성공을 하는 것이었다. 아침 9시 출근해서 저녁 6시 퇴근할 때까지 숨도 안 쉬고 밥도 거르며 실험을 해냈다.
DNA와 타깃 단백질의 결합을 보는 EMSA 실험은 앞 방의 J 박사와 Y 박사가 도와주었다.
“언니 내가 다 내려가면 꺼줄게요. 걱정 말고 어서 가요~” 이 한마디가 얼마나 나를 살게 했는지 과연 그녀들은 알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9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있었던 랩 미팅이다. 주말 내내 아이들을 돌보다가 25일 밤에서야 나는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둘째가 열이 나고 깨어나서 칭얼대기 시작했다. 둘째를 재우려 포대기를 차고 무릎을 꿇고서 식탁에서 꾸역꾸역 자료를 만들었다. 그렇게 새벽이 밝았다.
[사진 2] 지도 교수님과 함께, 연구 잘 하겠다고 약속하고 박사과정 들어와서 두 번이나 출산한 제자를 보듬어 주신 카이스트 화학과 최병석 교수님과 우리 랩, 졸업 후 10년 후 2019년 3월에
<제2 장> 싱가포르에 날아가기 전에 직업 구하기
이제는 논문 게재의 들뜸에서 어서 정신을 차리고 직업을 구할 차례였다.
난 Bio NMR, 즉 구조생물학을 택한 이유가 ‘신약개발’ 딱 하나였다. 너무 목표가 확고했기에 어떻게던지 싱가포르의 제약회사에 취업하고 싶었다.
구글에 검색어를 넣는다. ‘NMR and Pharmaceutical”
마침 헤드헌터가 올린 명망 있는 제약사에서 NMR 포지션을 찾는다는 글이 검색되었다. 나는 영혼을 끌어와 안되는 영어로 커버레터와 CV를 써서 보냈고 곧 그녀에게서 전화 인터뷰를 하자는 답신을 받는다.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온사이트(on-site) 인터뷰를 보게 된 나는 그 해 6월 말에 남편이 있는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남편이 일하는 싱가포르 난양공대의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면서 말로만 들었던 바이오폴리스의 연구소로 발표를 하러 간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NMR 구조생물학 전공자를 뽑는 곳은 제약사가 아니고 싱가포르 A*STAR의 신약개발 연구소였다.
남편이 싱가포르로 간 이후, 한 번은 싱가포르의 Contact Singapore라는 국가기관에서 카이스트로 바이오폴리스를 홍보를 나온 적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우수한 인재들을 싱가포르로 영입하여서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밀리언 베이비(영입 학생)들에게 투자해서 최고의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인터뷰를 갔더니 소개 자료에서 보았던 건물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저곳에서 일할 수 있다면 유리창을 닦더라도 좋으니 한번 일해보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던 그 기회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사진 3] 웅장한 바이오폴리스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Biopolis#/media/File:Biopolis-Singapore-20080712.jpg
인터뷰를 볼 때 아주 확신에 차서 발표를 했던 기억이 난다. 기대대로 나는 ‘오퍼레터’ 라는 것을 받는다. 거기에는 나와 내 아이들의 항공권, 싱가포르에서의 주거비 보조, 이사 비용 그리고 그 당신 국내 포스트 닭으로서는 생각도 못 할 연봉이 적혀 있었다.
‘아 나는 이제 나는 어릴 때부터 꿈꾸던 직업을 가지고 새 인생을 살게 되겠구나.’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제3 장> 서슬 퍼런 마녀의 시샘
8월의 어느 날,
나는 좋아서 뛰어다니는 아이와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있는 내 친구가 소개해 준 의사 선생님 앞에 서있다.
“엄마 잘 들어요. 지금 딸아이는 전체 아이 100명 중에서 20프로에도 못하는 지능과 발달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이후로 그녀가 무슨 말을 내게 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이를 데리고 출국 짐을 싸서 머물고 있던 시댁에 들어가고…그날 밤 나는 거리에 나와서 울면서, 그동안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곱씹고 또 곱씹었다.
싱가포르 출발을 두 주 앞둔 날 받은 내 아이에 관한 선고였다. 둘째는 딸이라서 너무 예쁘다고, 떼 놓기 싫어서 부득부득 우기면서 내 옆에 끼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의사 선생님은 내가 싱가포르에 간다면 일을 하지 않고 아이 옆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난 이제 겨우 모든 미션을 마치고 막 날아오르려던 참인데…이번에도 마녀는 내게 주문을 건다.
“너는 평탄하게 인생을 살지 못해. 난 너를 미워하니까…”
소식을 들은 의사 친구마저도 밤늦은 근무를 마치고 내게 달려왔다.
‘너 그간 얼마나 고생한 거 나 아는데…고등학교 때부터 말한 네 꿈 내가 아는데…어떡하니? 네 아이가 네가 필요하다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봐”
주변의 만류에도 그냥 나는 생각했다. 난 이대로 멈출 수 없다. 방법을 찾아보자…이대로 무너질 수 없어… 나는 2010년 8월 마지막 날 이민 가방 두 개를 끌고, 두 아이를 안고 남편과 싱가포르행 비행기를 탔다.
[사진4] 마녀의 주문에 걸려 숲을 헤매는 내 마음, 사진©miriamespacio@Unsplash
본 기사는 네티즌에 의해 작성되었거나 기관에서 작성된 보도자료로, BRIC의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또한 내용 중 개인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사실확인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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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에서 Bio NMR을 전공하고 싱가포르 A*STAR 신약개발 연구소에 취업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온 세상이 장미빛. 뷰리풀~그러나 5년의 포스트 닭(Post-Doc) 기간 동안 나는 랩에서 평생을 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울면서 맞이한 38살 생일을 기점으로 나는 랩을 떠나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지금은 싱가포르에서 한국 임상회사의 지사를 이끌며 매일 아침 일하고 싶어서 눈뜨는 한국 K-Biotech을 위한 전략적 글로벌 헬스케어 사업개발이라는 직무를 찾았다. 곡기를 끊고 싶었던 어려움을 이겨내고 맞춤옷 같은 나의 천직을 발견하기까지 나는 그 길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겪었을까? 그리고 내게 맞는 인더스트리 직업을 어떻게 찾았을까? 혹시 당신도 같은 아픔을 겪고 있다면 나의 연재가 한줄기 빛을 제시할 것이다. 운영 중인 수상한 랩실, Self-Discovery Lab (https://blog.naver.com/ttkkii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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